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1. 학술의 진흥
  • 1) 고전의 정리

1) 고전의 정리

 조선 후기에는 사회변동과 더불어 학술·사상·문화적으로 새로운 변화와 발전이 이루어졌다. 이런 변화와 발전은 당시까지의 우리 문화를 정리하려는 움직임을 낳았다. 새로운 문화의 창조는 이전의 문화를 체계적으로 정리함으로써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문화의 정리작업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서적의 간행이다. 서적의 간행은 두 가지 작업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당시까지의 고전을 다시 정리하는 것이다.341)고전이란 학술이나 사상·문화적으로 항구적인 가치가 있는 서적을 말한다. 고전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오랜 기간 동안 많은 독자와 관련 전문가에 의해 그 가치가 인정되어야 한다. 동양 특히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서 고전은 經·史·子·集의 분류방식에 의해 체계적으로 정리되었다. 이렇게 정리된 것이 국가에 의해 편찬되고 그 권위가 인정되는 역대의 正史에 藝文志라는 이름으로 수록되었다. 또 중국에서는 청나라가 들어서자 중국 역대의 서적을 체계적으로 수집하여 가장 좋은 판본을 토대로≪四庫全書≫를 간행하였다. 또 이에 앞서서는≪古今圖書集成≫이라는 체계적인 수집, 간행이 있었다. 청나라가≪사고전서≫의 정리작업을 행한 데에는 이민족으로서 중국을 정복한 뒤, 청나라 조정에 비판적인 지식인의 에너지를 이 작업으로 돌리고 그들을 우대하여 회유하려는 의도와 청나라 조정 자신이 이민족이기는 하지만 중국문화의 수호자이며 정통적 계승자임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우리 나라에서 이전 왕조의 역사를 정리한 정사로는≪삼국사기≫·≪고려사≫를 들 수 있으나 이들에는 藝文志가 없다. 우리 나라 역대의 서적에 대하여는≪東國文獻備考≫의 藝文考에서 비교적 체계적으로 정리되었고 고전의 수집, 간행작업이 조선 후기에 비교적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중국과 같이 체계적·전면적으로 진행되지는 않았다. 다른 하나는 그 때까지의 문화 각 방면을 새로이 정리하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의 입장에서는 고전이 아니지만 오늘의 입장에서는 고전이 되었다.

 조선 후기 당시 알려진 고전 가운데에는 중국에서 저술된 것이 많다. 중국의 고전은 앞서 언급하였듯이 전통적으로 經·史·子·集으로 분류되었다. 여기서 문제는 중국의 고전을 우리의 고전으로 볼 수 있는가, 그리고 이에 대한 정리작업을 우리 문화의 정리작업으로 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중국의 고전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주체적으로 수용, 소화하여 우리 문화의 주요 부분을 구성하게 되었다면, 그것들은 우리 고전으로 볼 수 있으며 그것들에 대한 정리작업은 우리 문화의 정리작업으로 볼 수 있겠다.

 중국의 고전 가운데 經에 해당되는 유교서적에 대한 정리작업은 주로 주자학 관련문헌에 집중되었다.342)이에 대한 기존의 논고는 다음과 같다.
三浦國雄,<朱子大全箚疑에 대하여>(≪三森樹三郞博士 頌壽紀念 東洋學論集≫, 1979).
金容燮,<朱子의 土地論과 朝鮮後期 儒者>(≪延世論叢≫21, 1985. 5 ; 증보판≪朝鮮後期農業史硏究≫2, 일조각, 1990에 보완 재록).
金駿錫,<朝鮮後期 畿湖士林의 朱子 認識-朱子文集 語錄의 硏究, 展開過程>(≪百濟硏究≫18, 1988).
―――,<17세기 畿湖朱子學의 動向>(≪孫寶基博士停年紀念 韓國史學論叢≫, 知識産業社, 1988).
郭 稹,<論孟文義通考 解題>(≪論孟文義通考≫, 여강출판사, 1986).
柳鐸一,<韓國文獻註釋史序說草1>(≪파전 김무조박사회갑기념논총≫, 1989).
―――,<朱子書節要 註釋의 脈絡과 그 註釋書들-외래문헌의 한국적 수용 2->(≪書誌學硏究≫25·26, 1990).
이것은 당시 우리 학문의 주류가 주자학이었던 점과 관련된다. 주자학문헌에 대한 조선 후기의 정리작업은 세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첫째는 주자의 저작 자체를 다시 체계적으로 재정리하는 것이고, 둘째는 저작에 주석을 다는 것이고, 셋째는 기존의 저작집에 누락된 것을 수집하는 일이었다. 첫째와 둘째 작업은 겸한 경우가 많다.

