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4. 과학과 기술
  • 2) 실제 과학기술의 발달상태
  • (1) 새로운 우주관과 서양식 천문도

(1) 새로운 우주관과 서양식 천문도

 우주의 모습에 대한 생각에는 조선 후기로 들어오면서 특이한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선조 때의 문인으로만 알려진 金文豹의 柶圖說이나 李慶昌(1554∼1627)의 周天說 등은 어느 정도 새로운 우주관을 보여주고 있다.587)全相運,≪韓國科學技術史≫(正音社, 1976), 33∼34쪽. 이것은 새로운 우주관, 특히 서양의 그것을 받아들이는 준비를 하고 있던 조선 중기 이후의 사상적 풍토를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사도설이란 주로 윷놀이의 이치를 설명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는 듯하지만, 당대의 우주관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도 사실이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평평하다는 개천설의 우주관을 바탕으로 설명한 것인데, 우주를 국자 또는 윷 모양에 비유하고 있다. 국자의 바깥 둥근 부분이 하늘이며, 그 안의 네모진 가운데 부분이 땅이 된다. 28宿를 비롯한 많은 별들은 그 둘레에 벌여 있고, 동지란 태양(火)이 물 속을 지나 나오기 때문에 낮이 짧아진다는 식으로 五行을 통해 24절기를 설명했다. 이경창의 주천설은 혼천설을 바탕으로 우주의 운동을 설명하는데, 하늘은 365와 4분의 1도이며, 북극은 지평선 위에 36도 솟아 있고, 남극은 반대로 36도 지평선 아래에 있다. 그리고 북극과 남극이 맷돌의 축과 같이 중심을 이루어 돌아서 천체들을 회전시켜 준다는 것이다.

 아직 이런 조선 중기 지식인들의 우주관이 얼마나 새롭거나 중요한 것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다만 1930년대 한국천문학사를 간단히 소개한 미국학자의 글에서 이 문제는 주목받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내용은 아직 연구되어 있지 않지만, 이런 새로운 우주관에 대한 관심 등은 당시의 변화하는 시대상을 어느 정도 반영하면서 또한 예고하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바로 그 때부터 서양의 새로운 우주관이 전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인조 9년(1631) 7월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鄭斗源이 귀국하면서 디아즈(陽瑪諾)의≪天文略≫을 가져왔는데, 이 책은 지구를 우주의 중심에 두고 12겹의 하늘이 둘러싸고 있는 하늘의 구조를 설명하고 있다. 당시 기독교적 우주관이 잘 반영된 책이다. 이 밖에도 그는≪治曆緣起≫, 마테오 리치(利瑪竇)의 天文書와≪遠鏡書≫같은 천문·역산 관련서적과 함께 남극과 북극의 천문도 두 장을 가져왔다. 또한 그는 망원경도 처음으로 들여왔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밖에도 세계지리와 지도, 외국사정에 관한 책도 가져왔으며, 홍이포·자명종·해시계도 들여왔다. 청나라에 볼모로 가 있던 소현세자는 인조 23년 2월 귀국하는데, 아담 샬(湯若望)로부터 적지 않은 서양문물을 얻어 가지고 돌아왔다.588)여기 대해서는 기록이 서로 조금씩 틀린다. 이용범,≪중세서양과학의 조선전래≫(東國大 出版部, 1988), 328∼329쪽 참조. 서양의 천문학서는 물론이고, 서양의 천문지식과 기구 등이 들어왔던 것으로 보이지만, 소현세자의 운명과 마찬가지로 그 상세한 내용은 역사의 뒤에 감춰지고 말았다. 그 후에는 金堉의 천문서 도입을 주목할 만하다.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李瀷과 같은 실학자들은 드디어 서양천문학이 훨씬 더 정확하다는 심증을 가지게 된다. 金萬重(1637∼1692)은 그 동안 중국에서 나온 개천설과 혼천설은 서로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상충했으나, 서양의 지구설이 서로 모순되는 이 두 가지 이론을 함께 만들어 주었다고 찬탄했다. 그에 의하면 그 동안의 우주관은 모두 장님의 코끼리 만지는 듯한 일부만을 보고 주장하고 있었던 것인데 반해 서양의 우주관이 비로소 전체를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고 논평한 것이다.589)李能和,≪朝鮮基督敎及外交史≫(1928;學文閣 복간본, 1968, 11∼12쪽). 이런 우주관의 변화는 곧바로 지동설의 주장으로 이어졌다. 특히 1760년대 洪大容의 지구자전설은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전에도 金錫文이 이미 비슷한 생각을 역학을 바탕으로 내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우주관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던 배경을 이루는 환경으로는 새로운 천문도가 차츰 퍼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인조 9년 정두원이 가져온 천문도가 어떤 것이었던지는 아직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 후에도 계속적으로 서양식 천문도가 들어왔던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그리고 이런 천문도를 바탕으로 국내에서도 천문도를 만드는 일이 많아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 가운데 상당수가 지금도 남아 있기도 하다.

