•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5. 민간신앙
  • 2) 기타 민간신앙
  • (2) 마을신앙·개인신앙

(2) 마을신앙·개인신앙

 17세기 중엽에서 19세기 중엽에 이르는 200여 년 동안 수재·한발 등으로 인한 기근에 관한 기록은 모두 52회이며 전염병에 관한 기록은 79회로서 이 중 28회는 기근과 같이 발생하였다.328)趙 珖,<19세기 민란의 사회적 배경>(≪19세기 한국전통사회의 변모와 민중의식≫,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1982). 이같은 상황이 전개될 때마다 遊離逃散하는 하층민들이 속출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간에서는 彌勒信仰·鑑訣思想 등을 매개로 한 결사체들이 향촌의 외곽에서 번성하였으며, 향촌 안에서도 자구적인 대처의 한 방식으로 여제 또는 이와 유사한 형태의 동제가 설행되었고, 무격집단이 이러한 행사에 개입하였다. 정조 때의 한 기록을 보면 특히 괴질의 유행으로 그 피해가 클 때는 중앙에서 향과 축문 및 祭需品을 보내어 관찰사나 수령으로 하여금 성황이나 산천에서 厲祭와 慰祭를 주제하게 하는 등 종교행사에 대한 중앙정부의 개입도 중지된 것은 아니었다.329)≪正祖實錄≫권 51, 정조 23년 정월 갑술.

 순조 21년(1821)에 평안감사 金履喬가 다음과 같은 계를 올렸다.

평양부의 성 내외에 지난달 그믐부터 갑자기 괴질이 돌아 吐瀉關格이 일어나 열흘 내에 죽은 자가 천여 명에 이르렀으나 의약이 미치지 못하여 이를 구제하고 멈추게 할 방도가 없었습니다. 그 광경이 놀랍고도 참담하였습니다. 閭里의 물정은 祈禳하고자 하는 것인데 무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민심도 위안을 받아야 합니다. 비록 大小祀가 정지된 때이기는 하나 이번의 경우와는 그 취지가 다른 것이므로 本府의 庶尹인 金炳文을 시켜 성 안의 主鎭山에 기양하게 하였습니다(≪純祖實錄≫권 24, 순조 21년 8월 경인).

 이로 보건대 당시의 정부시책은 근본적으로 민간 주체의 신앙행위를 억제하는 데에 있었던 것 같다.

 지배층의 탄압으로 조선 초기 이래 주변화한 불교에서도 조선 후기에 이르러 미륵신앙과 같은 민간화 경향이 민의 성장과 더불어 나타났다. 이전에는 유랑민이었기도 한 승도들은 무리를 이루어 민가로 내려와 북소리·징소리를 울리고 붉은 비단기를 끌며 신을 强托하면서 기원해 주는 대신 식량을 얻어 갔다.330)李德懋,≪靑莊館全書≫권 1, 觀僧戱. 조선 후기의 불교의식들 중에는 이와 같이 당시의 민간에서의 욕구에 영합하거나 이를 수용하여 변형시킨 것들이 많았다. 대표적인 예는 亡者의 천도와 生者의 복락을 기원하는 薦度齋로서 그 동기와 내용에 있어서 무속의 씻김굿에 나타나는 것과 유사하다.

 祈禱·佛供·齋供養 등과 같은 불교의 기원의례도 민중들의 요구에 의해 행해졌다. 특히 재공양은 천도재에 해당하는 의례로서 살아 있는 자의 복락도 겸하여 위하였으므로 이를 통해 野壇法席·野外法會·卦佛齋 등의 민중적인 행사 공간도 마련되었다. 無住孤魂을 천도하는 水陸齋, 생전에 부처를 위하고 공을 닦는다는 뜻으로 윤년에 지내는 豫修齋 등은 자식들의 부모에 대한 효도의 하나로서 마을잔치의 성격을 띠고 유행처럼 행해졌다.

 동제란 촌락공동체 성원들이 일정한 장소에서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마을 연중행사의 하나다. 생산단위로서의 촌락이 전국적으로 형성된 조선 후기는 유교적 이념과 무속적 관행이 민간으로 확산된 시기이기도 하다. 동제의 형식과 내용에서 이러한 요소들이 함께 발견되는 것은 그것의 역사와 마을 형성의 역사가 궤를 같이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의의 형식은 지역별로 크게 다를 바 없다. 단지 용어나 절차 등의 구체적인 내용에서는 약간의 지역적 차이를 보인다.

 동제는 형식상 유교식 동제와 무당의 당굿이 있는 동제로 나눌 수 있다. 都堂祭나 別神祭는 후자에 해당하는 동제다.

 도당제는 도당할머니·도당할아버지를 모시는 중부지방의 마을굿으로 매년 또는 격년으로 정월 초나 봄·가을에 정기적으로 행해졌다. 일반적으로 주민 가운데 집에 해산이나 초상이 없는 깨끗하고 덕이 있는 사람이 제관이 된다. 비용은 각 집에서 추렴한다. 도당신에 대한 제사는 주민이 주관하였으나 이어 벌어지는 도당굿은 이 일대를 순회하는 무당패, 화랑이패, 또는 사당패 등이 진행하였다.

 별신제는「特別神祀」의 줄인 말331)李能和,≪朝鮮巫俗考≫(≪啓明≫19, 1927).이라고 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시장이나 도회처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성황신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어울려 술마시고 도박을 벌이는 별신제행사가 열렸는데, 이 행사의 후반은 주로 무당패가 담당하였다.

