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3. 국학의 발달
  • 4) 역사학의 발달
  • (4) 역사지리학의 연구

(4) 역사지리학의 연구

 조선 후기에는 역사지리의 연구도 활발하였다. 역사지리학을 연구한 사람으로는 한백겸·유형원·신경준·정약용·南九萬·李世龜 등의 역사지리학자 외에 강목체 사학자인 임상덕·안정복 및 韓鎭書 등이 있다.571)≪海東繹史≫는 韓致奫이 지었으나<지리고>부분은 그의 조카 韓鎭書가 지었다.
≪해동역사≫地理考와 정약용의≪아방강역고≫는 상호 영향 아래 저술되었다.
임상덕과 안정복의 역사지리연구는 그들이 지은 강목체 역사서≪동사회강≫과≪동사강목≫에 포함되어 있다.

 17세기 초엽 한백겸의≪동국지리지≫는 조선 후기 역사지리학의 효시가 된다.≪동국지리지≫는 우리의 고대사체계를 한강을 경계로 한 남과 북의 이원체계로 보았으며 유교적 명분이 아니라 지리적 관점에서 우리 역사를 체계화하려 하였다. 아울러 중국측 역사서 등을 이용한 치밀한 고증방법을 발전시켰다. 그의 역사지리학은 이후 유형원·신경준·정약용 등의 역사지리학 외에도 안정복과 같은 강목체 사학자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먼저 유형원은≪동국지리지≫를 계승하는 한편 조선 중기의≪東國輿地勝覽≫이 현실과 유리되었다는 인식 위에 서서 사회개혁론의 기초자료로 활용하기 위해≪東國輿地志≫를 저술하였다.

 신경준은≪강계지≫에서 우리 고대사가 古朝鮮과 震國(삼한)의 이원체계였다는 입장에 서서 漢四郡은 고조선지역에 설치된 것으로 보았다. 고조선을 한반도 북부와 만주(요동)에 걸친 것으로 봄으로 한사군의 위치 역시 그렇게 비정되었다.

 정약용은 한백겸을 계승하여≪아방강역고≫에서 우리 고대사를 한강을 경계로 남과 북의 이원체계로 보았으며 고조선의 위치를 한반도 북부에 비정하는 반도중심론이었다. 그 반도중심론은 그의 영토의식을 보여주는 것이고 한반도내에 영토를 국한하려는 것은 북벌론 등의 허구적 명분론을 비판하는 내치 위주의 개혁론과 관련이 있다. 정약용의 반도중심론은 기호남인의 정치적 입장의 반영이다. 이것은 한편 17세기 후반 이래 소론계를 중심으로 우리 고대사의 영역을 점차 북방으로 확장해 보려고 하는 것과 아울러 신라가 아닌 고구려 중심의 고대사 인식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였다.

 이에 대하여 17세기 말의 남구만은 한사군의 위치를 일부 만주에 비정하였고 사군이부 가운데 이부의 설치를 부정하였다. 남구만을 계승한 이세구는 한사군이 한반도와 요동에 걸쳐 있는 한편 삼한의 북쪽에 있었던 것으로 보았다. 이들의 역사지리인식은 대체로 소론계의 입장을 반영하는 것으로 17세기 이후 북벌론과도 결부하여 만주의 고토회복을 생각하는 그들의 영토의식과 관련이 있다.

 다음으로 강목체 사학자인 18세기 초의 임상덕은 우리 고대사에 대해 남북 이원체계의 입장에 섰으나 한백겸과 달리 황해도지역까지 삼한으로 보았다. 이것은 그가 우리 고대사의 영역을 보다 확장해 보려는 것과 관련이 있다. 삼한의 영역을 북쪽으로 확장하면 고조선의 영역은 당연히 더 북쪽으로 비정하게 된다. 이런 입장은 그가 소론이었다는 점과 관련이 있다. 한편 같은 강목체 사학자인 안정복은 고조선의 영역을 만주까지 확장해 보기는 하였으나 삼한의 영역을 한강 이남으로 하였다. 이것은 기호남인의 입장이 반영된 것이다. 끝으로≪해동역사≫지리고의 지리비정은 대체로 정약용의≪아방강역고≫와 일치한다.≪해동역사≫역시 기호남인계의 저술이다.

 조선 후기 역사지리인식의 흐름은 역사지리학파 여부 및 당색 여하를 불문하고 대체로 우리 고대사를 남과 북의 이원체계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다만 남과 북의 경계를 한강에 두는가 혹은 보다 북쪽에 두는가 하는 것 및 북쪽의 영역을 만주까지 확장하는가 혹은 한반도지역에 국한해 보는가 하는 차이가 있었다. 대체로 서인, 소론계가 우리 영토를 보다 북방으로 확장해 보려는 견해를 가졌다. 어느 입장을 취하든 우리 고대사를 지리적 관점에 토대하여 남과 북의 이원체계로 보려는 생각은 명분론적 역사인식을 벗어나는데 기여하였다. 사실 18세기의 임상덕·안정복 같은 강목체 사학자는 역사지리학의 연구성과를 흡수하여 이전 17세기 단계의 강목체 사학에 비할 때 보다 현실적인 탄력성을 가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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