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4. 과학과 기술
  • 1) 조선 후기의 전통 과학기술
  • (3) 중인의 과학과 천민의 기술

(3) 중인의 과학과 천민의 기술

 실제로 조선 후기의 과학기술이란 중인층에 주로 맡겨진 과학과 천민층에 의해 지탱되고 있었던 생산기술로 양분해서 생각하는 편이 좋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中人層의 과학과 賤民層의 기술’이란 말로 간추려 표현해도 좋을 성싶다.586)최근 이렇게 정리하는 글을 발표한 바 있다(박성래, 앞의 글, 1995, 441∼464쪽). 15세기 말까지에는 양반층과는 다른 신분층으로서의 중인층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위에서 이미 지적한 바와 같다. 이들 중인층은 바로 위에서 고찰한 바 있는 전의감과 관상감, 즉 의학자와 천문학자들을 독점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이들 중인층이란 조선시대 한국역사에서만 발견되는 아주 특이한 신분층이었다.

 원래 중인층이 생겨난 것은 유교적인 교양주의에 근거해서 일반적인 교양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아주 특수한 전문교육만을 받았던 이들이 차별대우를 받으며 별개의 신분층으로 굳어져 내려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그들은 최고신분층인 양반으로부터 분화되어 내려온 새로운 신분이었다. 양반의 서얼출신 자식이 바로 증인층으로 편입되었다는 사실로부터도 중인층이 원래 양반신분층으로부터 하향 분화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들이 유교적 일반교양교육이 아닌 특수한 전문교육을 받았다는 사실이 이들을 최고신분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요인이 되는 사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사회가 점차 안정된 신분사회로 성장해 가면서 최고지배층도 아닌 중인층은 어느 다른 계층보다도 더 안정된 사회적 지위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문과와 무과의 합격자 수가 대폭 증가하고 여러 가지 이유로 조선 후기사회는 양반의 수효가 크게 늘어나고 있었다. 또 그와 함께 양반의 특권은 점점 희석되어 양반으로서도 체면유지가 어려울 정도로 가난한 사람들이 얼마든지 생겨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 동안에도 잡과의 합격자 수는 언제나 일정한 수준을 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榜目의 분석에서 나타나는 이와 같은 현상은 크게 늘어나는 양반층 가운데에는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 숫자가 일정선을 유지했던 중인층 가운데에는 빈곤에 허덕인 사람들이 적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중인층은 물론 관직에서 바로 그들이 전문으로 하는 전문직 이외의 자리를 얻기가 극히 어려웠고, 또 진급도 당상관(정3품 상위급) 이상으로 오르는 수는 거의 없었다. 실제로 많은 중인층 전문가들은 종6품 이상의 참상관 자리조차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렇게 관직에서 큰 제한을 받았지만, 그 대신 실질적인 이득에 있어서는 아주 중요한 특혜를 누리고 있었다. 특히 해마다 중국에 파견되는 조공사에는 반드시 의사·역관·천문관이 포함되었고, 그들은 바로 중인층의 대표격으로 중국에 왕래하면서 공사의 무역을 통해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챙길 수 있었다.

 중인층이 그들 사이의 결혼관계를 유지하여 그들의 특권을 지속적으로 누렸던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역과·음양과·의과 등의 잡과에 종사하는 중인층은 그들 사이의 결혼을 통해 서로 전문분야를 교환하면서 그들의 중인신분을 유지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또 算學者들은 다른 잡학분야보다도 그들 사이의 전공을 더욱 잘 지켜 내려간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 생산기술을 담당한 공장은 그 사회적 신분이 조선시대를 통하여 향상된 적이 없다. 아니 오히려 조선사회가 점차 철저히 유교화과정을 거쳐 갈수록 기술자와 기능자의 사회적 지위는 떨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맹자≫에도 나오는 말처럼 정신노동자는 육체노동자를 지배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勞心者治人 勞力者治於人…藤文公 上)라는 사상이 지배하는 시대에 손재주를 근본으로 하는 기술과 기능이 높이 평가받기 어려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조선 초기의 공장은 반드시 천민만으로 구성되었던 것은 아니고, 身良役賤의 良人을 중심으로 한 것이라 알려져 있다. 이들 장인은 3번으로 무리를 만들어 1번씩이 번갈아 役에 나가는 제도를 따라 근무했다. 예를 들면 軍器監의 弓人은 90명 정원이었는데 이들은 번당 30명씩 세 무리로 나뉘어져 1번씩이 나가 일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 공장의 형편은 조선 초기를 통하여 점점 더 나빠져 갔던 것으로 보인다. 성종 8년(1477) 어느 藥匠이 호소한 것처럼 세종 때에는 공장이 출역하면 두 끼를 먹여 주고 봉족 2명을 배당해 주고, 장기간 근무한 양인공장에게는 遞兒職 등으로 승급할 기회도 주었고 천인에게는 掌苑署의 직책을 맡기기도 했다. 당연히 세종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다투어 화약장이 되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성종 때에는 이미 이런 특혜나 우대가 일체 사라져 버려 아무도 화약장이 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공장에 대한 대우가 점점 나빠지면서 이들은 중종 때에 이르면 그 봉급으로 가족을 부양할 수 없게 될 지경이어서 모두 도망갈 궁리만 하고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따라서 양인으로서 공장이 된 자들은 모두 흩어져 버리고 각 관청에서는 그 자리를 노비로 채우게 되었고, 그 때문에 관청에는 노비가 없어지게 되었다고도 기록되어 있다. 특히 工曹와 繕工監에조차 이 자리의 장인이 없어져, 일이 있을 때면 私匠을 시키는데 그 기술이 형편없다고 혹평하고 있다.

 관청 소속의 공장이 원칙이었던 조선사회의 수공업제도는 후기로 가면서 완전히 私工匠이 중심이 되는 사회로 바뀌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공장의 사회적 위치는 자유노동자로서의 튼튼한 지위를 쌓았다기보다는 노예와 같은 예속적 상태로 빠져 드는 수가 많았다. 조선 후기 경제적인 발달이 어느 정도 진행되었다고 인정하더라도 그 하부구조를 이루고 있었던 생산담당 노동자로서의 공장의 위치는 향상되지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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