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3. 국학의 발달
  • 2) 언어학
  • (2) 근대국어의 표기법

(2) 근대국어의 표기법

 근대국어의 표기법상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은 다음과 같다.

 가. 근대국어시기에 사용하였던 문자체계가 중세국어의 문자체계와 달라졌다. 다음과 같은 문자의 소멸과 새로운 문자의 등장이 있었다.

① ㅿ ᅙ ㅸ ㆁ이 사라졌다. ② 각자병서 중 ᄔ ᅇ ㆅ이 쓰이지 않게 되었다. ③ 합용병서에서 ᄢ ᄣ에 견인되어 ᄦ ᄤ 등이 나타나게 되었고, 또한 ᄳ이나 ᄥ ᄴ 등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특수한 몇 문헌에만 보이는 것이다. ④ 유기음인 ㅊ, ㅋ, ㅌ, ㅍ, ㅎ의 앞에 ㅅ을 붙인 합용병서인 ᄷ ᄸ ᄹ ᄺ ᄻ 등이 사용되었다. ⑤ ᄓ ᄕ ᄖ ㅧ ㄵ ᄗ  ᄘ ᄙ    ᄚ  ᄜ  ᄟ ᄬ ᄵ ᅁ ᅂ ᅃ ᅄ ᅅ ᅆ ᅈ ᅉ ᅊ ᅋ 등의 새로운 자음결합자들과 ᅶ ᅷ ᅸ ᅹ ᅺ ᅻ ᅼ ᅽ ᅾ ᅿ ᆁ ᆂ ᆃ ᆄ ᆅ ᆆ ᆇ ᆉ  ᆌ ᆍ ᆎ ᆏ ᆐ  ᆒ ᆓ ᆕ ᆖ ᆗ ᆘ ᆙ ᆚ ᆛ ᆠ 등의 새로운 모음결합자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외국어를 표기하기 위한 방편으로 마련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문자들도 훈민정음 28자의 자모를 결합하여 만든다는 원칙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다.

 나. 간접문자가 확대되어 사용되었다. 간접문자란 한 문자가 자기 자신의 음가는 가지고 있되, 어느 경우에는 자신의 음가를 실현시키지 못하고 단지 인접문자의 음가를 암시하여 주는 경우의 문자를 말한다. 근대국어에서는 특히 어두된소리를 표기하는 어두합용병서의 표기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어두의 합용병서 ‘, , ᄢ, ᄳ’은 [k’]를, ‘, , ᄣ’은 [t’]를, ‘, ᄤ’은 [p’]를, ‘ㅆ, , ᄥ, ᄴ’은 [s’]를, ‘ㄵ, , ᄦ’은 [c’]를 표기하기 위한 문자들인데, 이 합용병서들 중 앞에 나타나는 공통적인 문자인 ㅅ과 ㅂ은 제 음가인 [s]나 [p]를 실현하는 것이 아니고 후행 자음문자인 ‘ㄱ, ㄷ, ㅂ, ㅅ, ㅈ’의 음가인 [k] [t] [p] [s] [c]가 아닌 [k’] [t’] [p’] [s’] [c’]임을 암시하여 주는 것이다.

 다. 逆表記 및 過渡表記가 흔히 나타난다. 여러 음운변화 및 문법변화로 말미암아 그 변화에 대한 역표기나 과도표기의 예가 많이 등장한다. 이것은 대부분이 표기자의 표기의식에 말미암은 것이다. 예컨대 구개음화로 인하여 구개음화의 역표기가 등장하며(예:‘집’을 ‘딥’으로 표기하는 경우 등), 어간의식의 발달이라는 표기자의 의식에 기인하여 한 어간형태소 내부에서도 그것이 마치 어간과 어미로 분석되듯이 착각하고 분철하여 표기하는 과도표기가 나타난다(예:‘하’을 ‘한’로 표기하는 경우 등).

 라. 한글표기에 표기자의 문법의식이 반영되어 나타난다. 즉 국어표기자들의 어간의식으로, 체언과 조사, 어간과 어미를 구분하여 표기하는 이른바 분철표기의 방식이 출현한다. 후기 중세국어에서 사용하였던 연철표기의 방식에서 중철표기와 분철표기의 방식으로 옮겨 갔다. 즉 중세국어에서, ‘사’(人)에 주격조사 ‘-이’가 연결되면 ‘사미’로 표기되었었는데, ‘사미’식의 중철표기와 ‘사이’식의 분철표기가 일반화되었다. 그러나 용언어간과 어미 사이에서는 이 과정이 체언보다 늦게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먹-’(食)은 부동사형어미 ‘-어’가 연결되면 중세국어에서는 ‘머거’으로 표기되었던 것이 ‘먹거’ 또는 ‘먹어’로 표기되는 것이 ‘사미, 사이’식으로 표기되는 과정보다 뒤늦게 일어났다. 한글표기자들이 체언과 조사와의 관계는 분리된 요소로서, 그리고 용언의 어간과 어미와의 관계는 융합된 요소로서 의식했던 데에 기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마. 표기상에 문법의식이 반영됨으로써 근대국어시기의 표기법이 형태음소적 표기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분철표기는 중철표기와 그 과정을 거의 같이하면서 이루어진다. 이것은 중세국어에서의 표기원리가 음소적 표기인데 비하여 근대국어에 와서 형태음소적 표기를 거쳐 형태적 표기로 옮겨 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중철표기란 어간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어간말음도 표기하려는 의식에서 연유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전술한 중철표기의 예인 ‘사미’는 ‘사’을 표기하여 그 어간을 밝혀 주고 아울러 ‘미’의 ‘ㅁ’으로써 그 어간말음까지도 표시하여 주는 것이다.