 첫째, 주자학의 문헌에 대한 재정리작업은 일찍이 李滉에게서 시작되었는데, 그는 주자의 편지 가운데 중요한 것을 모아≪朱子書節要≫를 편찬하였다. 이것은≪朱子大全≫에 실린 1,700여 편의 편지 가운데 중요한 것만 추려낸 것이다. 이황이 편지를 중요시한 것은 주자학연구는 주자와 그 제자·친구들 사이에서 왕래한 서신을 공부하는 데서 출발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주자의 편지를 정리하는 작업은 이후도 계속되어≪朱書要類≫·≪朱書百選≫등이 편찬되었다.

 주자의 저작에 대하여도 발췌, 편집이 행해져 17세기 초에 鄭經世는≪朱文酌海≫를 펴냈다. 다만≪주문작해≫에는 주석이 달려 있지 않다. 이어 宋時烈은≪주자서절요≫와≪주문작해≫를 합쳐≪朱子節酌通編≫이라 하여≪주자서절요≫부분에 대해 그 주석서인≪朱書節要記疑≫의 주석을 첨가하는 한편≪주문작해≫부분에 대하여는 새로이 주석을 더했다.343)鄭經世는 이황의 제자인 柳成龍의 제자이므로 이황의 손제자에 해당된다. 그는 학통상 영남남인에 속하나 정치적으로는 서인측과도 연결되어 있다. 그의 사위 宋浚吉은 서인의 영수 가운데 하나로서 宋時烈과 절친하며 이 두 사람을 兩宋이라고 불렀다. 정경세의 송시열에 대한 영향은 이런 점에서도 생각할 수 있다. 다만 송시열은 영남남인의 주자연구를 계승하면서도 서인으로서 영남남인의 학문에 대한 비판적 안목, 대결의식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송시열은≪朱子書節要≫에 대한 주석 즉≪朱書節要記疑≫의 내용을 전적으로 수용하기는 하였으나 그 내용이 적당하지 않은 것으로 느끼고≪朱子大全箚疑≫를 저술할 때 자기의 안설을 제시하여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柳鐸一, 위의 글, 1990, 19쪽). 또 송시열은 영남학파의 주자연구가 부분적이며 불완전하다는 생각를 갖고 있었다(金駿錫, 위의 글, 1988a, 103쪽).

 한편≪朱子語類≫에 대한 정리도 행해졌다. 송시열은≪주자어류≫에 대해≪朱子語類小分≫을 펴냈으며(실전) 魚有鳳은≪朱子語類要約≫을 펴냈다.≪주자어류요약≫은≪주자어류≫가운데 정수만을 뽑아≪近思錄≫의 체제를 참작하여 재편집한 것이다.≪주자어류요약≫과 비슷한 시기에 노론 洛論系 李縡의≪朱子語類抄節≫, 영남학파 李裁의≪朱語要約≫등이 편집되었다.≪주어요약≫은 새로 문목을 만들어 재편집한 것이고≪주자어류초절≫은 새로 문목을 세워 분류하지 않고 단순히 정수를 발췌, 정리한 것이다. 이어 李裁의 외손자인 李象靖은≪주자서절요≫의 체제를 본떠≪朱子語節要≫를 편집하였다. 한편 노론 낙론계의 李宜哲은≪주자대전≫과≪주자어류≫등에서 道體와 性命 등에 관한 핵심 귀절을 발췌하여≪朱子典要≫를 편집하였다.

 둘째, 주자의 저작에 주석을 다는 일은≪朱書節要講錄≫·≪朱書講錄刊補≫·≪紫陽文集註解≫등에서 행해졌다.≪주서절요강록≫은≪주자서절요≫에 대해 주석을 단 것이며≪주서강록간보≫는≪주서절요강록≫을 수정, 증보한 것이다.344)李滉이 편집한≪주자서절요≫에도 각 편지의 말미에 이황의 간략한 주석이 붙어 있다. 또≪주서절요강록≫을 기호학파에서는≪주자서절요기의≫라고 불렀다. 앞서 언급했듯이≪주서절요강록≫=≪주자서절요기의≫의 내용을≪주자대전차의≫에 수록할 때 송시열이 이황의 주석에 대하여 안설을 첨가하여 보완한 데가 있다.≪주서절요강록≫은 이황과 제자들이 질의, 토론한 내용의 기록을 토대로 李德弘이 편찬하였다.≪주서강록간보≫는 이재가 편찬작업을 행하였으나 그의 생전에 간행되지 못하고 이상정이 교정하여 정조 9년(1785) 안동의 호계서원에서 간행하였다. 또 주자의 문집 자체에 대하여도 주석이 행해졌다. 柳慶輝는≪자양문집주해≫를 저술하였다.

