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3. 국학의 발달
  • 1) 국어학
  • (2) 사역원의 외국어연구

(2) 사역원의 외국어연구

 사역원은 중국어를 비롯한 외국어학습을 전담하였는데 이 시대의 국어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바 있다. 고려 충렬왕 2년(1276)에 창설된 通文館으로 소급할 수 있는 司譯院은 조선의 건국 초기부터 설치, 운영되었으며 조선 말기까지 사대교린의 외교업무를 집행하는 역관들의 관리와 교육을 담당하였다. 사역원에서는 역관들의 외국어교육을 위하여 四學을 설치하고 중국어는 漢學에서, 몽고어·일본어·여진어는 각각 蒙學과 倭學·女眞學에서 교육하였으며 여진학은 병자호란 이후 滿洲語를 교육하는 淸學으로 바뀌었다. 사역원 사학에서는 역관들의 외국어학습을 위하여 초기에는 해당국의 訓蒙書를 수입하여 학습하였으나500)예를 들면 중국어를 학습하기 위하여 중국의 훈몽서였던≪小學≫을 태조 때 귀화인 偰長壽가 그 당시 중국어로 번역하여≪直解小學≫이란 이름으로 역관들의 중국어학습서로 이용하였다. 이외에도 중국어의≪童子習≫, 몽고어의≪王可汗≫·≪高難加屯≫, 일본어의≪伊路波≫·≪童子習≫, 여진어의≪千字文≫·≪小兒論≫·≪三歲兒≫ 등의 譯書는 오늘날 대부분 실전되었으나 그 서명으로 보아 모두 兒童用 훈몽교과서로 보인다(鄭 光,≪朝鮮朝 譯科 試券硏究≫, 成均館大 大東文化硏究院, 1990) 참조.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보다 실용적인 외국어학습서의 필요성이 인식되었고 이에 따라 조선 후기에는 사역원에서 자체적으로 많은 외국어학습서를 편찬하였다. 이러한 외국어교재를 사역원 譯書 또는 譯學書라고 불렀으며 이러한 외국어교재의 편찬을 통하여 국어와 해당 언어의 대조연구가 매우 깊이 있게 이루어졌다.

 조선 후기의 역서에는 실용적인 회화를 위주로 학습서가 유행하였으며 시일이 지나면서 전시대의 것을 수정하고 보완하는 작업이 계속되었다. 임진왜란 때에 왜군에게 피납되었다가 쇄환된 康遇聖은 일본어 회화교재인≪捷解新語≫를 편찬하였고, 이것은 그 후 여러 차례 수정되어 改修·重刊·文釋의 이름을 붙여 간행하였다. 병자호란 이후 중국어와 만주어의 학습서, 그리고 몽고어의 교재가 새롭게 편찬되거나 수정·보완되었다. 고려 말에 편찬된 것으로 알려진 중국어 회화학습서≪老乞大≫·≪朴通事≫가 중종조 최세진에 의하여 정음으로 번역된 일이 있었는데 병자호란 이후에 이 번역본을 근거로 하여 몇 차례 언해의 수정이 이루어졌다. 영조조에는 한어마저 교정한≪新釋老乞大≫와≪新釋朴通事≫가 간행되었으며 이의 언해본도 같은 시기에 편찬되었다. 또 노걸대는 정조조에 중간본이 간행되기도 하였다. 중국어학습에는≪노걸대≫·≪박통사≫이외에도 四書와≪伍倫全備記≫등이 이용되었으나 갑오경장으로 사역원이 폐지될 때까지 실용적인 회화학습서로서 노걸대·박통사의 중요성은 변함이 없었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에서는 만주어학습의 필요성이 증대되었다. 병자호란 직후에는 여진학서를 만주어학습서로 개편하여 사용하였다가 곧 만주어학습을 위한 교재가 사역원에서 편찬되었으며 이를 淸學書라고 불렀다. 중요한 청학서로서 滿文三國志인≪Ilan Gurun-i Bithe≫를 정음으로 번역하여≪三譯總解≫란 이름을 붙여 간행한 것이 있고≪한어노걸대≫를 만주어로 번역한≪淸語老乞大≫, 그리고 여진학서를 청학서로 바꾼≪八歲兒≫·≪小兒論≫등이 있었다. 이들은「淸學四書」라고 불렸으며 주로 병자호란에 피납되었다가 쇄환된 ‘東還者’들의 자문을 얻어 사역원 청학역관들이 편찬한 것이다.

