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2. 실학의 발전
  • 1) 실학사상의 성립
  • (1) 실학개념의 정립

가. 실학사상의 존재

 일반적으로 實學思想은 조선 후기 17세기 이후의 사회에서 출현한 현실개혁적 사유형태를 지칭하고 있다. 해방 이후 남북한의 학계에서는 실학사상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 의미를 구명하려는 작업을 활발히 전개해 왔다.383)조선 후기 실학사상에 대한 연구사적 검토는 다음의 글들이 있다.
池斗煥,<朝鮮後期 實學硏究의 問題點과 방향>(≪泰東古典硏究≫3, 1987), 103∼148쪽.
김현영,<‘실학’연구의 반성과 전망>(≪한국중세사회 해체기의 제문제≫상, 한울, 1987), 311∼337쪽.
趙 珖,<朝鮮後期 實學思想의 硏究動向과 展望>(≪金昌洙敎授華甲紀念史學論叢≫, 汎友社, 1992), 406∼443쪽.
조성을,<실학과 민중사상>(≪한국역사입문≫②, 풀빛, 1996).
그러나 실학에 대한 최근의 연구결과를 검토해 볼 때 실학사상과 관련된 몇 가지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이러한 점을 구명하는 차원에서 실학의 존재 및 개념과 관련된 문제들부터 살펴보자.

 조선 후기 실학사상의 존재 여부에 대한 문제이다. 최근에는 일부 연구자들은 조선 후기 실학사상의 존재 자체를 의문시하기도 한다.384)도날드 베이커 著, 金世潤 譯,<실학개념의 사용과 오용>(≪조선 후기 유교와 천주교의 대립≫, 一潮閣, 1997, 232∼234쪽;Baker, The Use and Abuse of the Sirhak Label,≪敎會史硏究≫3, 한국교회사연구소, 1981) 참조. 이 글을 비롯하여 최근 일부 연구자들은 실학사상의 존재 자체에 의심을 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실학사상의 존재를 서구적 관점이나 기준이 아니라 동양사상 일반이 드러내고 있는 특성에 따라 검토해야 한다. 그렇다면 실학사상의 존재형태는 對自的 존재가 아닌 卽自的 존재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그 존재의 의미도 충분히 인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해방 이후의 연구자들이 실학의 범위로 설정해 오던 일반적 방법과는 달리,「實學」의 적용범위를 축소하려는 시도도 진행되었다. 이러한 문제 제기가 실학의 개념을 밝히는 데에 기여할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실학사상의 존재를 확인하는 작업은「실학」이란 단어의 용례 및 실학이라는 용어에 함축된 사상의 특성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상황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이다. 우리는 먼저 실학이라는 용어가 시대에 따라 각기 다른 의미로 사용되어 왔음을 다음과 같이 확인하게 된다. 즉 한국사상사에서 실학이란 단어는 여말선초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이 때의 실학은 오늘날 실학이라는 개념에 함축되어 있는 바와는 달리 성리학을 지칭한 용어였다. 여말에 수용되었고 조선왕조의 官學 즉 통치원리로 정립된 성리학은 원래 修己와 安人을 목적으로 했다. 이 때문에 14세기 후반 程朱의 성리학을 수용한 이래 여말선초의 유학자들은 유학 즉 성리학이 도덕과 정치에 유용·유익한 생활관과 경세론을 제공해 주는 실제적 사상이란 의미에서 이를 실학이라고 했다. 이러한 성리학적 실학은 오늘날의 연구자들이 논하고 있는 조선 후기의 실학사상과는 일정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조선왕조의 성립을 전후해서 자신의 성리학을 실학이라고 생각했던 대표적 인물들로는 李齊賢(益齋, 1287∼1367), 鄭道傳(三峰, 1337∼1398) 및 權近(陽村, 1352∼1409) 등이 있다. 그들은 성리학이 불교나 訓詁詞章에 치우친 漢唐의 유학보다 우월함을 인식했다. 그들은 성리학이 仁義忠信 등의 修己로 인해서 훈고나 사장의 유학보다 ‘爲己’의 실효를 거둘 수 있는 학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충효를 비롯한 五倫과 六禮의 학습을 통해서 불교보다 ‘齊家治國平天下’의 실효를 더 거둘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고, 이러한 이유로 이를 실학이라고 불렀다.

 또한 李滉(退溪, 1501∼1570)이나 李珥(栗谷, 1536∼1584)도 修己安人의 설인 성리학을 실학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반면에 조선 후기에 접어들어 禮 지향적 수기의 예론을 전개하고 있던 尹拯은 예학을 실학이라고 인식했다.385)尹絲淳,<實學 意味의 變異>(≪民族文化硏究≫28,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1995), 307∼317쪽. 이러한 조선왕조의 성리학자들은 대체로 주자를 유일한 기준으로 삼아 유학을 해석하면서 자신의 학문체계를 실학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일단의 유학자들 가운데는 관학 즉 통치원리로 기능하고 있던 주자성리학의 유일기준을 거부하고 탈성리학적 경향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들은 先秦儒學 내지 原初儒學의 정신으로 돌아가 성리학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예론적 실학이 지배하고 있던 상황에 대한 비판을 시도했다. 이러한 사상적 경향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로는 李睟光(芝峰, 1563∼1628)이나 許穆(眉叟, 1595∼1682) 등이었다.