 동제의 형식은 촌락의 생태적 환경과 무관하지 않다. 농촌의 동제는 유교식 제사의 형식을 따른 경우가 많았으며, 동제·당제·당산제 등의 명칭을 가졌다. 어촌에서는 풍어제·용왕제 등의 명칭으로 해신·용왕신 등을 모시는 동제행사를 가졌는데 행사의 후반부에는 무당이 주관하는 굿이 열렸다. 산촌에서는 산신을 모시는 산제·산신제 등이 행해졌는데 농촌의 동제와 형식상 큰 차이가 없었다.

 장승과 솟대(또는 짐대)도 조선 후기에 민간신앙의 한 유형으로 널리 퍼진 마을신앙물이다. 이것들은 주로 마을 어귀에 설치되었다. 장승이 裨補나 辟邪의 목적으로 세워진 상징물이라면 솟대는 수재와 화재의 방지 등을 목적으로 하는 풍수상의 이유로 세워진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솟대는 이전에 읍성을 단위로 세워졌던 석장(또는 銅檣·木檣)이 민간신앙화한 것이다.332)鄭勝謨, 앞의 글.

 기우제는 민간에서도 널리 행해졌는데, 그 방식은 산 위에서 장작이나 솔가지 등을 쌓아 놓고 불을 지르는 방법, 주민 각자가 집 처마 끝에 버들가지나 솔가지로 마개를 한 물병을 거꾸로 매달아 물방울이 비처럼 내리게 하는 방법, 부인들이 강물을 키에 퍼서 머리에 이고 온몸을 적신 채 뭍을 오르내리게 하는 방법, 부인들이 각자 강물을 길은 물동이를 이고 제를 지내는 산 위에 와서 절을 하고 강물을 쏟는 방법, 시장을 옮기는 방법,333)成 俔,≪慵齋叢話≫권 7(≪大東野乘≫권 2 所收). 용을 그려 붙이거나 만들어 비는 방법, 용을 상징하는 줄로 줄다리기를 하는 방법, 龍沼·龍淵 등의 지명을 가진 곳에 개를 잡아 생피를 뿌리는 방법, 암장한 묘를 찾아내어 파내는 방법 등 다양하였다.

 제주도의 민간신앙은 명칭이나 내용에 있어서 육지의 그것과 차이가 나며 부분적으로는 조선 초기에 유행했던 신앙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곳에서는 대부분의 마을에 1∼2개의 신당을 두고 있었으며, 신의 성격은 천신·산신·농경신·산육신·해신 등 다양하다. 또한 마을마다 里社祭나 酺祭 등이 행해졌다. 1년에 한 번 정월 또는 7월의 初丁日에 이 제를 행하였는데, 정월 행사의 경우 대상신은 ‘里社之神’이고 7월 행사의 경우는 주로 ‘酺神’이다. 제사의 진행은 남성의 주관으로 이루어지며, 마을의 유지나 각 성씨의 대표가 제관을 맡았다.

 육지의 솟대에 해당하는 제주도의 풍수물은 ‘방사탑’과 ‘거욱대’다. 이것은 부정과 액을 막기 위해 마을의 허한 부분에 설치하였다. 돌하르방은 육지의 장승처럼 수문장 구실을 하는 門神인데, 마을신앙화한 육지의 경우와는 달리 이 곳에서는 여전히 읍성의 풍수물로 세워졌다.334)≪增補耽羅誌≫名所古蹟條를 보면 영조 30년(1754)에 목사 金夢奎가 翁仲石(돌하르방)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개인신앙 또는 가택신앙은 각 가정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지역단위로는 일정한 유형을 보인다. 그러나 어느 지역에서나 각 집안에는 안방에 신주단지(또는 제석오가리·세존주머니·제석주머니)가 있고, 마루에는 성주단지(성주대감·상량신·성주독·건궁성주)가 있으며, 그 밖의 竈王神·厠神·門前神·삼신할머니·터주·업 등이 있다.

 조상신·삼신·제석신 등은 안방에 위치하는데, 백미나 옷감을 넣은 단지를 神體로 한다. 성주신은 집안 신의 중심으로서 대들보에 위치한다. 이것은 집안의 평안과 무병을 비는 대상으로 주로 10월 상달에 무당을 불러 안택굿을 하는 등의 고사를 지낸다. 중부지방에서는 백지에 동전을 넣고 접어 물을 발라 대들보에 붙인 후 흰쌀을 뿌려 그 위에 붙여 둔다. 평안도·함경도 등지에서는 항아리에 쌀을 담아 대들보 위에 올려 놓는다.

 조왕신은 도교와 관련된 신으로 부뚜막에 위치한다. 터주는 뒷곁 또는 부엌의 뒷벽에 위치한다. 집에서 옷감을 사게 되면 토끝을 잘라 무명을 넣은 신주머니에 걸어 놓는다. 업 또는 業王神은 財神을 말한다. 人業·蛇業·족제비업 등으로 부르는 이것은 집안에 단을 세우고 벼이삭을 토기에 담아 그 위에 올려 놓아 만든다.

 질병을 예방하거나 치료하는 여러 가지 주술들이 무당에 의해, 혹은 세시풍속으로 지켜졌다. 이러한 행위들은 개인적인 요구에 따라 招神·逐鬼·呼鬼·禳災·禱福·액막이 등의 방식으로 행해졌다. 건축물의 기와에 鬼面을 새기는 것, 부적을 지니고 다니는 것 등은 이러한 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의 기능은 미리 정해져 있지 않으며, 그것이 적용될 때의 상황에 따라 그 기능과 의미가 달라진다.

 집을 단위로 하는 이와 같은 개인신앙에서의 의례는 가장 또는 주부가 음식을 간단히 차려 놓고 손을 비비면서 기원하는「비손」에서부터 무당을 불러 굿을 크게 여는 경우까지 다양하였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