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1. 학술의 진흥
  • 3) 규장각의 학술활동
  • (1) 설치와 조직

가. 설치

 奎章閣의 설치는 정조 자신이 학문을 좋아하였다는 개인적 기호와도 관련이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정조 때의 정국과 관련해 정치적 의미가 매우 큰 기관이었다. 정조 초년에는 洪國榮의 전권 아래 金鍾秀 등 노론 淸明黨계열이 정국을 주도한 시기였다. 그러나 정조 3년(1799) 9월 홍국영이 정계에서 배제된 후 정조 4년부터는 정국이 일신되었다. 정조는 소론 峻論系(강경파)를 강화시켜 이를 노론 청명당계와 보합하고자 하였다. 또 정조 12년 이후에는 노론과 남인의 峻論(淸南)을 함께 쓰고자 하였으며, 정조 19년 이후에는 時派와 僻派의 갈등을 완화하기 위해 노론에서 중도파를 중용하고 이를 다시 청남계와 화합시키려 하였다. 정조는 이렇듯 일관되게 정파의 상호 균형과 조제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는 동시에 개혁을 추진해 나아가려 하였다. 이것이 바로 정조의 蕩平策이었다.370)정조대의 정국과 탕평론에 대한 연구로는 다음의 글이 참고된다.
김성윤,<正祖 年間의 政局 構圖와 그 動向>(釜山大 碩士學位論文, 1990).
―――,<蕩平의 原理와 蕩平論>(≪釜大史學≫ 15·16, 1992).
朴光用,≪朝鮮後期 蕩平 硏究≫(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4).

 정파의 상호 균형을 위해서는 그 핵을 이루는 국왕의 친위세력 형성이 필요하였으며 개혁추진을 위해서는 개혁이념의 제시와 실현방법 등을 갖추기 위한 준비와 연구가 필요하였다. 규장각은 바로 이 두 가지 목적을 위해 설치되었다. 정조는 벼슬길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 유능한 관리를 규장각에 소속시켜 국왕의 직접 감독하에 학문적 훈련을 쌓게 하는 등 학술활동을 추진하였다. 규장각에서 국왕 자신의 이념에 따라 훈련받는 동안 당색을 떠나 자연히 공동의 정치적 이념을 가진 하나의 정치세력을 형성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 정조의 생각이었다. 정조는 그 자신이≪弘齋全書≫라는 거질의 문집을 남긴 대학자로서 정통주자학과는 다소 다른 학문적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학문을 토대로 하여 그것을 신진관료에 확산시킴으로써 개혁정치를 실시하고자 하였다.

 정조는 즉위한 그 해(1776) 9월에 바로 규장각을 설치하였다.371)규장각 설치와 관련된 기존의 연구로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金龍德,<奎章閣考>(≪中央大論文集≫2, 1957).
李離和,<奎章閣小考>(≪奎章閣≫3, 1979).
鄭玉子,<奎章閣 抄啓文臣 硏究>(≪奎章閣≫4, 1980).
愼鏞廈,<奎章閣 圖書의 變遷過程에 대한 硏究>(≪奎章閣≫5, 1981).
鄭玉子,<正祖의 抄啓文臣 敎育과 文體 政策>(≪奎章閣≫6, 1982).
薛錫圭,<奎章閣 硏究> 상·하 (≪大丘史學≫29·30, 1986).
처음 설치할 때에는 御製봉안과 도서관 정도의 기능을 갖추도록 하였다. 이것은 숙종 때 설치되었던 어제봉안소의 기능을 약간 발전시킨 정도였다. 설립 초기의 규장각에는 정조 및 역대 군주의 어제·어필·보책·인장·어진 등이 보관되는 외에 중국 및 우리 나라의 서적이 소장되었다.

 규장각의 기능과 조직은 서서히 강화되었다. 정조 원년 12월에는 교서관의 기능을 흡수하여 어제와 서적을 인쇄, 반포하는 기능이 추가되었으며 정조 3년 6월에는 검서관제도를 만들어 문한이 있는 자 4명을 임명하였다.372)이 때는 외각인 교서관의 檢書官으로 임명된 것이고 내각인 규장각의 검서관이 된 것은 정조 5년 정월이다(김용덕, 위의 글). 이덕무의≪靑莊館全書≫에 “규장각의 검서관으로 옮겨 임명되었다. 처음에는 외각의 검서관이었다. 이제 (외각은) 내각에 부속되어 있다”(권 70, 年譜, 신축 정월)라 하고 있다. 서적의 관리와 편집, 간행 외에 어제·명령 등 내각에서 나오는 모든 글을 필사·교정·편집하고 문신들의 매월 강의내용을 기록하는 것 등이 그 임무였다. 처음에 임명된 4명의 검서관은 徐理修·李德懋·柳得恭·朴齊家로서 모두 서얼이었다.

 정조 5년에는 규장각의 조직과 기능이 보다 강화되었다. 이 해 2월 宗正寺에 걸려 있던 숙종이 쓴 편액을 옮겨 왔는데 이것은 종정시의 기능을 규장각이 흡수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종정시는 사관을 겸직하고 어사대의 권한을 가졌다. 또 이 해 3월에는 규장각의 사무실 및 숙직소인 擒文院을 여러 관아 가운데 가장 넓은 옛 도총부 청사로 옮기고 강화도에 외규장각을 설치할 것을 명하였다.

 이후 규장각 관리의 권한은 매우 커졌다. 국왕의 측근관리로서 숙직하는 외에 승지의 입시에 배석하며 언관으로서 삼사 이상의 권한을 가졌고 인재의 선발과 추천에도 참여하였다. 이런 규장각의 강화는 정조의 왕권 확립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며 규장각의 권한 확대는 삼사의 위축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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