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4. 과학과 기술
  • 3) 근대 과학기술의 수용-실학과 과학기술
  • (4) 박제가의 서양기술 도입론

(4) 박제가의 서양기술 도입론

 홍대용이 사상가로서 서양과학의 정체에 어느 정도 접근한 인식에 도달하고 있었다면, 朴齊家(1750∼1805)는 그에서 한 발을 더 내디뎌 서양과학 특히 실용적인 서양의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를 주장하고 나섰다.599)朴星來,<朴齊家의 技術導入論>(≪震檀學報≫52, 1981), 202∼204쪽. 그가 重商主義的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학계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재물을 샘물에 비유하면서 박제가는 적당한 소비가 생산을 자극한다고 강조하면서 국내의 교역을 중요시함은 물론이고 해외무역의 중요성까지 강조했다. 유교 정통사상에서 상업이란 거의 가장 천시되는 직업에 속했던 것을 상기한다면, 박제가의 주장은 상당히 참신한 것임을 인정할 수 있다.

 박제가는≪北學議≫의 저자로 알려져 있는 것처럼, 그는 북학, 즉 당시 조선 사대부들이 경멸하고 가까이하기조차 꺼려하던 오랑캐가 지배하는 중국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워 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러 차례 중국사행을 따라 북경을 방문한 일이 있었던 그에게는 중국의 앞선 기술수준을 하루 속히 배워 들이지 않고서는 나라의 발전이란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 분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의 기술수용론은 주로 중국으로부터의 기술도입을 강조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중국에서 기술을 배워 오는 길에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 우연히 생긴 기술습득의 기회를 잘 활용하자는 주장이었다. 당시 중국의 배들은 끊임없이 조선해안에 표류해 오고 있었다. 이렇게 표류해 온 중국의 선박과 인원을 조선정부는 즉시 중국에 보내 버리곤 하였다. 박제가에 의하면 이렇게 표류해 온 중국의 선원들이나 중국인 사이에 선박기술자는 물론이고 다른 기술자들이 있을 수 있으니 그들을 송환하기에 급급할 것이 아니라 잘 활용하자는 것이었다. 그들을 중국에 송환하기 전에 그들로부터 배워 얻을 수 있는 지식과 기술을 모두 배워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물론 박제가가 추천한 제일 보편적인 선진기술 습득의 방법으로는 책을 수입해 와서 연구하는 길이다. 그는 농기구의 개량을 위해서는 徐光啓의≪農政全書≫를 참고하도록 권하고 있으며, 자신은 중국에서 한역되어 나온 서양의학서를 볼 수 없었다고 한탄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책을 통해 새로운 과학기술을 배우자는 생각은 당시의 학자들 사이에 상당히 널리 퍼져 있던 보편적 태도였다.

 그가 세 번째로 주장한 방법은 상당히 새로운 주장이었다. 해마다 10명 정도의 전문성 있는 인원을 선발해서 중국에 파견하여 선진기술 등을 배워 오게 하자는 것이었다. 경륜과 재능을 갖춘 사람을 10명 정도 해마다 중국에 파견되는 사행편에 함께 보낸다는 생각이었다. 이들은 새로운 기술에 대한 지식이나 기계장치 등을 배워 오게 되는데, 이들이 배워 오는 지식을 국내에 보급하기 위해서는 담당기관을 두자고 건의하고 있다. 이들은 한 번 선발되면 3회 파견되는데 이 과정에서 공을 세우면 상을 주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처벌하자고 주장했다. 이런 기술도입 방법을 시작하면 10년 안으로 중국의 앞선 기술수준을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다고 그는 주장했다.

 박제가가 내세운 마지막 네 번째 기술도입 방법은 앞의 어느 것보다 참신하고 당시로서는 대단히 파격적이기도 하다. 즉 그는 중국에 와서 활동하고 있던 서양선교사들을 직접 초빙해다가 그들로부터 서양 선진기술을 배워 들이자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이 선교사들은 기하학에 밝고 온갖 이용후생의 기술에 능통하니 그들을 경비를 들여 초빙해다가 젊은이들을 교육하여 서양기술을 습득하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천문학·관측기구·천문계산 등은 물론이고, 農桑·의약과 건축·광물·관개·교통수단 등등 모든 기술이 몇 년 안으로 크게 일어날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의 기술도입론 4개조는 2세기 전의 조선에서는 상당히 혁명적인 주장이었다. 특히 서양선교사들을 초빙해다가 그들이 보급하려는 기독교는 막고 그들로부터 기술만 배워 들일 수 있으리라고 상상했다는 것은 어쩌면 너무 단순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자유분방한 주장은 당대 실학자들, 그 가운데도 특히 북학파 학자들 사이에 퍼져 가고 있던 지적 분위기를 어느 정도 대변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농기구와 건축기술을 비롯한 일상생활과 관련된 온갖 분야에서 그는 중국이 당시의 조선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기술수준에 앞서고 있었음을 주목하고 있다. 그의 이런 관찰은 물론 그의 여러 차례에 걸친 중국방문을 통해 체험에서 얻은 관찰 결과였다. 그의≪북학의≫에는 이런 자신의 관찰 결과가 아주 많이 담겨져 있다.

 박제가의 이와 같은 적극적 기술도입론은 홍대용에 이어 직접 중국에서 발전된 과학기술 수준을 경험한 조선 실학자들이 보여줄 수 있었던 가장 강한 열망 그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박제가의 주장을 정점으로 한국실학사에서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이 차지하는 비중은 현격하게 줄어 들고 말았다고 할 수 있다. 그 원인은 우선 정치적 환경의 변화 때문이었다.

 그 직접적 원인을 순조 원년(1801)의 신유박해로 잡을 수 있음은 물론이다. 기독교는 이 사건을 전기로 조선사회에서 본격적인 박해를 받기 시작했다. 이런 기독교에 대한 태도는 즉각 중국을 방문하는 당시의 조선사신들에게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해마다 실시되는 사행 가운데 몇몇 학자들이 서양선교사를 만나려 하거나 또는 북경의 천주당을 찾곤 했지만, 그런 호기심이 눈에 띄게 쇠퇴해 버린 것이다. 박제가가 주장했듯이 서양선교사를 초빙해다가 서양의 과학기술까지를 배우자고 나서는 학자가 나올 리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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