 이상의 작업은 거의 이황계열의 영남학파에서 행해진 것인데 기호학파에서도 작업이 진행되었다. 송시열은≪주자대전≫ 전체에 대한 주석서로서≪朱子大全箚疑≫를 저술하였다.345)주자의 저작에 대한 송시열의 일련의 정리작업은 주자의 도통이 栗谷 李珥-沙溪 金長生을 경유하여 자기에게 전승되고 있다는 도통의식에서 출발하고 있다(金駿錫, 앞의 글, 1988b, 382쪽). 이것은 당시 남인과 정치적으로 대결하고 있으며 尹鑴와 같은「異端的」인 경전 해석이 대두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들의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영남남인의 주자저작에 대한 정리작업도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정통성을 내세우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된다.≪주자대전차의≫에 대하여는 이후 계속 수정·증보작업이 계속되어 金昌協의≪朱子大全箚疑問目≫, 이의철의≪朱子大全箚疑後語≫, 金邁淳의≪朱子大全箚疑問目標補≫, 李恒老의≪朱子大全箚疑輯補≫가 이루어졌다.≪주자어류≫에 대하여는 이의철이≪朱子語類考文解義≫라는 주석서를 펴냈다.

 한편 韓元震은 주자의 저작 가운데 서로 상충되는 것을 주제별로 모아≪朱子言論同異考≫를 편집하였다. 이것은 주자의 주장 가운데 상충되는 것들에 대하여 그 定論을 결정하기 위해서였다. 한원진은≪주자대전≫과≪주자어류≫전체를 검토대상으로 하여 자기가 정한 체제에 따라 내용을 재배치하고 기존의 상세한 주석과 자신의 견해를 덧붙였다.

 姜浩溥는 이를 더욱 발전시켜≪朱書分類≫를 편찬하였다.≪주서분류≫는≪주자대전≫과≪주자어류≫외에 주자의≪四書集註≫와≪四書或問≫및 기타<太極圖說>·<通書>·<朱子年譜>까지 망라해 주자의 모든 언설을 수집, 분류하여 이기·태극·천지·천문 등으로 나눠≪성리대전≫의 체제에 따라 정리하였다. 즉 주제에 따른 체계적인 분류이다. 여기에는≪朱書節要記疑≫·≪주자대전차의≫·≪주자대전차의후어≫·≪주자언론동이고≫·≪주자어류고문해의≫등에 수록된 주석 외에 중국측 자료에 의한 주석도 많으며 자기 자신의 견해도 덧붙였다.

 셋째, 주자저작의 보유작업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주자의 시문은 중국에서≪주자대전≫으로 집성되었는데 여기에 일부 누락된 것이 있었다. 朴世采는 누락된 것을≪朱子語類≫·≪翰墨大全≫·≪事文類聚≫·≪象山年譜≫등에서 수집하여≪朱子大全拾遺≫를 펴냈다. 이 작업은 현종 13년(1672) 완성되었으나 간행되지는 않았다.

 주자와 아울러 정자의 저작에 대한 정리작업도 행해졌다. 송시열은≪程書分類≫를 편찬하였으며 이항로는 제자 金平黙에게≪二程全書≫에 대한 주석서를 내도록 하였다. 송시열의≪정서분류≫의 편집방식은≪성리대전≫의 체제를 따른 것으로 나중에 강호보의≪주서분류≫가≪성리대전≫의 체제를 따른 것은 선행하는 송시열의 예에 의거한 것이다.

 주자학의 문헌에 대한 이런 체계적인 연구와 정리작업은 조선시대 문헌학의 수준을 높였다. 또 이런 정리작업은 당시 주자학 내부에서 전개된 기호학파와 영남학파의 대립, 주자학과 비주자학의 대립이라는 시대상황과 관련이 있다. 당시 조선주자학의 영남학파와 기호학파는 자기학파의 정통성을 주자학 관련문헌을 정리함으로써 주장하려 하였다. 주자학 관련문헌의 정리는 주자학연구 심화의 방법이었고 이런 연구의 심화는 비주자학에 대한 강한 비판의식과 결부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경전연구에서 비롯된 문헌학 수준의 제고는 역사학에서의 문헌고증학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주자의 문헌 외에 사서오경 그 자체에 대한 정리작업도 행해졌다. 이것은 대체로 주자학의 해석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갖는 계열에 의해 새로운 경전주석을 다는 식으로 행해졌다. 주자와 다소 다른 경전주석은 이미 李彦迪에게서 시작되고 있다.346)李丙燾,<李晦齋와 그 學問>(≪震檀學報≫6, 1936).
李泰鎭,<晦齋 李彦迪의 聖學과 仕宦>(≪韓國思想史學≫1, 1987).
―――,<正祖의 大學探究와 새로운 君主論>(≪李晦齋의 思想과 그 世界≫,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1992).
李篪衡,<晦齋의 經學思想-大學章句補篇·中庸九經衍義를 中心으로->(위의 책).
이언적은≪大學章句補遺≫와≪中庸九經衍義≫를 저술했다. 전자에서는 주자의 견해를 따르지 않고 자기 나름으로≪대학≫의 편차를 정하였다. 또 후자≪중용구경연의≫에서는 이상적 군주상을 그렸다. 그러나 주자와 명확히 다른 입장에서 비교적 새로운 경전주석을 체계적 형태로 처음 제시한 사람은 趙翼이라고 생각된다. 조익은≪大學困得≫·≪中庸困得≫·≪論語淺說≫·≪孟子淺說≫·≪書經淺說≫등의 저술을 내었다. 조익은 대동법의 주창자로 유명하며 대체로 양명학적 경향을 띠었다고 여겨진다.