 이 시대에 만주어의 학습과 더불어 주의를 끈 것은 몽고어의 학습이다. 병자호란 이후에 만주족과 마찬가지로 같은 북방민족인 몽고족의 침략을 대비하여 몽고어의 학습이 사역원에서 다시 관심을 갖게 되었다.501)이 시대에 사역원에서 몽고어를 학습하는 이유에 대하여 영조 때 좌의정 金在魯가 蒙學聰敏廳을 설치하자는 건의문에서 “몽고 따위는 가장 강성하여 실로 다른 날 심히 염려되는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소리는 고금의 차이가 있어 역관들이 몽학서를 외워서 배우지만 몽고인을 만나면 전혀 말이 통하지를 않습니다”(≪英祖實錄≫권 44, 영조 13년 5월 신축)라는 귀절로 보아 몽고의 발흥에 대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몽고의 발흥에 대비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아마도 청에 조공하러 가는 赴京使行이 중국의 여러 지역을 지나면서 교역을 할 때에 실제로 현지에서 몽고어가 상담에 사용된 일이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몽고어교재로서는 역시≪한어노걸대≫를 몽고어로 다시 번역한≪蒙語老乞大≫가 있고 호란 이후에 사역원에서 새로 편찬한≪捷解蒙語≫가 주요한 몽고어의 회화·강독교재였다. 몽고어 어휘집인≪蒙語類解≫를 합해 이른바「蒙學三書」로 알려졌다.

 이 역서들은 조선 후기에 활발하게 운용된 譯科의 科試書로 國典에 규정되었으며 역관들이 이를 통하여 해당 외국어를 학습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역서에서 역과의 문제가 출제되었으므로 매우 많은 노력을 기울여 이들을 편찬하였다. 또 이들은 중국에 가는 부경사행이나 일본의 通信使行이 있을 때마다 사행을 수행한 해당 역관에 의하여 현지에서 수정되었으며 따라서 이 교재들의 편찬과 수정을 통하여 국어와 해당 외국어의 연구가 상당한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역관들의 외국어를 학습하는 역서에는 회화와 강독교재만이 아니라 단어를 학습하기 위한 어휘집도 있었다. 병자호란 직후에 간행된 鄭瀁과 南二星의 한어≪語錄解≫를 비롯하여 사역원에서 편찬된 한어의≪譯語類解≫, 만주어의≪同文類解≫, 몽고어의≪蒙語類解≫, 그리고 일본어의≪倭語類解≫가 차례로 간행되었다. 이들은 중국어, 또는 한자어를 표제어로 한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중국어·만주어를 함께 수록하여 국어로 풀이한≪漢淸文鑑≫(15권 15책)은 방대한 어휘집으로 사역원이 전력을 기울여 편찬한 것이다. 같은 취지로 역관 洪命福 등이 정조 2년(1778)에 한어와 청어, 몽어 및 왜어가 망라된 어휘집으로≪方言類釋≫(혹은≪方言集釋≫으로도 불림)을 편찬하였으나 실용성은 없어서 印刊에 붙이지는 못하였다. 이보다 10년 후에는 李義鳳이≪古今釋林≫을 편찬하였는데 여기에는 한어의 여러 방언과 그 역사적 변화형을 비롯하여 유가와 도가, 불가의 여러 어휘와 동양 각국의 언어가 거의 수록되었다. 이와 같은 어휘집의 편찬은 후일 국어 辭書의 편찬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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