 바. 국어의 형태소 중 그 이형태들이 자동적 교체인가 수의적 교체인가에 따라 그 표기방법을 달리하였다. 이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어간말 자음군을 가진 단어들의 표기라고 할 수 있다. 근대국어에서 어간말 자음군을 가진 것들은 ‘ , ㄵ, , , , , , ᄚ,  , , ,  ’의 12개인데, 이들은 그것이 나타나는 환경에 따라 그 이형태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과 ‘’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 이형태들이 자동적 교체를 보인다. 이들 이형태들이 자동적 교체를 보일 때 어간말음이 하나인 것은 발음이 나는 대로 적되 그 어간을 밝혀 적는 분철표기의 방식에 따르고, 어간말 자음군을 가진 것들은 발음이 나는 대로 적되 그 어간을 밝히지 않는 연철표기의 방법에 따른다. 반면에 그 이형태들이 수의적 교체를 보이는 것들은 어간말 자음이 하나인 것은 발음이 나는 대로 적되 연철표기를 하였으며, 어간말 자음군을 가진 것들은 그 발음이 나는 대로 적지 않고 어간을 밝혀 적되 특히 분철표기의 방식에 따르는 것이다.

 사. 이 시기에 이미 국어의 띄어쓰기의 萌芽가 싹트기 시작하였다. 현대국어의 정서법에서 “각 낱말은 띄어 쓰되 토씨는 그 윗말에 붙이어 씀”을 그 원칙으로 하는 띄어쓰기의 원칙이 제시되어 있으나, 이 띄어쓰기와 유사한 방법이 이미 근대국어시기의 문헌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근대국어를 반영한 문헌에서 실제 띄어쓰기를 한 문헌은 보이지 않으나 이 띄어쓰기의 시초가 되는 句讀點이 근대국어의 문헌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한 구두점이 나타나는 문헌 중 대표적인 것이라고 생각되는 문헌은 영조 41년(1765)에 藥師殿에서 개간된≪地藏經諺解≫와 정조 23년(1799)에 順天 松廣寺에서 개간된≪妙法蓮花經諺解≫와 고종 6년(1869)에 간행된≪閨閤叢書≫가 그것이다. 물론 19세기말에 학부에서 간행한 교과서에서도 이러한 구두점이 발견된다. 현대국어에 와서 周時經이 띄어쓰기를 주장한 것도 영어의 영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전통적인 국어의 구두점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아. ‘ㆍ’는 그 음가를 상실하였으면서도 19세기 말까지도 국어표기에 사용되었다. 어두음절에서는 주로 ‘ㅏ’의 발음을, 비어두음절에서는 주로 ‘ㅡ’의 발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표기되었지만, 그 영향으로 비어두음절의 ‘ㅡ’가 ‘ㅏ’로 변화한 단어도 생겨나게 되었다(예 : 하님>하느님, 하나님 등). 특히 19세기 말에는 국어의 단모음 [Ɛ]를 표기하기 위하여 ‘ㅐ’를 사용하지 않고, 주로 ‘ㆎ’를 사용하였음도 모음표기의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자. 어말자음의 ‘ㅅ’과 ‘ㄷ’이 음운상의 중화로 ‘ㅅ’으로 통일되어 표기되었다는 점이 이 시기의 표기법상의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로 종성표기에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의 8자음이 쓰이던 것이 ‘ㄷ’을 제외한 7자음이 사용되었다. 이른바 ‘八終聲法’이 ‘七終聲法’으로 변화한 것이다(그러나 倭學書에서는 오히려 ㄷ으로 통일되어 표기되는 경향이 있다).

 이외에도 몇 가지 특징을 더 들 수 있다. 어중에서의 ㄹ-ㄹ 표기(예:리 등)가 ㄹ-ㄴ 표기(예:니 등)와 혼용되어 나타난다는 점, 그리고 19세기에 와서는 어말자음 ㅅ의 중철표기 이외에는 모두 분철표기로 변화하였고, 중철표기는 사라지게 되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근대국어시기의 표기법은 매우 자연발생적으로 변천되어 온 것이다. 특별한 언어적·문자적 규제가 없었던 시기에 문자를 통하여 의사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표기방식이 언어의 변화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저절로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자연발생적 표기의 규칙은 1933년에 만들어진「한글맞춤법통일안」에 상당히 반영되어 오늘날까지 전승되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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