 경전을 새로이 주석한 대표적인 사람은 송시열과 학문적으로 대립적 위치에 있던 朴世堂과 尹鑴이었다. 박세당의≪思辨錄≫과 윤휴의≪白湖全書≫에는 명백히 주자를 비판하고 그와 다른 주석을 제시한 것이 많다. 이것은 경전 해석상의 차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입장의 차이와 결부되어 당쟁의 한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한편 기호남인계인 李瀷과 소론계인 鄭齊斗도 새로운 주석을 제시하였다.347)李瀷은 유교의≪詩經≫·≪書經≫·≪易經≫·≪論語≫·≪孟子≫·≪中庸≫·≪大學≫ 등 여러 경전 및≪心經≫·≪近思錄≫·≪小學≫·≪家禮≫에 대하여 각기 疾書라는 주석서를 내고 四端七情 논의와 관련해≪四七新編≫을 저술했다. 鄭齊斗에게도≪論語解≫·≪孟子說≫등 경학관계 저술이 있다.

 윤휴의 학문은 權哲身을 통해 丁若銓·丁若鏞에게 이어졌으며 박세당도 대학삼강령의 재해석 등에서 정약용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준 것으로 여겨진다. 아울러 정약용은 이익의 경전연구도 계승하였다. 정약용의 경전주석은 이런 계승에 더하여 명·청의 새로운 경전주석, 일본 고학파의 주석도 흡수하여 그의 독창적 경학체계를 형성하였다. 아울러 만년에는 강화학파의 申綽과 학문적 토론도 행하였다. 정약용의 경학은 경세학과 깊이 결부된 것이 특색이다. 정제두에서 비롯된 강화학파는 박세당에게서도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지며 처음에는 양명학적 경향에서 출발하였으나 점차 漢學的 경향이 짙어졌다.

 한편 19세기에 들어가서는 노론측에서도 보다 탄력적인 경전해석이 나타났다.348)19세기 전반 경학의 개요를 위해서는 다음의 글이 참고된다.
김문식,≪19세기 전반 경기학인의 경학사상과 경세론-성해응·홍석주·정약용을 중심으로-≫(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5).
이것은 宋學 외에 漢學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洪奭周·李書九·金正喜·成海應 등이 그 예이다. 노론 중에는 주자학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경향도 강하였다. 金邁淳과 李恒老가 그 예라 하겠다. 이 가운데 김매순은 노론 세도가문을 대표하고 이항로는 재야의 노론을 대표한다.

 유교경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 경향은 처음에는 대체로≪大學≫에 관한 관심이 컸다. 그것은 양명학이≪대학≫의 새로운 해석에서 출발한 것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점차 유교경전 전반에 확대되어 갔으며 19세기에 이르러서≪尙書≫즉≪書經≫에 대한 관심이 매우 고조되었다. 그것은 유교경전에 대한 문헌고증적 연구가 심화됨에 따라≪상서≫今古文논의,≪古文尙書≫의 위조 여부가 논란이 되기 시작하고 원시유학에의 지향 및 청대 고증학의 영향 등으로≪사서≫가 아닌≪오경≫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였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중국의 역사문헌에 대한 정리작업은 司馬遷의≪史記≫와 班固의≪漢書≫등에 대해 우리의 입장에서 행하였다. 이 작업은≪사기≫·≪한서≫등에 체계적으로 주석을 붙이는 것보다는 원문의 주요 부분을 발췌하여 그것의 원의를 깊이 이해하려는 태도를 보였다.349)李成珪,<朝鮮後期 士大夫의 史記 理解>(≪震檀學報≫74, 1992) 참조. 이리하여≪史記英選≫·≪史漢一統≫·≪史漢略選≫·≪漢史列傳抄≫·≪兩京手圈≫등의 발췌, 재편집작업이 이루어졌다. 이들은≪사기≫와≪한서≫등에서 漢代史 부분을 함께 묶은 것이다.350)정조가 펴낸≪史記英選≫도 원래는≪漢書≫의 발췌부분이 있었으며 뒤에 이 부분만을 떼내어 따로≪漢草≫와≪漢書列傳選≫을 만들었다.

