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2. 실학의 발전
  • 2) 실학사상의 전개
  • (4) 경제·사회사상의 특성

가. 토지개혁론

 원초유학의 단계에서 제시되고 있던 왕도정치론에서는 그 구체적 실천 방안으로 민에게 恒産을 보장해 주고, 井田制의 실시를 통해서 賦稅와 徭役을 고르게 하고, 商工의 보호를 제시했다. 또한 당시의 왕도정치론에서는 전반적 차원에서 ‘保民’을 주장했고, 특히 窮民의 구제에 관심을 가져야 함을 말했다.466)劉澤華,≪中國古代政治思想史≫(天津;南開大學出版社, 1992), 77∼78쪽에 의하면 仁政의 내용으로 給民以恒産, 賦稅徭役有定制, 輕刑罰, 救濟窮人, 保護工商을 들었다.
狩野直喜 著·吳二煥 譯,≪中國哲學史≫(乙酉文化社, 1986), 164쪽에서 狩野直喜는 왕도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는 “왕도의 대요는 務農과 興學의 둘로 나뉜다. 務農에 의해 백성의 생활을 안락하게 하고, 興學에 의해 人倫·孝悌의 도를 밝히는 것이다”라고 규정했다.
勞思光 著·鄭仁在 譯,≪中國哲學史≫(探求堂, 1990), 148쪽에서는 仁政에서 논하는 주요 취지가 ‘保民’에 있음을 말했다. 맹자가 仁政을 王道라고 이름 붙인 것은 인정을 행하면 민심을 얻을 수 있고, 민심을 얻으면 천하에서 왕 노릇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은 원초유학의 왕도정치론을 중세 해체기의 조선사회에 적용함으로써 조선에서 왕도정치를 구현하고자 했다. 이는 정전제의 정신을 살려 토지개혁을 단행함으로써 仁政의 회복을 주장하는 새로운 왕도정치론으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실학자들이 제시했던 정전제 등에 관한 주장은 단순한 경제개혁의 이론이라기보다는 왕도정치를 구현하고자 하는 통합적 이론 가운데 주요한 일부였다고 보는 것이다.

 즉 실학자들이 주장했던 토지개혁사상은 왕도정치를 조선사회에 알맞게 재해석하여 그 시행을 역설한 것이다. 실학자들은 왕도정치의 구현이라는 현실적 목표를 가지고 정전론을 제시함으로써, 국가 내지 국왕은 민을 본위로 하고 민을 위하는 民本爲民의 의무를 수행해야 함을 천명하고자 했고, 恒産을 보장받게 될 민에게 務農을 강조하고자 했다.

 그런데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살고 있던 당시의 농업에 있어서 주요한 생산관계는 地主-佃戶制가 보편적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 토지개혁론은 이러한 지주제를 인정하는 위로부터의 길과 지주제를 해체하고 자립적 소농이나 중소상공인의 입장을 지지하는 아래로부터의 길을 따를 것이냐의 두 가지 길이 있다. 실학파의 토지개혁론은 후자의 길과 관련된다.467)金容燮,<근대화 과정에서의 농업개혁의 두 방향>(≪한국자본주의 성격논쟁≫, 대왕사, 1988). 이러한 조선 후기 토지문제에 대한 개혁론은 均田論·限田論·井田論·閭田論으로 크게 구별할 수 있다. 이들은 중국의 토지개혁 논의를 자신의 근거로 삼고 있다.

