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3. 국학의 발달
  • 5) 백과전서학의 발달
  • (1) 유서편찬의 시작

(1) 유서편찬의 시작

 우리 나름의 유서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조선 초기부터라고 생각된다. 조선 초기 우리의 지리·역사와 문화 등에 관심이 커져 이에 대해 한 차례 정리가 이루어지고 민본정치의 이념이 보다 강조되는 분위기에서였다. 이 때 만들어진 유서가≪治平要覽≫(세종 27:1445 완성)으로서 세종의 명에 의해 鄭麟趾를 비롯한 집현전 학사들이 편찬하였다.≪치평요람≫은 중국과 우리 나라의 역사 속에서 정치에 귀감이 될 만한 것을 모은 것이다. 주나라에서 원나라까지의 중국역사와 기자조선에서 고려까지의 우리 역사를 대상으로 하여 국가의 흥폐, 군신의 邪正, 정교, 풍속, 외환, 倫道에 관한 사항을 수집하고 정리하였다. 이것은 윤리적 요소가 많은 백과전서로서 아직 문물·제도에 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적다.

 개인이 편찬한 유서 가운데 선구적인 것은 魚叔權의≪攷事撮要≫(명종 9:1554)이다. 여기에는 사대교린에 관한 항목 외에는 일상생활의 상식에 대한 항목이 주를 이루고 있어 일종의 생활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유교적 윤리와 정치 외에 생활에 대한 관심이 나타난 점이 주목된다.576)≪攷事撮要≫는 선조 18년에 許葑이 증보하였고 영조 47년(1771)에는 徐命膺이≪고사촬요≫에서 事大交隣 부분을 줄이고 순수하게 일상생활에 긴요한 부분을≪攷事新書≫로 편찬하였다. 즉 조선 후기에는 의례적인 부분보다 현실생활에서의 정보가 보다 중요해졌음을 알 수 있다. 또≪고사촬요≫에는 16세기 책판목록과 서적가격, 방각본 판각사실 등이 적혀 있어 서지학적으로 매우 중요하다.≪고사촬요≫에 대하여는 다음의 글이 참고된다.
李仁榮,<攷事撮要의 冊板目錄에 대하여>(≪東洋學報≫30-2, 1943).
김치우,<攷事撮要에 관한 書誌學的 硏究>(成均館大 碩士學位論文, 1973).
―――,<攷事撮要 冊板目錄 硏究>(≪民族文化≫1, 1983).

 한편 權文海는 단군조선에서 선조대까지의 역사적 사실을 대상으로≪大東韻府群玉≫(선조 22:1589)을 편찬하였다. 이것은 형식상 송나라 陰時夫의≪韻府群玉≫의 체제를 따른 것으로 지리·국명·성씨·인명·효자·열녀·수령·나무이름·꽃이름·동물이름 등 11항목으로 분류하고 있으며 한문의 韻字의 차례로 배열하였다.577)金敏洙, 新國語學史(一潮閣, 1970) 참조. 효자·열녀의 항목이 더 있는 것이≪운부군옥≫과의 차이이다.「大東」이라는 이름에서 보듯이 우리 나라만을 대상으로 하였으며 항목이 유교적인 도의 외에 객관적 사실을 많이 포함하고 있는 점이≪치평요람≫과 다른 점이다. 또 배열순서가 운자를 따른 것은 사전의 체제를 갖춘 것이라 하겠다. 다만 아직 다음 단계의≪芝峯類說≫에 비해서는 제도·문물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적고 윤리적·도덕적인 색채가 강하다. 이것은 권문해가 이황계열의 주자학자라는 점과 관련이 있다.

 ≪고사촬요≫와≪대동운부군옥≫은 시기상의 위치만이 아니라 성격상으로도 조선 초의≪치평요람≫과≪지봉유설≫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들은 고려조 이래 중국의 유서학을 수용하였으며 조선 초기에 우리 나름의 유서를 만들고 우리의 여러 문화를 정리한 기반 위에 다시 16세기 이후 새로운 사회변동을 반영하여 일상생활과 문물 자체에 관심이 증대되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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