 ≪사기≫·≪한서≫를 중시한 것은 한대사에 주목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한대사에의 관심은 주자학에 대한 비판적 견해, 주자학적 인식의 틀을 벗어나려는 것과 관련이 있다. 조선 후기 주자학자들이 송대사를 이상으로 생각했던 것과 달리 비주자학적 또는 실학의 입장에 섰던 사람들은 대체로 송대보다는 한대의 제도·문물 등을 더 좋게 보았다. 또<사기열전>등에 대한 관심은 주자학 또는 유교의 명분론의 제약이 없거나 적었던 중국 고대의 생동하는 인간의 모습에 대한 동경이기도 하였다. 원문에 주석을 달지 않은 것은 주자학을 의식해서 그것과의 충돌을 막기 위한 방편인 측면도 있다.

 이런 한대사에 대한 정리작업과 대비되는, 조선주자학의 입장에서 송대사와 명대사에 대한 정리작업도 행하여졌다.351)이에 대하여는 다음의 글이 참고된다.
李成珪,<宋史銓의 編纂背景과 그 特色-朝鮮學人의 中國史 編纂에 관한 一硏究->(≪震檀學報≫49, 1980).
―――, 앞의 글(1992).
吳金成,<朝鮮學者之明史硏究>(≪韓中關係史硏討會論文集≫, 1983).
鄭玉子,<江漢 黃景源의 宋史 認識>(≪朝鮮後期知性史硏究≫, 일지사, 1991).
이것은 앞서 언급한 주자학 관계저술의 정리작업과 짝을 이루는 것이었다. 원래 주자학의 입장에서 보면 經과 史는 일치되는 것으로 경전의 이념은 역사 속에서 관철되어야 하며 역사의 정리는 주자학적 이념에 따라 정리되어야 한다. 이런 의식이 조선 후기에 특히 송대사와 명대사의 정리로 나타난 것은 對明義理論을 강조하는 시대적 분위기 및 조선주자학을 송대 중국주자학의 정통적 계승자로서 생각하면서 송대를 이상시하고 있었던 것과도 관련이 있다. 또 당시 주자학자들은 남송이 금나라에 압력을 받고 있었던 상황과 자신들의 상황을 매우 유사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리하여 명대사에 대하여는 李玄錫이≪明史綱目≫(숙종 29:1703) 및≪明史綱目補遺≫를 편찬하고 이어 영조대에는 국왕의 명령으로≪皇明通紀輯要≫를 간행하였다(영조 48:1772). 이 밖에도 南有容의≪明史纂要正綱≫, 趙徹永의≪續明史≫등이 있다. 송대사의 경우에는 중국에서 편찬한≪송사≫가 주자학적 입장에 충실하지 못하며 체제가 일관성이 결여되었다고 보고 주자학적 입장에 충실하며 체계적인 송대사≪宋史銓≫을 지었다. 이 작업은 국왕의 명으로 정조 초 규장각에서 黃景源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대체로 주자의≪資治通鑑綱目≫의 입장을 따랐다.≪사기≫·≪한서≫에 대한 발췌, 재편집작업이 기존의 고전정리라면, 송대사·명대사에 대한 작업은 기존 자료의 재정리와 아울러 새로운 저술이라는 성격도 크다.

 제자백가 가운데 주목된 인물은 노자와 장자였다. 박세당은 노자≪도덕경≫과≪장자≫에 대해 주석을 달았다. 노자≪도덕경≫에 대한 관심은 이후 소론계에서 계속되어 李忠翊은≪椒園談老≫를 저술하고 徐命膺도 주석서를 냈다.352)≪道德經≫에 대한 관심은 이미 李珥에게서 나타나 그는≪도덕경≫가운데 유가와 합치되는 부분을 발췌하여≪醇言≫을 지었다. 朴世堂의 경우 노자의≪도덕경≫은 유가의 修己治人과 합치된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한편 실학자계열은≪韓非子≫ 등 법가류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으며, 유가 가운데≪순자≫ 등에 대한 관심도 매우 컸다. 다만 독자적인 주석은 현재로서는 눈에 띄지 않는다.