 유형원은≪磻溪隨錄≫에서 국가체제의 전반적인 개혁방안을 제시하면서 토지제도의 개혁을 가장 중요시했다. 그는 地勢불편이나 공전에서의 수세의 어려움 때문에 정전제의 시행이 어렵다고 하면서 정전제가 가지고 있던 均産의 의미를 살리는 방향에서 均田制의 시행을 주장했다. 그리하여 그는 균전의 토지분급과 정전의 공동부담을 근간으로 한 토지개혁안을 제안해서 당시의 문란한 토지소유관계를 혁신하고 국가가 이를 재분배하여 균등분배로 점유되는 토지관계를 설정하고자 했다. 그가 토지개혁론을 주장했던 궁극적인 목적은 토지를 국유화하여 토지의 겸병을 억제하고 토지의 균점을 통해 농민생활 안정, 국가재정의 재건이었다. 그 토지개혁론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토지분배의 기준을 사람이 아닌 토지에 두어 모든 백성이 균일하게 농지를 갖도록 하자는 것이며, 군역·부세 등도 또한 토지를 대상으로 일률적으로 부과하자는 것이다. 둘째, 종래의 結付法을 폐지하고 頃畝法을 채택하여 1頃 혹은 1畝라는 일정한 토지면적에서 나오는 수확량에 따라 세금의 액수를 정하고, 토지의 실제 면적이 파악될 수 있도록 근본적으로 시정하자는 것이었다. 셋째, 토지분급의 기준을 정하는 것이다. 토지공유를 기초로 농민 한 사람에게 1경의 땅을 나누어 주고 儒士와 관리에게는 2∼12頃의 토지를 차등지급하는 형태이다. 넷째, 정전법의 원칙을 살려 경지정리를 행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부유층의 반대는 중형으로 다스리도록 주장했다. 이를 위해 국왕의 시행 의지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468)金容燮,<18·9세기 農村 實情과 새로운 農業改革論>(≪韓國近代農業史硏究≫, 一潮閣, 1975).

 그의 개혁안의 기초는 균전법인데 농민에 대한 균일한 營業田 및 口分田의 收受와 지배층에 대한 영업전 및 직분전의 할급이라는 이원적 체제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그런데 그의 균전제는 농민에게 토지를 주었으나 신분에 따라 토지지급에 차등을 두는 한계가 있었다.

 다음으로 이익의 토지개혁론은 어떠한 것인가. 이익은 전통적인 토지국유의 원칙을 토지제도의 기본적인 대전제로 삼아 개인의 토지의 私占을 원칙적으로 배제하고자 했다. 그는 농민의 균등한 토지소유를 보장하며, 토지에 대한 절대적 처분관리권을 국가에 귀속시켜야 한다는 개혁론을 주장했다.

 먼저 그는 중국의 정전법은 이상적이지만 현실에 맞지 않고 유형원의 균전제는 급격한 개혁으로서 그대로 실시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그는 유형원이 제시한 것과는 또 다른 균전제인 한전제를 주장했다. 이익이 제시했던 토지개혁안의 구체적인 내용은 첫째, 토지겸병이 빈민의 賣田에서 비롯된다고 파악하여 이를 방지하기 위해 호당 永業田의 면적을 설정할 것을 주장했다. 둘째, 영업전 이외 토지는 자유로이 매매하고 이를 팔도록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셋째, 영업전으로 제한된 토지 안에서는 매매를 금지해야 한다고 했다. 넷째, 일체의 전지매매는 관에 보고하여 관에서 이를 통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그의 토지개혁론은 貴富者의 토지사유의 현실을 인정한 위에서 점진적인 방법을 통한 균전제실시를 주장한 것이다. 또한 유형원의 균전제가 국가의 권력으로 토지를 균분하려는 것임에 반해 이익의 한전제는 국가권력으로 小田主들의 몰락을 방지하는데 중점을 두어 점진적으로 장기간에 걸쳐 꾸준한 개혁의 실시를 의도했다.

 박지원은≪課農小抄≫에서 ‘限民名田議’라고 하는 토지의 재분배론을 주장했다. 이 주장은 일종의 한전법으로 토지소유 상한선을 설정하고 그 이상의 소유는 허락치 않으며 수십년 후 매매와 상속을 통해 토지가 균등해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는 이 방법을 통해 정전에서 추구했던 균산의 취지를 실현하고자 했다.

 徐有榘(1764∼1845)의 한전론도 이와 비슷하다. 서유구는 처음에는 한전제를 주장했다. 그러나 현실적 방안으로서 屯田論을 제기했다. 이 방안은 국가가 주체가 되는 국영농장제의 개혁론이었다. 즉 정부가 부농층으로 하여금 토지에서 배제된 無田농민을 고용하여 하나의 집단농장을 형성하고 경영하게 하려고 한 것이다. 이것은 무전소작농의 안정 및 지주전호관계의 질적 전환을 의미한 것이었다.

