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3. 국학의 발달
  • 4) 역사학의 발달
  • (6) 역사학 방법과 역사이론의 발달

(6) 역사학 방법과 역사이론의 발달

 마지막으로 역사학 방법의 발달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역사학의 방법 자체를 논한 조선 후기의 저술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 시기의≪동국지리지≫·≪강계지≫·≪아방강역고≫등 역사지리서 그리고 이익의 역사관계 저술, 유득공의≪발해고≫및≪동사강목≫·≪연려실기술≫·≪해동역사≫와 같은 이른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三史 등을 보면 역사학의 방법이 매우 발전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국지리지≫는 조선 후기의 역사학에서 문헌고증학이 발전하며 역사를 도덕과 분리시키는 단초가 된다. 여기서는 국내자료가 취약한 삼국 이전 및 요동지역의 경우 중국의 자료가 이용되었다. 우리 역사의 고증에 중국측 자료가 많이 이용되는 것은≪동국지리지≫에서 비롯된다. 다음 단계인 신경준의≪강계지≫에 와서는 금석문 및 사찰자료의 이용 등으로 사료의 확대가 있었으며 언어학적 방법이 이용되었다.≪아방강역고≫에서는 광범위한 자료를 수집하고 엄격한 사료비판에 근거하여 논리적으로 타당한 결론을 끌어냈으며 자료의 연대적인 배열을 중시하였다. 더욱이 자료비판 과정에서 의심스러운 자료를 그냥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나오게 된 배경, 의미 등을 생각하였다.

 이익 역시 여러 사서의 상호 비교 및 사료비판을 통해 문헌고증과 논리적 추론을 강조하였다. 아울러 우리 나라의 역사를 연구할 때에는 국내사서를 중심으로 해야 하며 야사나 패관류를 중시할 것도 주장하는 등 역사학의 방법에서 주체성을 주장하였다. 이에 반해 유득공은≪삼국사기≫·≪삼국유사≫ 등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을 비판하는 외에 우리 역사서에 황당한 것이 많다는 입장을 취했다.

 다음으로 삼사 가운데≪동사강목≫의 경우 고증에 필요한 확실한 전거를 갖는 문헌을 여러 가지 제시하고 그것들을 상호 비교, 분석하여 타당한 기록을 선택하거나 절충, 종합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이런 문헌고증의 방법은 중국 중세사학인 司馬光의≪通鑑考異≫의 방법을 수용한 것이다. 그러나 한백겸의≪동국지리지≫이래 조선 후기 역사학에서 문헌고증의 방법이 치밀해지던 추세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다만≪동사강목≫의 문헌고증과 비판정신은 근대적인 의식이 아니라 유교적·주자학적 합리성을 기초로 하는 것이었다.

 ≪연려실기술≫은 기사본말체로서 자기의 주관성을 배제하고 자료의 체계적 제시를 통해 사건의 경과를 인과관계적으로 이해하도록 하였다. 아울러≪연려실기술≫은 기사본말체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개별 국왕의 기사는 本紀, 인물조는 傳의 형식으로 하여 기전체적 요소를 가미하였다. 이런 기사본말체와 기전체의 결합은 18세기의 사회변동을 반영하여 역사에 다양한 요소를 넣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중세단계의 기사본말체가 근대로 이행하여 가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해동역사≫는 일본까지 포함하여 외국의 자료를 방대하게 이용하였다. 대체로 기호남인 학자의 경우 일본 및 그 자료에 대해 친숙성이 있었다.

 요컨대 조선 후기 역사학의 방법은 자료가 중국측 문헌 등으로 확대되는 외에 광범위한 문헌의 비교 및 비판과 합리적 추론 등 치밀한 문헌고증 방법 및 역사학의 인과적 서술방식을 발전시켰다. 다만 안정복 같은 강목체 사학의 경우 문헌비판의 토대 또는 기준이 아직 주자학적 합리주의에 머물고 있으며 이긍익의 경우 인과관계를 자료제시를 통해 객관적으로 보이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소론이라는 당파적 입장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또 사료이용에 있어 점차 중국측 사료를 더 신뢰하는 경향이 증대하는 문제점이 있었다. 신경준의 경우≪盛京通志≫·≪遼史≫와 같이 한국사를 만주사에 흡수시키는 사료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였으며 정약용은 중국측의 사료를 우리의 것보다 더 우선시하였다. 유득공의 경우≪삼국사기≫·≪삼국유사≫등 우리 사료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또≪해동역사≫역시 중국의 문헌을 존중하고 일본측 사료를 무비판적으로 이용하였다.