 경·사·자·집 가운데 집에 해당하는 중국사람의 문장에 대하여는 정조가≪八子百選≫·≪四部手圈≫등과 같은 발췌, 편집작업을 행하였다. 조선 중기까지 우리는 중국의 명문장에 대한 학습을 주로≪古文眞寶≫를 통해 하였으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점차 이에 대한 비판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정조의 작업은 이런 분위기와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단순히 문장의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학문적 지향이라는 점과도 관련이 있다. 즉≪팔자백선≫과≪사부수권≫의 작업은 정조가≪五經百篇≫·≪朱書百選≫·≪大學類義≫등의 편집작업을 행한 것과 같은 맥락의 것이다.

 한편 조선 후기에는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한 정리작업도 견실하게 추구되었다. 유학의 경우 자기학파의 정통성에 대한 의식이 강하였고 이를 유교 도통의 입장에서 생각하였다. 그러나 당시까지의 우리 유학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서적은 눈에 뜨이지 않는다. 다만 앞서 언급한 주자와 관계된 문헌의 정리작업 외에 조선주자학을 수립한 이황·이이 등의 저술에 대하여도 정리가 이루어졌다.

 이황에 대해서는 이미 趙穆에 의해≪退溪集≫이 간행되었으며353)≪退溪集≫이 趙穆의 주도로 陶山書院에서 간행되는(선조 33년:1600) 과정에서 이를 둘러싸고 柳成龍과 조목계열 사이에 주도권 문제로 시비가 있었다(徐廷文,<退溪集 初刊과 月川·西崖是非>,≪北岳史論≫3, 1993, 참조). 이익은 사단칠정논의와 관련해 이황의 입장에서 따로≪四七新編≫을 편집하는 외에 이황의 저작 가운데 핵심적인 것을 뽑아≪李子粹語≫를 지었다.354)이것은 道體·爲學·窮格·涵養·力行·居家·出處·治道·政事·敎導·警戒·異端·聖賢 등의 주제로 분류되어 있다. 이런 李滉연구는 畿湖南人에서 다시 丁若鏞에게 계승되어≪陶山私淑錄≫을 지었다. 이이에 대하여는 朴世采가 다시 체계적으로 보충한 것에 李縡가 보유 등을 덧붙여≪栗谷全書≫를 간행하였고355)≪栗谷集≫은 원래 朴枝華가 펴낸 시집부분과 朴汝龍이 펴낸 문집부분을 합쳐 광해군 3년(1611)에 간행되었다. 朴世采가 속집·외집·별집을 숙종 8년(1682)에 간행하였는데 洛論系의 李縡가 뒤에 다시 문집·시집·속집·외집을 합치고 부록·부록속편·습유를 합쳐≪栗谷全書≫라 개칭하여 영조 20년(1744)에 간행하였다. 송시열에 대하여는 방대한≪宋子大全≫이 편찬되었다.356)宋時烈의 저작은 먼저 그의 제자인 權尙夏가 정리하였고(黃江本) 숙종 43년(1717)에 왕명으로≪宋子大全≫을 간행하였다. 뒤에 다시 황강본과 이≪송자대전≫(구본)을 합쳐 신본≪송자대전≫을 헌종 13년(1847)에 간행하였다. 구본은≪南軒文集≫의 체제를 따랐으나 신본은≪朱子大全≫의 체제를 취하였다.≪주자대전≫에≪朱子大全箚疑≫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송자대전≫에 대하여는≪宋子大全箚疑≫가 있다. 후손 宋周相·宋近洙 등의 손을 거쳐 광무 4년(1900)에 간행되었다. 이는 자기학파의 학통 수립 및 정당성 주장과 관련이 있는 작업이었다.

 우리 역사를 재정리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것은 통사를 재정리하는 것, 고려시대에 대한 관심, 조선조 당대사에 대한 관심의 세 가지로 나타났다. 첫번째의 저술로는≪東國通鑑提綱≫·≪東史會綱≫·≪東史綱目≫·≪海東繹史≫등이 대표적이고, 둘째번의 저술로는≪麗史提綱≫·≪彙纂麗史≫가 있으며, 세번째의 저술로는≪列朝通紀≫·≪燃藜室記述≫이 대표적이다.