 실학자의 토지개혁안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정약용의 이론이었다.469)朴贊勝,<丁若鏞의 井田制論 考察-≪經世遺表≫<田制>를 중심으로>(≪歷史學報≫110, 1986). 정약용은 자신의 개혁론을 제시하기에 앞서 정전제·균전제·한전제를 차례로 비판한 바 있다. 그는 중국 고대의 정전제가 旱田과 平田에서만 시행되었던 것이므로, 水田과 山田이 많은 우리 나라의 현실에는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또한 균전제는 토지와 인구를 계산하여 이를 표준으로 삼는 방법인데, 당시 조선은 호구의 증감이 수시로 변동되며 토지의 비옥도가 일정치 않기 때문에 이를 실천하기에 적합하지 못하다고 했다. 그리고 한전제는 전지의 매입과 매각에 일정한 제한을 두고자 하는 이론이나, 타인의 명의를 빌어 한도 이상으로 늘이거나 줄이는 것을 일일이 적발해 낼 수 없다고 했다. 이들의 기본적 결함은 治田에 반하여 농사를 짓지 않는 자에게 토지를 주고 균산에 주안을 둔 데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균산에 그 목적을 두지 않고 오직 농업생산력을 상승시킬 수 있는 치전에 목적을 둔 토지제도의 개혁을 주장하면서, 耕者有田의 원칙을 분명히 하고자 했다.

 그의 토지개혁론은<田論>에 나타난 閭田制와≪經世遺表≫에 보이는 정전제의 두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리고 다시 정전제는 고대 정전제에 대해 나름대로 해석한 정전론과 전제개혁안을 적용한 井田議로 나누어 볼 수 있다.470)趙誠乙,<丁若鏞의 土地制度 改革論>(≪韓國思想史學≫10, 1998), 101쪽. 정약용의 토지개혁안 가운데 여전제적 개혁안을 담고 있는<전론>은 정조 22년(1798)에 작성되었고, 정전제적 개혁을 추구하던≪경세유표≫는 순조 17년(1817)에 쓰여졌다.

 먼저 정약용의 경우는 농업생산력의 향상에 관심을 갖고 그의 토지개혁안인 여전제를 논하였다.<田論>에서 주장하는 여전제의 목적은 토지균분으로 토지와 재부가 집중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는 경자유전의 원칙에 따라 농사를 짓는 자만이 농지를 얻고, 농사를 짓지 않는 자는 얻지 못하도록 했다. 이는 정전제(정전론·정전의)의 입장과 같다.

 여전제에서 제시하고 있는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전제는 30가구를 1여로 하여 閭民은 공동노동을 통해서 생산과 수확을 하는 것으로 설정되었다. 여기에서 여민이 선출한 閭長은 생산작업을 분담시키며, 日役簿를 만들어 노동량을 기록했다. 이와 같이 여전제 아래에서는 공동생산을 추진했지만, 가족 단위로 소비를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므로 생산물의 분배는 생산에 투하된 가족의 노동량에 따라 진행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여전제는 봉건적 토지소유를 부정하면서 토지의 공동소유·공동경작을 창안함으로써 그 경제적 내용에 있어서 토지는 사회적 소유로 규정되었다.471)박승규,<茶山의 田制改革思想의 現代史的 意義>(≪진주문화≫9, 진주교대 진주문화연구소, 1990).

 여전제 아래에서는 인구의 자유로운 이동을 8∼9년간 허용하면, 이익을 추구하고 해를 피하려는 농민의 합리적 행동에 의해 각 閭의 노동생산성과 빈부는 균등하게 될 것으로 전망되었다. 그리고 10년째부터는 인구와 노동력의 이동을 노동생산성을 균등화하는 방향에서만 국가에서 계획적으로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나아가 여전제의 토지제도를 군사조직의 근간으로 삼아 閭-里-坊-邑에 따른 병농일치제적 군제개혁안을 구상했다.

