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4. 과학과 기술
  • 2) 실제 과학기술의 발달상태
  • (3) 역법과 시법-시헌력 도입

(3) 역법과 시법-시헌력 도입

 천문기구들의 제작이 활성화되었던 숙종시기 이후는 또한 중국에서 새로운 역법이 자리잡기 시작하는 전환기였다. 서양선교사들이 주동이 되어 서양식 천문학을 참고하여 새로 만들어 내는 신법천문역산학이 더 정확한 천체운동을 예보해 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특히 명나라 말기에 활약한 선교사 아담 샬은 조선의 소현세자와도 가깝게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서양천문학을 중국에 도입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가 주동이 되어 만든 신법서양역법은 명나라에서 시행되지 못하고, 새로 증원을 차지한 청나라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時憲曆을 채용해야 한다는 주장은 조선의 지식층 사이에서도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이미 원나라 때의 授時曆을 바탕으로 세종 때 서울에서 맞도록 수정하여 사용하던 七政算이 어긋나기 시작하고 있기도 했기 때문이다.

 신법 서양식역법인 시헌력을 채용하자는 논의는 김육에 의해 인조 22년(1644)에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효종 4년(1653)에 조선왕조는 시헌력의 채택을 선언했다. 그 사이에 봉림대군을 따라가 중국에 있었던 韓興一이 여러 가지 자료를 구득해 가져왔고, 인조 24년에는 김육이 중국에 갈 때 동행한 역관을 시켜 시헌역법을 배워 오려 했으나, 중국이 이를 비밀로 감춰 두어 欽天監에 접근조차 어려운 형편이었다. 결국 다시 책 등을 구입해 돌아와서 관상감의 천문학자 金尙范을 시켜 연구하게 하였고, 효종 2년에는 김상범에게 많은 뇌물을 가지고 중국에 다시 들어가 그 비밀을 알아내도록 했다. 마침내 2년 뒤에는 겨우 시헌력을 채택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서양식 천문체계에 대한 이해에는 그 후에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던 것이 확실하다. 시헌력을 채택한 때까지도 아직 행성운동의 계산법을 확실하게 알아내지 못했으므로 효종 5년에는 다시 김상범을 중국에 보냈다. 하지만 그가 도중에 객사하는 바람에 이 노력은 다시 중단되었다가 숙종 24년(1698)에서야 겨우 5행성의 계산이 시헌법에 따를 수 있게 되었다. 이를 위해서는 당시 관상감 천문학자 許遠의 노력이 많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의 계산과 중국의 계산 결과에는 언제나 차이가 있어서 숙종 31년 허원을 중국에 보내 필요한 자료를 사들이도록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年根의 계산방법은 완전히 체득하지 못하여, 중국의 전문가 何君錫에게 자료를 얻어 온 기록도 남아 있다. 또 하군석이 죽기 전에 그 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논의에 따라 다시 허원을 중국에 파견하기도 했다. 이런 노력 끝에 영조 원년부터는 새로이 수정한 時憲七政法을 시행했다.

 중국에서 서양선교사들이 만들어 낸 서양식 천문학지식을 이용한 동양식 역법인 시헌력은 인조 22년 그 도입을 논의하기 시작한 이래 거의 1세기 만인 영조 원년에서야 완전히 수용하기에 이른 것이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바로 이 기간이 조선 후기 천문학이 꽃을 피운 시기와 일치한다는 점이다. 새로운 천문학체계를 받아들이기 위해 조선정부는 여러 차례 천문관을 중국에 파견하여 책과 자료를 얻어 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바로 이 시기에 조선에서는 갖가지 천문기구들이 세종 때의 그것대로 재현하는 것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숙종 39년 청나라의 사신 何國柱가 와서 象限大儀를 사용하여 서울의 종로에서 서울 北極出地를 측량했는데, 그 값을 37도 39분 15초로 얻었다고≪서운관지≫에는 기록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증보문헌비고≫는 그 중국학자 이름을 穆克登이라고 밝히고 있어, 그 이름이 다르다. 그러나 이름이 누구였건 간에 중국천문학자가 와서 북극출지 또는 北極高度 즉 오늘의 개념으로는 緯度를 실측했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일이라 하겠다. 또 정조 16년(1792)에는 각 도와 주군의 북극고도를 측량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 시기에는 시헌력의 도입과 함께 서양식 각도표시법과 시간측정법이 자리잡게 되었음을 이 사실로도 확인할 수 있다. 즉 서울의 북극고도 또는 북극출지를 표시한 값은 이미 원둘레를 360도 기준으로 한 값을 가리킨다. 조선 초·중기 이래 서울의 북극고도가「38도 이상」으로 표시되었는데, 그것은 원둘레가 365¼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헌력과 함께 서양식 각도의 개념이 자리잡으면서 숙종 39년의 하국주의 측량값은 37도 반 정도로 나타나게 된 것을 알 수 있다. 또 그와 함께 각도도 원둘레가 365¼도였던 전통적 각도표시법에서 서양식으로 360도 원주로 바뀌어 있었다.