 당대사와 관련해서는 각 당파의 입장에서 여러 당론서가 편찬되고 아울러 이런 여러 당론서를 모은 총서가 편집되기도 하였다.357)李泰鎭,<朝鮮時代 野史發達의 推移와 性格>(≪金龍德博士 停年紀念論叢≫, 1988).
安大會,<朝鮮後期 野史叢書 編纂의 意味와 性格>(≪民族文化≫, 民族文化推進會, 1992).
역사학과 관련해서 여러 역사지리서가 편찬되었다. 조선 후기의 역사지리서는 韓百謙의≪東國地理誌≫에서 시작하여 申景濬의≪疆界誌≫, 丁若鏞의≪我邦疆域考≫, 韓鎭書의≪海東繹史≫地理考 등으로 이어졌다.358)實學의 선구자이기도 한 韓百謙은 徐敬德계열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특이한 이기론·예설을 주장하고 실학자들의 토지개혁론의 토대가 되는≪箕田攷≫를 저술하였다. 한백겸 이후 申景濬·丁若鏞·韓鎭書의 역사지리학은 고대사를 고조선과 삼한의 이원체계로 보는(南自南 北自北)≪동국지리지≫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았다. 이들 외에 소론계의 南九萬·李世龜 등도 역사지리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이들 역사지리학자들의 연구는 17세기에 강목체 사학이 대두하는 가운데 우리 역사를 현실적으로 볼 수 있도록 함으로써 시야를 넓고도 크게 해주었으며, 역사에서 보다 고증을 철저히 하도록 하여 우리 역사학의 과학성을 제고시켰다. 또 18세기 이후 강목체 역사서인 林象德의≪동사회강≫과 安鼎福의≪동사강목≫에 역사지리적 인식의 영향을 주어 강목체 사학에서도 역사를 현실적 관점에서 보는 태도를 부분적으로 수용할 수 있게 하였다. 인문지리학서의 성격을 갖는 것으로 柳馨遠은≪東國輿地志≫를, 李重煥은≪擇里志≫를 각각 저술하였다.

 조선조의 기본적인 국가제도는≪經國大典≫에 의해 정리되었는데, 이≪경국대전≫에 따른 체제는 갑오개혁에 의해 국가의 체제가 근본적으로 변할 때까지 유지되었다. 그러나≪경국대전≫편찬 이후에도 조선 중·후기 이래의 여러 정치적·경제적·사회적 변화을 반영하여 부분적인 개선이나 제도개혁이 꾸준히 이루어졌으며 이것이 법전에 수록되었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급격한 사회변동을 반영하여≪受敎輯錄≫(숙종 24:1698),≪典錄通考≫(숙종 34),≪續大典≫(영조 22:1746),≪大典通編≫(정조 9:1785) 등 여러 차례 법전편찬을 시행하였다.359)≪經國大典≫편찬 이후 얼마 안 되어 성종 23년(1492) 李克增에 의해≪경국대전≫ 이후의 국가의 항구적인 법을 모은≪大典續錄≫이 편찬되었고 중종 38년(1543)에는≪대전속록≫이후의 항구적인 법을 모아≪大典後續錄≫이 편찬되었다. 이것은≪경국대전≫체제가 성립한 이후 얼마 안 되어 변화하기 시작하였음을 의미한다.

 ≪수교집록≫은 중종 때 편찬된≪大典後續錄≫이후의 수교를 모아≪大典續錄≫및≪大典後續錄≫의 체제에 따라 분류한 것이다. 숙종 8년에 착수하여 숙종 24년에 완성되었으므로 매우 오랜 세월이 걸린 것이다. 이것은 그 사이 수교를 체계적으로 모으지 않은 데다가 양란을 겪었으며 정치적 변동이 잦아 산일된 것이 많아서 수집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후 숙종은 崔錫鼎에게 명하여≪전록통고≫를 편찬하도록 하였다. 이것은≪경국대전≫·≪대전속록≫·≪대전후속록≫·≪수교집록≫등을 합편한 것으로≪경국대전≫을 위주로 하여 해당되는 항목 아래에≪대전속록≫·≪대전후속록≫·≪수교집록≫의 관련항목을 추록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수교는 원래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임시로 행해진 것이다. 영조는 기존의 수교들을 모아 여기에 항구적인 법전의 성격을 부여하려 하였다. 이런 의도로 편찬된 것이 바로≪속대전≫이다.≪속대전≫역시≪경국대전≫체제를 위주로 한 것으로≪대전속록≫·≪대전후속록≫·≪수교집록≫·≪전록통고≫에 수록되지 않은 여러 수교를 보충한 것이다. 이것은≪경국대전≫이후 임시적으로 그때그때 이루어진 여러 수교를 기본적인 법전체계로 끌어들이려는 조치이다. 영조 때의≪속대전≫편찬작업은 결과적으로 바로 다음 정조 때 편찬한≪대전통편≫의 기초작업이 되었다. 그런데≪속대전≫에는 형벌을 관대히 하려는 태도가 나타나고 있다.360)영조 24년(1748)에는 정부에서 법의학서인≪洗寃錄≫·≪平寃錄≫·≪未信編≫ 등을 상호 대조·수정하여 지방관에 나누어 주게 하였으며 정조는 동양 법의학서의 고전인≪無寃錄≫을 증보한≪增修無寃錄≫과≪增修無寃錄諺解≫를 간행하도록 하였다.