 특히 허목의 경우에는 주자학 일변도의 경색된 학문 풍토를 거부했다. 그는 朱子註를 중심으로 하는 四書(論孟庸學)나 七書(論孟庸學詩書易)체제를 거부하고, 원초유학 경전으로서 ‘堯舜之學’을 간직하고 있는 六經을 강조했다.386)鄭玉子,<眉叟 許穆 硏究>(≪韓國史論≫5, 서울大 國史學科, 1979), 205쪽. 이들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유학의 탈성리학적 연구 경향은 조선 후기 실학사상의 전개에 있어서 선구적 역할을 했다. 이처럼 조선 중기 이래 유학계에서는 탈성리학적 학문연구 경향이 등장하고 있었다. 조선 중기의 이러한 탈성리학적 연구의 경향에서 조선 후기적 실학이 움터 나왔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 지칭되는 사람들은 經世致用的 학문을 강조하거나 자신의 저서에서 ‘실학’이라는 단어를 직접 구사하기도 했다. 즉 柳馨遠(1622∼1673)의 학문체계는 당대부터 ‘경세치용’의 학문으로 평가되어 왔다. 그리고 李瀷(星湖, 1681∼1763)도 학문이란 장차 천하만사를 조치할 만큼 치국·평천하의 경세에 치용(유용)한 것을 지향해야 한다고 역설했고, 자신이 직접 ‘실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했다.387)李 瀷,≪星湖僿說≫ 권 27, 經史門 窮理.
尹絲淳, 앞의 글, 319∼320쪽. 이하 ‘實學’의 용례에 관한 논의도 이 글의 도움을 받았다.

 洪大容(湛軒, 1731∼1783)은 ‘실학’이라는 단어를 구사하여 사장과 記誦 그리고 훈고와 구별되며, 功利나 老佛·陸王과는 다른 학문체계를 제시하고자 했다.388)洪大容,≪湛軒書≫외집 권 1, 與鐵橋書. 朴趾源(燕巖, 1737∼1805)의 경우에도 농공상의 이치를 포함하는 士의 학문을 ‘실학’이라고 지칭하면서 農工賈가 所業을 잘못하는 것은 사에게 실학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389)朴趾源,≪燕巖集≫권 4, 課農少抄 諸家摠論後附說.

 丁若鏞(茶山, 1762∼1836)은 그의 저서에서 ‘실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당대의 성리학을 ‘雜學’이라고까지 폄하하면서, 치국안민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夷狄을 물리치며 재용을 넉넉히 하고, 能文能吏하여 무소부당한 능력의 양성을 주창했다.390)丁若鏞,≪與猶堂全書≫1-13권, 詩文集, 俗儒論. 여기에서 정약용의 실학개념이 간접적으로 추출될 수 있다. 19세기의 金正喜(秋史, 1786∼1856)의 경우에는 ‘實事求是’를 중시하는 학문태도를 강조했다.391)金正喜,≪阮堂集≫권 1, 實事求是說. 崔漢綺(惠崗, 1803∼1879)는 사농공상에 걸친 實事를 실지로 탐구 실천할 것을 제창하면서 자신의 실학사상을 표현했다.392)崔漢綺,≪推測錄≫권 5, 名實取拾.

 여기에서 오늘날 우리 학계는 조선 후기 사상계의 변화를 논하면서 실학이라는 분야를 설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실학사상은 당대의 학인들이 직접 문호를 열고 기치를 세우며 자신의 존재를 ‘실학파’ 등으로 스스로 확인한 사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가 자신을 실학자로 자처한 바도 없고, 자신의 학문을 실학이라고 선언하지도 않았다. 그들이 서로 모여 다른이들과 구별되는 배타적 견지에서 학파를 조직한 적도 없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오늘날 학계에서 당시의 학풍을 실학으로 명명한 데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즉 조선 후기의 실학사상은 卽自的(an sich)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실학사상은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고 자신의 독립성을 확연히 천명하는 對自的(für sich) 단계의 사상으로까지 전개되지는 아니했지만 분명 조선 후기의 사상계에 존재하고 있었던 중요한 흐름 가운데 하나였다. 이 즉자적 사상의 형태를 1950년대에 이르러 남북한의 학계에서는 實學思想이라고 지칭하게 되었다.

 따라서 실학사상에 대한 연구는 과거 역사적 존재 자체를 밝히고 그 의미를 구명하려는 작업이다. 이런 특성을 가진 ‘조선 후기의 실학’은 종전의 ‘성리학적 실학’이나 ‘예학적 실학’ 혹은 ‘양명학적 실학’ 등과 구별된다. 그리고 이 ‘조선 후기의 실학’이란 관용어 대신 여태까지 한국사학계에서 통용되어 오던 상례에 따라 이를 단순히 ‘실학사상’으로 명명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실학사상은 조선 초기 성리학의 학문전통과는 엄연히 구별되는 사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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