 정약용은 농사를 짓지 않는 사·공·상의 토지소유를 반대했다. 이에 따라 상인과 수공업자는 독립되어 여전제와는 사회적 분업관계를 이루도록 했다. 사족의 경우 직업을 바꾸어 농사에 종사하거나 이외의 생산활동 즉 상업·수공업·교육 등에 종사할 것을 주장했다. 특히 士들이 이용후생을 위한 기술연구에 종사하는 것을 가장 높이 평가했다.472)愼鏞廈,<茶山 丁若鏞의 閭田制 土地改革思想>(奎章閣 7, 1983).

 ≪經世遺表≫에 보이는 井田議는 국가에서 재정을 마련하여 그 돈으로 사유농지를 유상 매입하여 전체 농지의 9분의 1을 公田으로 만들기를 제안했다. 그리고 이 공전을 민의 노동력으로 경작하여 그 수확을 田稅에 충당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실천하기 위한 과제로서 공전을 확보하기 위한 재원마련, 기구편성, 공전편성 작업, 공전경작을 위한 노동력 할당, 토지대장작업, 공전의 조세량 등을 검토했다. 그가 제시한 이 정전의의 개혁론은 조세개혁적 성격이 크며, 토지개혁이나 경작권 조정이라는 측면도 있었다. 그는 정전의를 통해서 농업전문화를 통한 상업적 농업을 추구하며 그 경영규모는 100무를 단위로 하는 부농에 의한 자본주의적 개별경영을 지향했다. 한편≪경세유표≫의 井田論은 전국의 토지를 국유화하여 정전을 편성하고, 그 중 9분의 1은 공전을 만들어 조세에 충당하고 나머지는 농민에게 분배하며, 공전은 토지를 분배받은 농민의 공동노동으로 경작한다는 내용이었다. 정약용의 정전론에 있어서는 국가에 토지처분권을 귀속시켜 지주전호제의 재등장을 막아 보고자 했다.

 전반적으로 정약용의 토지개혁론은 상업적 이윤과「자본주의적」경영을 전제로 한 것으로 농민에게 토지를 갖게 하되 양반 및 상공계층은 제외하고 농업을 통한 상업적 이윤을 추구하게 한 점에서 다른 실학자들과는 차이가 있다. 한편 그가 제시한 여전제와 정전론은 유사점이 많다. 즉 그는 자신의 개혁안에서 모두 토지의 사적 소유를 부정했고, 경자유전의 원칙에 따라 농민에게만 토지를 주고자 했다. 그리고 농업생산력의 발전을 목표로 삼았으며, 전제개혁을 통해서 병농일치제를 관철하고 지방제도와 병제의 일체화를 시도한 점도 비슷하다.

 그러나 이 두 개혁안 사이에는 차이도 있었다. 즉 정약용은 여전론을 통해서 여의설치를 논했고 여민의 공동생산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정전론에서 제시하고 있는 井田의 경우는 그 운영에 있어서 閭田과 차이가 있었고 농업의 전문화와 부농에 의한 개별경영을 제안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정전론과 여전론이 근본적으로 다른 개혁안일 수는 없었다. 정약용은 아마도 지향해 나가야 할 궁극적 목표 내지는 방향으로 여전제적 개혁안을 제시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현실적 개혁안으로서 정전제를 말했기 때문에 이 둘 사이에는 상이점보다도 유사점이 더 많이 드러나게 되었을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은 선진시대의 왕도정치론에서 제시하고 있었던 정전론의 이념을 살려서 지주전호제의 모순에 시달리던 조선의 토지제도를 개혁하고자 했다. 실학자 가운데 유형원의 경우는 균전론을 논했고 이익은 한전론을 제안했다. 이들은 농민 보유지의 확보 즉 자영농민의 확보에 주안점을 둔 개혁을 제안했다. 한편 정약용의 경우에는 정전론과 여전론을 통해서 새로운 토지개혁안을 제안했다. 실학자들이 제안한 이 토지개혁안들은 당대 사회에서 왕도정치의 재현을 시도하던 실학자들의 이상을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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