 당연히 이 시기에는 전통적인 시간측정 단위도 바뀌었다. 즉 전통적으로는 하루를 12시 100각으로 나누는 방식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각도 개념의 변화와 함께 시간 기준도 바뀌어 100각법이 96각법으로 바뀐 것이다. 12支를 이용하여 하루를 12시로 나누는 방식은 그대로 사용되고 있었지만, 하루를 100각으로 나누던 방식은 사라져 96각이 그에 대신하게 되었고, 따라서 1시간은 8각이 되어 오늘날 우리들이 쓰는 방식으로 바뀐 것이다. 물론 우리는 전통시대의 1시간을 다시 2시간으로 나누어 하루를 24시간으로 쓰고 있으니까, 우리의 1시간은 4각이 된다.

 같은 시기에 또한 많은 천문관련의 서적들이 나왔다. 숙종 35년 관상감의 천문학교수 崔天壁은≪天東象緯考≫를 완성하여 고려왕조 475년 동안에 있었던 여러 가지 재이를 분류하여 기록해 놓고 그 점성적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金益廉의≪歷代妖星錄≫은 중국의 혜성기록으로 춘추시대 노나라 문공 14년부터 명나라 萬曆 5년(선조 10:1577)까지의 기록을 모은 것으로 당시 점성술적인 관심이 잘 나타나 있다.

 시헌력을 도입하기 위해 여러 차례 중국을 다녀온 허원은 중국의 천문기관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기록한 책을 국내에서 간행했는데, 그것이 숙종 10년에 간행된≪儀象志≫(13책)이다. 그 가운데 2책이 그림으로 당시 중국에서 사용되던 천문기구들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또 허원은≪細草類彙≫를 숙종 36년에 간행했는데, 이것은 그의 시헌력에 관한 연구결과를 소개한 책이다. 머리말에 밝힌 것처럼 그는 시헌력을 배워 오려다가 객사한 김상범의 뒤를 이어 숙종 31년과 34년 두 차례 중국에 가서 중국의 천문학자 하군석을 만나며 배운 결과를 정리하여 이 책을 낸다고 되어 있다. 조선왕조는 서양식 시헌력을 도입하는데 60년 이상을 걸린 것으로 되어 있다.

 서운관 천문학자였던 成周悳(1759∼?)은 여러 가지 책을 후세에 남겼는데,≪國朝曆象考≫(4권 2책)는 정조 19년에 徐浩修(1736∼1799)와 金泳(1721∼?) 등이 함께 펴낸 책으로「한국천문학사」라 할 수 있으며 역법연혁·북극고도·동서편도, 경루 등 5부로 나누어 서술한 책이다. 성주덕은 또한 순조 18년(1818)≪서운관지≫를 완성했다. 이 책은 서운관의 역사와 관련자료를 정리해 놓은 책으로, 조선시대의 관상감(서운관)의 역사를 아는 것은 물론 서운관의 조직과 구성, 온갖 규칙과 운영 등을 한눈에 알 수 있도록 되어 있다. 18세기 후반 관상감의 뛰어난 천문학자였던 것으로 보이는 김영은 성주덕과 함께≪국조역상고≫의 편찬에도 가담했는데, 그 밖에도≪新法漏籌通義≫를 완성했다.

 19세기 전반을 대표하는 유명한 천문학자·수학자이며 고위관리였던 南秉哲(1817∼1863), 남병길 형제는 둘 다 천문관계 책을 많이 썼다. 형인 남병철은 철종 13년(1862)≪推步續解≫를 펴냈다. 이 책은 중국에서 나온 戴進賢≪曆象考成後編≫을 소화하려는 노력에서 나온 것이다. 역시 남병철이 쓴≪儀器輯說≫은 그 저작연대가 확실하지는 않다. 그러나 이 책은 조선시대 말기에 제작되었던 여러 가지 천문기구의 구조와 기능을 자세히 설명하는 점에서 아주 귀중한 자료가 된다. 여기 설명하고 있는 기구들은 혼천의·혼개통헌의·간평의·지구의·양도의 등등인데, 그 상세한 그림을 그려 놓지는 않았다.

 아우 남병길의≪星鏡≫은 철종 12년 관상감 제조인 그가 편찬한 별그림에다가 항성목록을 겸한 것이다. 2권으로 되어 있는 이 책은 1,449개의 별을 6등으로 나눠 그렸다. 또 철종 11년에 남병길이 낸≪時憲紀要≫는 시헌역법의 요점을 정리한 책으로 천문학시험에도 사용할 수 있게 편찬한 것이다. 그 밖에도 남병길은≪七政步法≫(철종 12)을 냈는데, 실제 책 이름은≪推步捷例≫로 되어 있고 역시 시헌력의 해설을 위한 책이다. 그의≪量度儀圖說≫(1권)은 철종 6년에 인쇄되었는데, 그의 형인 남병철이 여러 가지의 천문기구들을 설명한 책인≪의기집설≫에서 마지막으로 다룬 양도의를 아주 상세히 그림을 곁들여 설명한 것이다. 또한 남병길은≪중성신표≫·≪태양출입표≫·≪춘추일식고≫등 천문관계의 책들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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