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3. 국학의 발달
  • 5) 백과전서학의 발달
  • (3) 관찬 백과전서

(3) 관찬 백과전서

 중국의 유서가 관찬 중심이었던 것과 달리 조선 후기의 백과전서학은 이수광에서 이익에 이르기까지 개인 차원의 저술이었다. 그러나 영조와 정조대에 들어가서는 국가 주도의 관찬 백과전서가 편찬·간행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탕평책이 실시되고 국왕 또는 국가 주도로 개혁이 추구되는 분위기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에 편찬·간행된 것이≪東國文獻備考≫(영조 46:1770)이다. 이≪동국문헌비고≫는 외척으로서 영조 후반 탕평정국의 중심인물 가운데 하나였던 홍봉한이 영조의 명에 따라 편찬한 것이다. 여기에는 徐命膺과 그의 아들 徐浩修 및 蔡濟恭·申景濬 등도 참여하였다. 편찬자의 입장은 대체로 김육과 같은 관료적 개혁론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동국문헌비고≫의 편찬에는 실학자들의 새로운 연구결과도 많이 반영되었다. 즉 전단계 실학적 백과전서학과 관료적 백과전서학이 영조대에 이르러 후자의 입장에서 통합된 것이라고 하겠다.≪동국문헌비고≫는 정조 6년(1782) 왕명으로 증보작업이 진행되었다. 이 작업은 정조 14년 일단락되었다가 다시 정조 21년까지 보완작업이 계속되었다. 이 작업에는 李萬運의 아들 李儒準 및 서호수의 아들 徐有榘도 참여하였다. 이것이 바로≪增訂東國文獻備考≫이다.≪동국문헌비고≫와≪증정동국문헌비고≫에는 실학자의 연구성과가 반영되어 있으며 영·정조대의 개혁적 분위기 속에서 그것을 위한 기초작업이라는 성격을 띤다.≪증정동국문헌비고≫는 미처 간행되지 못하였으며 대한제국기에 갑오개혁 이후 제도의 변화를 첨가하여≪增補文獻備考≫580)申奭鎬,<增補文獻備考 藝文考 解題>(≪국역증보문헌비고≫ 예문고,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80).(융희 2:1908)로 간행되었다.

 ≪동국문헌비고≫와 같은 관찬적 백과전서학의 흐름은 이후≪萬機要覽≫581)金奎聲,<萬機要覽 解題>(≪국역 만기요람≫1, 民族文化推進會, 1971).으로 이어졌다.≪만기요람≫은 순조 8년(1808) 왕명에 의해 당시 호조판서 徐榮輔와 부제학 沈象奎가 편찬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일상적으로 정무를 하는 가운데 수시로 참고하기 위한 것으로 순전히 실용적인 목적을 가진 것이며 개혁적 지향을 가진 것은 아니었고,<財用篇>과<軍政篇>으로 되어 있다. 전자에는 정부 각 부처의 예산편성·조세제도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였으며, 후자에는 군사제도와 그 운영에 대해 정리하였다.≪만기요람≫과≪증보문헌비고≫의 중간적 위치라고 할 수 있는 鄭元容의≪文獻撮要≫(철종 2:1851)가 있다. 이것은 상고에서 당시까지의 제도의 성립, 변천과정을 정리한 것으로 특히 조선 후기와 말엽의 제도 변화를 살피는데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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