 정조가 편찬한≪대전통편≫은≪경국대전≫에다가≪속대전≫에서 수정, 증보된 내용 및≪속대전≫ 이후 국왕의 교서·명령 등을 보충하여 18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조선 후기의 변화를 총체적으로 반영하였다.≪대전통편≫은 金致仁이 정조의 명에 의해 편찬한 것으로≪경국대전≫의 원문은 그대로 두고≪속대전≫및 이후의 사항만 추록하는 형식을 취하였다.≪경국대전≫의 원문에는 ‘元’이라 표시하고, 속대전의 본문에는 ‘續’, 속대전 이후의 사항에는 ‘增’이라 표시하여 상호 구별되었다. 이로써 경국대전 이후의 여러 법률적 조처가 완전히 국가의 기본적인 법전에 포함될 수 있었다.361)≪大典通編≫은 고종 때 다시 趙斗淳에 의해 증보되어≪大典會通≫이 편찬되었다(고종 2:1865). 여기에는≪대전통편≫이후 90년간의 변화가 추가되었는데, 이렇게 새로 추가된 것은 ‘補’라고 표시하였다.

 국가의 기본법전인≪경국대전≫과 표리를 이루는 의례서가≪國朝五禮儀≫이다. 이≪국조오례의≫도≪경국대전≫과 마찬가지로 조선 중·후기의 사회변동에 따라 수정, 증보가 필요하게 되었다. 더욱이 17세기 국가전례와 관련되어 예송이 전개되면서 그 필요성을 더욱 증대시켰다. 이리하여 편찬된 것이≪續五禮儀≫이다.

 한편 조선 초기 이래 민간의 기본 도덕과 윤리를 규율하는 것은 삼강과 오륜이었다. 세종대에≪삼강행실≫과≪오륜행실≫이 간행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새로운 필요에 따라 이를 수정, 증보하는 작업이 행해졌다.

 끝으로 우리 문화를 총체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으로서 백과전서가 편찬되었다. 우리의 백과전서학은≪通典≫·≪文獻通考≫등 중국의 類書學을 수용한 뒤 우리 문물과 제도의 독자성을 자각하면서 이루어졌다. 우리의 백과전서는 선초≪治平要覽≫에서 시작된 것으로 여겨지나 본격적인 출발은 조선 중기 魚叔權의≪攷事撮要≫와 權文海의≪大東韻府群玉≫을 들 수 있다. 한편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는 백과전서학이 단순히 사실을 나열하는 것만이 아니라 실학 등 개혁사상과 관련하여 전개되었다. 이런 개혁사상적인 백과전서학은 17세기 초 李睟光의≪芝峯類說≫에서 비롯되며 金堉도≪類苑叢寶≫라는 백과전서를 편찬하였다. 전자가 실학적 개혁론의 입장에 서 있다면 후자는 관료적 개혁론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李瀷은 이수광의≪지봉유설≫을 계승하는 한편 유형원의≪磻溪隨錄≫의 개혁사상을 수용하여≪星湖僿說≫을 저술하였다. 즉≪성호사설≫에서는 백과전서학과 실학적 개혁사상이 결합되었다. 이러한 백과전서학은 李圭景의≪五洲衍文長箋散稿≫로 이어졌다.

 조선 후기의 가장 본격적인 백과전서는 영조가 洪鳳漢에게 명해 편찬한≪東國文獻備考≫(영조 46:1770)이다. 이 작업에는 서명응과 그의 아들 徐浩修 및 蔡濟恭·申景濬 등이 참여하였다. 선초의≪치평요람≫을 제외하면 이제까지의 백과전서는 대체로 민간차원의 저술이었으나≪동국문헌비고≫는 관찬서라는 점이 특색이다.≪동국문헌비고≫는 정조대에 다시 왕명에 의해 수정, 증보작업이 실시되었다. 이 작업에는 정조 6년(1782)에 시작하여 정조 14년에 일단락 지었다가 다시 정조 21년까지 보완작업을 계속하였다. 이것이≪증정동국문헌비고≫이다.≪동국문헌비고≫와≪증정동국문헌비고≫는 영조와 정조대에 탕평과 개혁정치가 추구되는 분위기에서 개혁추구를 위한 기초작업으로 우리의 제도와 문물을 총정리하는 작업이라는 성격을 갖는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김육의≪유원총보≫와 같은 관료적 개혁론의 입장에 서 있는 것이었다.362)≪增訂東國文獻備考≫는 간행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갑오개혁 이후 새로운 제도변화 등을 포함하여 융희 2년(1908)≪增補文獻備考≫라는 이름으로 간행되었다. 근대 학문을 맞이하기 직전, 그리고 망국의 직전에 우리의 역대 제도를 우리 손으로 총정리한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 그러나 이 작업에는 실학의 연구성과도 많이 반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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