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4. 과학과 기술
  • 1) 조선 후기의 전통 과학기술
  • (2) 과거와 자격시험

(2) 과거와 자격시험

 과학기술 관련기관과 과학자·기술자의 차별화과정은 그들의 교육과 천거과정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 땅에 과거제도가 정식으로 도입되어 정착한 것은 고려 초기부터의 일이었다. 고려 광종 9년(958)에 중국에서 귀화한 雙冀가 처음으로 시험관이 되어 進士 2명, 明經 3명, 卜業 2명을 선발한 것이 과거제도에 의한 첫 선발이었던 것이다. 고려 초의 과거제에는 진사·명경 이외에 잡과로 7가지 전문분야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卜業·醫業·明算은 과학기술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목종 11년(1008)까지의 과거합격자 가운데 28명이 이 분야 합격자인데 복업 6명, 의업 7명, 명산 15명 등이었다. 같은 기간 동안 진사 235명과 명경 99명의 합격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지만, 과학기술분야도 과거제도의 한 부분을 차지하였다는 것이 인정된다.585)朴星來,<朝鮮儒敎社會의 中人 技術敎育>(≪大東文化硏究≫17, 1983).

 그러나 이런 관행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고려 중기 이후에는 이미 잡과는 과거제도의 일부에서 분리되어 각 관련기관에서 시험을 관장하도록 바뀌어 갔다. 그리고 이런 형식은 그대로 조선시대에 계승되었다. 오늘로 치면 천문학·의학·수학 등이 포함되는 당시의 雜學은 유교가 굳게 자리잡기까지는 그렇게 박대받은 것만은 아니었다. 따라서 조선 초까지는 잡학을 연구하는 양반학자들이 제법 많았고, 세종 때에 천문학과 의학 등에 크게 업적을 남긴 학자들은 대개 사대부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면서도 잡학이 사대부가 종사해야 할 본령이 아니라는 의식은 끊임없이 강조되고 있었다. 따라서 잡과는 조선시대에도 고려 중기 이후의 예를 따라서 관련기관이 직접 시험을 담당하는 방식을 취했다.

 잡학은 중요성은 인정하면서도 잡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제대로 양반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이론이 점차 자리잡게 된 것은 조선 초의 일이었다. 예를 들면 성종 24년(1493) 예조판서 成俔은 관상감·사역원·전의감·혜민서 등의 관원을 양반층에서 제외한다는 당시의 결정에 반대하고 나선 일이 있었다. 이 논의에서 임금은 성현의 의견을 존중하여 잡과에 대한 대우를 전과 같이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런 논의가 거듭되어 오는 동안 이미 잡과에 대한 차별대우가 자리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거꾸로 증명해 주는 사건으로 보인다.

 ≪經國大典≫에 의하면 과거에는 문과·무과 이외에 잡과를 인정하고, 그 안에 譯科·醫科·陰陽科·律科의 네 분야를 정해 놓고 있다. 잡과는 3년에 한 번씩 열리는 式年試와 增廣試에서만 시행되고, 문과·무과와는 달리 잡과는 해당 관아에서 직접 그 시험을 담당하게 되어 있었다. 과학기술분야에서 과거제도에 직접 편입되어 있는 분야는 위의 의과와 음양뿐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밖에도 다른 잡학분야의 取才가 각 담당관서에서 시행되었는데, 그들 후보자에 대한 교육도 함께 그 기관에서 담당했음은 물론이다. 여하튼 이들 잡학분야의 시험은 1년에 4회 실시되어 각 기관에서 교육한 학생들 가운데 합격자를 선발했는데, 그 학생정원은 의학의 수백명을 제외하면, 관상감이 45명, 호조가 算學 15명으로 되어 있었다. 의학생의 수는 서울 80명(전의감 50, 혜민서 30)과 지방관서에 수백명이 배속되었고, 관상감의 학생 45명은 각각 천문학 20명, 지리학 15명, 명과학 10명으로 구성되었다.

 지금 남아 있는 이 잡과시험의 합격자 명단으로는≪醫科榜目≫·≪譯科榜目≫·≪籌學入格案≫등이 있는데, 이들 기록은 연산군 4년(1498)을 거슬러 오르지 못한다. 연산군시대 이후 언젠가 처음으로 이런 합격자 명단을 만들 때의 사람들이 그들의 과거를 거슬러 오르는데 대체로 15세기 말을 그 상한선으로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바로 이 때쯤부터 그들 사이의 강한 동류의식이 형성되었음을 증언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즉 우리 나라의 중인층은 15세기 말부터 양반층과는 다른 그 아래 신분층으로 확고하게 자리잡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과거의 일부로 인정되고 있던 잡과 가운데 두 분야의 경우만 살펴보더라도 의과와 음양과의 교육이 아주 고도의 전문교육만으로 일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유교사회에서의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바로 폭넓은 인문학적 교양 그것이었다. 이런 뜻에서는 전의감과 관상감을 중심으로 벌어진 과학교육이란 전문과목으로만 구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이런 사실 때문에 과학자들은 양반과 같은 계층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을 중인이라는 양반 아래층을 구성하는 신분으로 인정한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중인층은 고도의 지식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기 마련이었다. 다만 그들에게 주어진 교육이 유교정신이 높이 평가하는 그런 교양주의적 교육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정식 사대부로는 여겨질 수 없었을 따름이다. 그러나 실제 생산기술을 담당하는 대부분의 기술·기능분야에서는 제대로 된 교육이란 있을 수 없었고, 바로 이런 차이 때문에 실제의 생산기술·기능자들에게는 중인보다도 낮은 신분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경국대전≫공전에는 수많은 匠人의 종류가 나열되어 있다. 아직 기계공업이 없던 조선시대에는 거의 대부분의 공업생산은 수공업적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고, 이 수공업은 서울의 여러 관아에서 일하는 京工匠과 서울 밖의 지방관아에서 일하는 外工匠으로 나눌 수 있었다.≪경국대전≫에 의하면 이들은 약 130종으로 분류할 수 있고, 경공장이 2,800명, 외공장이 약 3,800명 정도였다. 예를 들면 인쇄를 담당한 校書館에는 均字匠·印出匠·刻字匠·鑄匠·彫刻匠·冶匠·紙匠·木匠 등 기능자들이 모두 102명 배치되었다.

 이들 工匠은 조선시대 수공업생산을 도맡은 대단히 중요한 인력이었지만, 이들은 어느 방법에서도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고, 또 이들의 기능과 기술을 검정할 시험이란 있을 수 없었다. 또 사회계층 가운데 이들 공장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란 가장 낮은 것이었다. 명목상 공장은 천인들이 대부분이었고, 양인도 공장이 될 수 있었지만, 어떤 경우건 이들에 대한 사회적 대우는 가장 낮았다.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과학기술교육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조선시대의 과학교육은 관상감과 전의감에서의 교육과 취재가 가장 잘 제도화된 경우이고, 실제 생산기술 담당자들인 공장에 대해서는 전혀 제도화된 교육이란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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