 예를 들면 숙종 34년(1708) 관상감은 아담 샬의<赤道南北總星圖>를 모사해 바친 일이 있다. 모두 1,812개의 별을 그린 이 성도 또는 천문도는 중국의 원본도 전하지 않고, 조선에서 모사했던 것도 남아 있지 않아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천문도에 붙였던 崔錫鼎의 글 발문에 의하면, 원래 아담 샬의 천문도는 8폭짜리 병풍이었고 인조 6년쯤에 만들어졌고, 역시 병풍으로 제작되었다고 쓰여 있다. 또 이 글에 따르면 이전의 천문도에는 남극 주변의 별들이 나타나지 않았고, 혹시 일부 그려졌다 해도 불완전하였는데, 이제 북극 둘레를 한 장에, 남극 둘레는 따로 한 장에 그림으로써 훨씬 합리적인 천문도가 되었다고 한다. 영의정이며 관상감 영사였던 최석정이 그 해 9월 이 글을 썼다고 되어 있다. 지금은 남아 있지 않지만, 이 천문도가 새로운 서양식 방법으로 그린 최초의 조선시대 천문도였다고 생각된다.

 그 후<신법천문도>는 계속해서 그려졌고, 또 인쇄되는 일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알려진 천문도가 법주사의<신법천문도>이다. 이 천문도는 역시 중국의 신법천문도를 모사한 것인데, 중국의 원래 천문도는 쾨글러(戴進賢)가 그린<황도총성도>(1723)를 조선의 관상감에서 영조 18년(1742)<황도남북총성도>라는 이름으로 그려 낸 것이었다. 중국에서 만들어진<황도총성도>가 가로 62㎝, 세로 40㎝ 정도의 크기였던 데 비해, 조선에서 제작한<황도남북총성도> 또는「법주사의 신법천문도」는 가로 451㎝, 세로 183㎝의 8폭짜리 병풍으로 만들어졌다.

 현재 보물 848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천문도는 제1폭에 천체에 대한 대강의 설명 등이 있고, 제8폭에는 이 천문도를 만든 사람들 이름이 적혀 있다. 나머지 가운데 부분을 둘로 나누어, 제2폭에서 제4폭까지는 북극 둘레의 별들을 그려 놓은 것이고, 제5폭에서 제7폭까지가 남극 둘레의 별들이다. 북극 둘레의 별이 1,066개, 남극 둘레에 789개, 모두 1,855개의 별들이 그려져 있다.590)이용범, 앞의 책, 236∼246쪽.
李龍範,≪韓國科學思想史硏究≫(東國大 出版部, 1993), 109∼237쪽.
조선 후기에 그려진 천문도는 이렇게 북극과 남극 둘레를 두 개의 원으로 그려 나타낸 신법천문도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서양의 천문학지식과 심지어는 남반구의 별들조차 일부 나타내면서도 북극 중심의 한 개의 원 안에 이를 모두 나타낸 그런 천문도도 제법 그려졌던 것으로 보인다. 18세기의 천문도로 보이는<混天全圖>(성신여대 박물관 소장)는 그 대표적 예가 된다.

 그러나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휘플과학사박물관에는 법주사의 천문도와 거의 같은 크기의 아주 훌륭한 조선의 천문도가 남아 있다. 이 천문도는 이름을<黃道南北兩總星圖>라 붙인 역시 8폭짜리 병풍식이다. 그러나 그 구성은 전혀 달라서 제1폭에서 제3폭까지의 3폭에는 조선 초기의<天象列次分野之圖>가 그대로 그려져 있다. 즉 전통적인 천문도를 한 장 그대로 그려 놓은 것이다. 그 다음에는 제4폭과 제5폭에 걸쳐 북극 둘레의 천문도가 그려졌고, 다음의 제6폭과 제7폭이 남극 둘레의 별들을 나타내고 있다. 마지막으로 제8폭에는 태양·태음·鎭星·세성·형혹·태백·辰星의 7정(七政, 또는 7요)이 다른 크기로 그려졌고 알맞게 색칠되어 있다. 이 천문도는 현재 1760년쯤 제작되었다고 밝혀져 있지만, 이를 만든 관상감의 관계자 이름이 어느 곳에도 밝혀져 있지 않은 것 같다.591)Needham, Joseph et al., The Hall of Heavenly Record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6. pp. 153∼179.
朴星來,≪민족과학의 뿌리를 찾아서≫(동아출판사, 1991), 54∼55쪽.
이 천문도에는 첫 3폭에 조선개국과 함께 만들었던 낡은<천상열차분야지도>를 그대로 재현해 넣고 있고, 또 별자리 이름들은 모두 전통천문학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지 서양식을 따르지 않고 있다. 다만 원둘레를 360도로 고쳐 쓴 것은 서양식을 따르고 있지만, 그 밖의 중요한 모든 것은 전통천문학을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또 서양천문지식 때문에 남반구의 별자리를 알게 되었으면서도, 그 일부만을 북극 중심의 한 개의 원에 그 모두를 나타낸 천문도를 그리던 태도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직 연구되어 있지 않은 흥미있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천문도는 책 속에 그리는 방법으로도 진행되었다. 예를 들면 金正浩는 순조 34년(1834) 천문도의 목판본을 제작했으며, 南秉吉(1820∼1869)은≪星鏡≫(철종 12:1861)에 항성들의 좌표목록을 만들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