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4. 과학과 기술
  • 3) 근대 과학기술의 수용-실학과 과학기술
  • (3) 홍대용의 과학사상

(3) 홍대용의 과학사상

 위와 같은 이익의 경우보다 洪大容(1731∼1783)에 이르면 그 비중은 한결 커지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598)朴星來,<洪大容의 과학사상>(≪韓國學報≫23, 1981).
―――,<洪大容,「湛軒書」의 西洋科學 발견>(≪震檀學報≫79, 1995), 247∼261쪽.
1세기 이상 시간이 지난 다음이라는 두 사람 사이의 시간 차이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바로 그 시간 동안에 훨씬 많은 한역 서양과학서들이 국내에 도입되어 읽혀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사이에도 해마다 적어도 한 번씩 북경에 파견되었던 연행사행에는 언제나 호기심 많은 학자들이 끼어서 그 가운데 일부 인사들은 서양선교사들을 직접 만나거나 그들의 저서를 구해서 읽을 수도 있었다.

 이러한 열성은 바로 홍대용에게서 놀라운 정도로 뚜렷이 드러난다. 이익과 달리 홍대용은 북경을 직접 가서 구경할 수 있는 기회를 더 가졌던 학자이다. 그는 영조 42년(1766) 이른 봄 북경에 도착해서 60일 동안 그 곳에 머물렀는데, 그 사이 4일을 쪼개어 南天主堂에 살고 있던 서양선교사(과학자) 두 사람을 찾아갔다. 당시 청조의 천문관서 흠천감을 맡아 가지고 있던 두 사람은 각각 흠천감의 監正과 監副였던 할러스타인(劉松齡)과 고가이슬(鮑友管)이었다. 홍대용은 이들 독일출신 선교사들과 세 번이나 만나 오랜 시간 동안 필담을 나눠 여러 가지로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 보고 토론했다.

 북경에서의 홍대용은 이와 같이 서양선교사(과학자)들과의 직접 접촉을 통해 서양과학지식에 대해 유난스런 관심을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여러 가지의 서양과학문물을 직접 구경할 기회를 더 가질 수 있었다. 그가 선교사들을 찾아갔을 때만이 아니라 귀국길에 觀象臺를 다시 들렀을 때도 여러 천문기구들을 직접 관찰할 기회를 더 가졌던 것이다. 그가 직접 만져 보고 또 구경했던 것들 가운데는 자명종과 鬧鐘 등 여러 가지 시계가 있었고, 망원경과 안경, 풍금 등과 여러 종류의 천문기구들이 있었다. 실학자들 가운데는 홍대용만큼 여러 가지의 서양과학기기들을 널리 구경한 학자는 다시 없는 것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이처럼 실학자 가운데 가장 널리 서양과학의 실물을 구경할 수 있었던 홍대용은 또한 가장 중요한 주장을 처음 내놓은 것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즉 그는 동양에서는 처음으로 분명하게 지구의 자전설을 주장했던 것이다. 물론 그의 地轉說은 완전한 그의 독창이라 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17세기에 나온 서양선교사들의 한역 서양과학서 가운데에는 이미 옛날 서양에는 지구의 자전이나 공전을 주장하는 이론이 있었다는 사실을 소개해 놓고 있었고, 홍대용은 이런 글들을 읽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런 서양선교사들의 책은 모두 지전설을 잘못된 가설로 소개했을 뿐이지, 그것을 옳다고 지적한 것이 아니었다. 홍대용은 그릇된 설로 소개된 지전설을 읽고, 오히려 그것이 옳을 것이라고 자신의 독자적 판단을 내린 것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그의 지전설은 이미 그보다 훨씬 전에 다른 조선의 학자 金錫文에 의해서도 비슷하게 제기된 일이 있다. 김석문의 주장은 전통적인≪주역≫의 해석을 바탕으로 전개된 것처럼 되어 있지만, 그 역시 당시 중국에 전해진 서양천문학의 내용에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시대 중국과 일본에서는 지전설을 분명하게 내세운 학자가 보이지 않는데, 조선에서만 이같은 주장이 나온 것은 조금 신기스런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홍대용의 지전설은 그 자체 과학적으로 그리 중요한 설이 되지 못한다. 서양의 지적 풍토와는 달리 동양에서는 지동설은 별로 혁명적인 학설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한가한 학자들의 상상력의 유희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서양의 기독교 전통은 그리스의 자연철학을 바탕으로 그 위에 신학체계를 쌓아 갔기 때문에 지동설을 용납하기 어려웠다. 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지동설은 서양의 기독교체제 안에서는 높은 혁명성을 가지게 마련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와 달리 동양의 지적 전통(유교 또는 다른 사상적 틀을 포함하더라도) 속에서는 지구의 운동이란 아무런 중요성을 갖고 있지 않았다. 땅이 움직인다고 인정해도 그것이 유교의 가르침 어느 부분에 충격을 줄 까닭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홍대용의 지전설은 과학적 이론의 참신성이나 혁명성 때문에 중요하다기보다는, 그것이 상징하는 실학사상의 자유분방함이 돋보인다는 점에서 한국실학의 한 이정표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다른 실학자들과 달리 홍대용은 주로 서양과학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한 편의 긴 과학논설을 남기고 있다. 1만여 자로 되어 있는 이 논설<毉山問答>은 그의 물질과 우주에 관한 생각을 모두 보여주고 있는데, 그는 전통적인 五行사상에 대해서도 근본적으로 의문을 던지고 있다. 홍대용은 上下之勢란 말로 지구 둘레의 물체가 지구로 떨어지는 현상을 설명하고 지구 둘레의 공기층을 말했으며, 땅은 둥글어 하루 한 번씩 자전할 뿐 아니라 우주는 무한하며 그 무한한 우주 속에는 지구와 같은 천체들이 더 있을 수 있고, 그 천체 가운데에는 지구에 있는 인간같이 지능을 갖추고 있는「우주인」도 있을 수 있다고 상상하고 있다.

 홍대용의 이와 같은 상상은 대체로 과학적 근거가 없이 내세운 상상력의 산물로 보이기는 하지만, 이 가운데 상당한 부분은 그가 중국에 소개된 책들을 읽고 얻어 낸 지식을 반영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1760년대까지 그에게 주어진 정보의 질과 양이 지극히 제한된 것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의 창의적 사고는 높이 평가할 가치가 충분하다.

 그는 또한 당시에 이미 서양과학의 특징이 관측기구와 수학적 접근방법에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의 문집에는 그가 집필한 수학책으로<籌解需用>이 남아 있으며, 또 그는 자기집 뜰에 있는 호수 안에 籠水閣이란 전각을 짓고 그 안에 여러 가지의 천문관측기구들을 만들어 보관했던 것으로 밝혀져 있다. 그는 근대과학의 특징 가운데 두 가지라 할 수 있는 수학적 방법과 실험관찰의 방법을 모두 꿰뚫어 보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서양과학의 특징에 대한 파악이 그대로 그 자신에 의해 실천에 옮겨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농수각에 渾天儀·候鍾·統天儀·測管儀·勾股儀 등을 만들어 두었다고 기록은 전하지만, 그 관측장치를 그가 실제 관측에 활용했다는 증거가 전혀 없다. 또 아직 자세한 연구는 되어 있지 않지만, 그의 수학책<주해수용>은 서양수학의 수준을 깊이 있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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