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4. 과학과 기술
  • 2) 실제 과학기술의 발달상태
  • (2) 천문·기상기구의 제작

(2) 천문·기상기구의 제작

 이 시기에 천문기구의 제작이 역시 크게 활발하게 되는데, 이 원인은 서양천문학의 자극을 받아 그렇게 된 점이 인정된다. 하지만 그것만이 원인이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천문기구의 정비는 당대의 정치적 열정과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세종대에 천문학이 발달하고, 천문·기상기구들이 많이 만들어지고 또 발명된 것처럼, 조선 후기에서도 특히 한 시기에 그런 비슷한 노력이 집중적으로 나타나려 했다는 사실은 서로 대비시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바로 선조는 영의정 李恒福에게 천문기구들을 다시 만들도록 명했다. 왜란 동안 모두 불타버렸기 때문이다. 이항복은 세종 때의 것을 만들려 했지만, 일부밖에 성공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簡儀를 다시 만들고 그 서문을 쓰면서, 이항복은 이런 천문기구들의 제작이 앞서간 훌륭한 임금의 하늘을 좇아 때를 맞추려는 뜻(法天順時之意)을 우리 임금이 계승하여 부지런히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592)成周悳,≪書雲觀志≫권 3, 故事. 바로 이런 뜻에서 임진왜란 이후 세종대의 천문학을 재현시키려고 열정을 기울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미 전란으로 모두 파괴되어 버린 천문기구들을 하루 속히 다시 만들어 두는 것이 바로 하늘의 뜻을 받들어 정치를 하는 임금의 정치적 위치를 공고히 해주는 데 기여한다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 천문기구들의 제작이나 도입 등에 관한 기록 가운데 대표적인 일들을≪增補文獻備考≫와≪書雲觀志≫의 기록에서 찾아 나열해 보면 대강 다음과 같다.

인조 14년(1636) 명나라 李天徑이 만든 서양식 해시계 新法地平日晷 도입. 효종 8년(1657) 김제군수 崔攸之가 水激式 渾天儀로 璇璣玉衡 제작. 현종 5년(1664) 최유지의 것을 개조. 현종 10년(1669) 李敏哲(1631∼1715)과 宋以穎이 각각 선기옥형 만듬(송이영의 것은 지금 고려대 박물관에 있음. 국보 230호 지정). 숙종 13년(1687) 송이영의 사후 李縝精이 중수. 숙종 13년(1687) 이민철의 것도 수리하여 창덕궁 희정당 남쪽에 齊政閣을 세워 설치함. 숙종 13년(1687) 태조 때의 석각천문도<천상열차분야지도>복각. 숙종 14년(1688) 창경궁 금호문 밖에 관천대 축조. 숙종 30년(1704) 安重泰·李時華가 혼천의 복제품 만듬. 영조 8년(1732) 안중태의 혼천의를 개조하여 경희궁에 揆政閣을 세워 안치(현종 10년 이민철이 만든 것을 고친 것으로 영조가 쓴 현판은 지금도 경복궁에 보관중). 영조 46년(1770) 측우기 다시 만듬-風旗竹도 이 때 세웠다는 기록 보임(아마 지금 남아 있는 돌로 만든 水標 또한 이 때 작품일 가능성이 크다). 2세기 동안 소홀했던 강우량보고가 다시 시작되었다. 정조 원년(1777) 서호수·이덕성 등 중수. 정조 9년(1785) 간평일구·혼개일구 제작. 철종년간(1850년대) 南相吉 量度儀 만듬.

 위의 기록 가운데에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영조 46년에 오랜 동안 잊혀졌던 측우기를 다시 만들어 전국에 보급한 일이다. 당시 만들었던 측우기 가운데 그 받침대 하나가 지금 남아 있고, 바로 그 받침대에는 ‘乾隆庚寅五月造’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측우기가 전세계에 세계 최초의 강우량 측정장치라고 널리 소개되기 시작한 1900년대 초부터 바로 이 사진은 한국의 대표적 측우기로 널리 전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데 바로 그 측우대에 새겨진 글자가 중국학자들에게는 측우기를 중국것이라고 생각하게 한 원인이 되어버렸다. 그 결과 오늘날 중국에서 출판되는 많은 과학사 책에는 모두 측우기가 중국에서 만든 것이며, 그 가운데 일부 조선에 보내주었던 것이 지금 한국에만 남아 있는 것이라고 쓰여져 있다.593)박성래,<동아시아 과학사에서의 자랑과 편견>(≪과학사상≫19, 1996), 69∼90쪽.

 천문기구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망원경이다. 서양과학사에서는 갈릴레이가 1609(광해군 원년) 망원경으로 하늘을 처음 관찰하여 새로운 온갖 사실을 발견함으로써 우주관의 변혁에 크게 기여한 사실이 잘 알려져 있다. 망원경으로 하늘을 보면 달의 겉모양도 맨눈으로 보던 것과는 판이하게 달라서 놀라기 마련이다. 그뿐 아니라 태양의 흑점을 잘 관찰할 수도 있고, 은하수가 수많은 별들이라는 사실도 간단히 알아보게 마련이다. 갈릴레이의 경우는 망원경으로 간단히 목성에는 달이 4개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런데 조선에 망원경이 들어온 것은 인조 9년(1631)으로 정두원이 처음 그것을 가져온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의 보고서에는 이미 망원경의 성능이 잘 밝혀져 있다. 망원경이란 천문을 관측할 수 있고, 백리 밖의 적진을 쳐다보면 그 가운데 작은 것이라도 능히 알아볼 수 있는데 값은 3∼4백냥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들어오기 시작한 망원경이 그 후 천문관측에 사용되었다는 증거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또 국내에서 망원경을 만들었다거나 또는 제작하려는 노력을 했다는 기록도 아직 발견되어 있지 않다. 1세기 뒤의 실학자 이익은 망원경을 보지 못함을 한탄하는 글을 남기고 있고, 영조 42년(1766) 북경을 방문한 홍대용은 망원경을 하나 사려고 흥정까지 하다가 결국 그만두고 돌아온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천문학이란 새로운 사실을 탐구하고 알아내는 일보다는 이미 확정된 천문사상에 충실하게 따르는 일이 더 중요한 것이었음을 확인하게 한다. 어느 측면에서는 상당히 발달한 천문학이었지만, 아직은 망원경으로 하늘을 볼 필요성은 거의 느끼지 않는 것이 조선시대의 천문학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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