 역사이론의 발달은 주로 이익과 정약용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와 관련되는 것으로 이익의<讀史料成敗>·<陳迹論成敗>및 정약용의<技藝論>·<新羅論>·<高句麗論>·<百濟論>등이 있다. 즉 이익과 정약용은 역사이론의 문제에 대해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저서를 지은 것이 아니라 몇 가지 논문으로 단편적인 언급을 하였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 그들은 근대적 인식에 접근하거나 그것을 상회하는 역사이론을 전개하였다. 이익은 역사의 운동을 시세와 인간행위의 통일로 보되 인간행위는 제한적으로 역사에 개입한다고 하였으며 역사의 운동은 어떤 가치를 담지할 수 없다고 보아 역사를 도덕에서 분리하였다. 아울러 역사의 형성에는 서민도 일상생활을 통해 참여한다고 하였다.

 정약용은 이익이 역사에서 도덕을 분리한 입장을 계승하는 한편 물질적 진보라는 역사의 법칙성을 발견하였다. 이런 물질적 진보에는 민중이 주도적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았다. 아울러 정약용은 역사의 형성에 인간의 참여라든가 주체적 노력을 인정하되 기본적으로는 주관적 요인보다 객관적인 힘이나 지리적 요인 등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다만 정약용의 경우 객관적인 힘에서는 물질적 진보, 기술의 발전 등이 중시되는데, 이것은 민중의 지속적인 노력에 의해 형성된다고 본다. 즉 그 객관적 힘 속에는 인간의 주체적 요소가 이미 들어가 있는 것이다.

 이상 조선 후기 역사학 발달의 추세를 살펴보았다. 다음과 같이 그 요점을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정통론은 17세기에는 주자의 강목체 사학의 입장에서 도덕성을 강조하였으나 비강목체적 입장에서의 정통론도 나타났으며, 18세기 이후에는 강목체 사학의 정통론에서도 현실을 고려하거나 또는 중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둘째, 화이관은 종족적·지리적 화이관을 극복하였다. 다만 실학자이든, 주자학자이든 모두 문화적 화이관에 머물렀으며 양자의 차이는 중화의 실체를 주자학적인 것으로 보느냐, 비주자학적인 유교로 보느냐에 있었다. 또 전자는 개항후 반제민족주의 형성의 한 토대가 되고 후자는 개방적 민족주의의 토대가 되었다.

 셋째, 국사체계는 정통론적 입장에서는 일원적이며 비정통론적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문제가 되는 것은 기자-마한정통 여부와 삼국의 무통 여부 등이었다. 이것은 삼국을 고구려 중심으로 보느냐, 신라를 중심으로 보느냐와 관련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신라를 중심으로 하는 기존의 견해에 비해 고구려 중심의 견해는 조선 후기의 새로운 현상이다. 고구려시대 민족의 강고함에 대한 주목이다.

 넷째, 개별 왕조에 대한 인식은 단군·고구려가 강조되는 한편, 기자조선에 대한 관심도 깊었으며, 발해를 우리 역사에 편입시키려는 견해가 나타났고, 고려에 대하여는 대외항쟁이 주목되었다. 또 당쟁과도 결부하여 동시대인 조선에 대한 관심이 매우 컸다. 이것은 역사학의 현재성이라는 점에서 주목되는 한편 국수주의적 왜곡의 위험도 여기에 따를 수 있다.

 다섯째, 역사지리학은 대체로 우리 고대사를 이원적 체계로 보고 역사에서 현실을 보게 하여 명분론을 벗어나게 하는데 기여하였다. 또 역사지리학에는 우리 고대사의 영역을 만주지역까지 확대하여 보려는 것과 한반도 중심으로 보려는 두 경향이 있었다. 전자는 우리 고대사의 강력함을 강조하는 것이고 후자는 우리 역사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것으로서, 양자 모두 우리 근대 민족사학과 민족주의의 토대가 되었다.

 여섯째, 사회경제사연구는 개혁사상을 위한 기초연구로 행해진 것이며, 그 연구의 일부는 근대의 사회사연구에 계승되기도 하였다.

 일곱째, 역사학의 방법은 자료의 망라와 상호 비교, 합리적 추론 등 치밀한 문헌고증이 발달하였다. 우리 근대의 문헌고증사학은 외부의 영향이기도 하지만, 조선 후기 문헌고증적 연구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여덟째, 역사이론은 역사에서 도덕성을 배제하고 물질적 요인을 중시하여 역사의 법칙성을 발견하는 한편 역사의 담당주체로서 민중을 발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趙誠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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