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4. 과학과 기술
  • 3) 근대 과학기술의 수용-실학과 과학기술
  • (6) 이규경의 과학기술론

(6) 이규경의 과학기술론

 19세기 초를 대표하는 학자 가운데에는 李圭景(1788∼?)을 들 수 있다. 그가 남긴≪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아주 많은 과학기술에 관한 자료가 남아 있다. 아직 이 부분은 번역도 다 되지 않은 형편이지만, 대강을 살펴보더라도 그 중요성을 짐작할 수가 있을 정도다. 이 책을 보면 당시 중국에 알려지고 또는 일본에 알려졌던 서양 과학기술에 대한 지식이 상당히 이규경에게도 알려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그는 많은 분량의 전통 과학기술에 대해서도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 책은 순조 30년 전후에 쓰여진 것을 그 속에 들어 있는 여러 기사로부터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정확하게 언제 썼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1820년에서 1830년대에 걸쳐 이미 일본사람들은 근대의 과학기술을 대강 소화하고 있었고, 중국에도 상당한 수준의 서양 과학기술이 들어와 있기는 했다. 그러나 일본이나 중국과 달리, 당시의 조선에는 서양선교사들이 들어와 서양의 과학기술을 가르치고 책으로 써 낸 일이 전혀 없었다. 해마다 한 번씩 중국에 파견했던 사신일행 가운데 호기심 많은 학자들이 가끔 서양선교사들을 찾아가는 일이 있었고, 서양의 과학기술서적을 구해 돌아올 뿐이었다.

 이규경은 바로 이런 시대에 활약한 대표적 과학자였다고 평가할 수도 있을 정도로 많은 과학기술문제에 대해 글을 남기고 있다. 그는 천문학·역산학·수학·의학·음양오행·동물과 식물 등 과학의 모든 분야와 함께 교통·교량·금속·무기 등의 기술분야에 이르기까지 과학기술에 대한 많은 정보를 모아 아주 두꺼운 책을 써서 남겼는데, 그것이 바로≪오주연문장전산고≫이다. 물론 이 책은 과학기술만을 다룬 책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학자가 쓴 글치고는 과학기술에 대한 항목이 아주 많다는 특징을 당장 알 수 있을 정도다.

 그는 아직 우리 나라에 근대적 과학기술지식이 전혀 없던 시절에 그런 대로 서양의 과학기술을 흡수하려던 선각자로서의 노력을 잘 보여준다.≪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모두 1,417항목의 기사가 들어 있다. 각 기사는 몇 십줄도 안되는 짧은 것에서부터 수백행을 넘는 긴 기사까지 섞여 있는데, 모두 150만자가 넘는 엄청나게 많은 분량이다. 마치 새로운 지식에 굶주린 사람처럼 그는 과학기술만이 아니라 모든 새로운 지식에 대해 글을 썼고, 여러 분야의 문제들에 대해 나름대로의 정보를 수집해서 정리하고, 또 판단을 내려 글로 남겼다.

 바로 이와 같은 이규경의 뛰어난 노력을 통해 우리는 지금 역설적으로 19세기 초의 우리 나라 과학기술의 수준이 일본에 얼마나 뒤지기 시작하고 있었던가를 확인하게도 된다. 예를 들면 그의 기사 1,400여 개 가운데 하나로 ‘雷法器辨證說’이란 글이 있다. 그의 기사는 모두 ‘…변증설’이란 제목으로 되어 있으니, 이 기사는 뇌법기에 대해 변증하는 글이란 말이 된다. 뇌법기란 무엇일까. 내용을 읽어 보면 바로 靜電氣의 발생장치를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나라 최초의 발전기에 대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이에 의하면 뇌법기는 서울의 姜彛中의 집에 있는데 둥근 유리공 모양을 하고 있고, 이것을 돌려주면 불꽃이 별이 흐르듯 나온다고 적고 있다. 그는 또 이 불을 서양에서는 질병의 치료에도 쓰고 있다고 소개하고, 수십명이 손에 손을 잡고 이 장치를 만지면 사람들이 ‘소변을 참는 듯한’ 자극을 받는다고도 기록하고 있다. 이 정전기 발생기구는 부산의 草梁에 있던 왜관에서 1800년 직후 언제쯤인가 우리 나라 사람에게 전해져 서울까지 올라왔던 것으로 적혀 있다. 조선 초부터 초량에는 왜관이 있어서 일본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이들은 주로 대마도에서 와서 일본에 쌀을 비롯한 식량을 수입해 갔고, 또 우리의 문화를 배워 가기도 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고 서양의 과학기술에 먼저 눈뜨게 된 일본은 바로 이 경로를 통해 우리 나라에 거꾸로 서양문물을 전해 주기 시작했던 것이다.

 일본에서 처음으로 이런 전기 발생장치가 만들어진 경우로는 平賀源內(1723∼1779)라는 사람에 의해 1768년에 만들어진 ‘エレキテル(에레키테루)’란 것을 들 수 있다. 전기란 서양말이 바로 이와 비슷하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던 것이다. 그 후 일본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이 정전기 발생장치에 관심을 갖고 많은 장치가 만들어졌고, 19세기 초에는 이미 大坂과 京都 일대에서는 광고를 내고 이것을 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마 이런 것들 가운데 하나가 부산의 왜관을 거쳐 서울까지 전해졌을 것이다.

 이 사실 하나만 보더라도 전기에 대한 조선시대의 지식은 일본의 그것에 훨씬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세기 초까지에는 이미 일본은 과학기술 수준에서 크게 조선을 앞서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 소개한 이규경의 글은 순조 30년쯤에 쓰여졌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보다 반세기도 더 전에 이미 일본에서는 이런 발전기를 만들었고, 그것을 판매하여 의료용으로 또는 호기심 있는 사람들의 장난감으로 사용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전기에 대해 서양에서 근대적 과학지식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일본에서 정전기 발생장치를 만들기 불과 몇 년 전밖에 되지 않았다. 그 당시 주로 화란상인들이 長崎 앞 섬에 살면서 일본과의 무역을 하고 있었는데, 일본에서는 바로 이들을 상대로 하는 가운데 화란말을 배워 화란학문을 배워 들이는 이른바 蘭學者들이 생겨났고, 이들을 통해 서양의 과학기술이 즉시 일본에 전달되고 있었다. 서양에서 처음 이런 발전장치를 만들어 낸 것은 독일의 게리케로서 일본보다 1세기 앞선 일이었다. 그 후 서양에서는 전기에 대한 지식이 발전을 거듭해서 유명한 미국의 벤자민 프랭클린의 연 실험과 피뢰침 보급은 1750년 전후의 일이었다. 이 때쯤에는 전기를 의료용으로 이용하는 일도 많아졌고, 또 프랑스의 임금 앞에서는 호위병 180명이 손에 손을 잡고 발전된 전기의 양 끝을 손대게 해서 전기충격을 받고 펄쩍 뛰는 모습을 보고 즐겨하는 실험도 행해졌다. 이규경이 전하는 이야기의 한 대목은 바로 이 실험을 가리킨다.

 이 땅에 일본제 발전기를 들여다 준 부산 초량의 왜관은 이미 이보다 훨씬 앞서 기계식 시계를 우리 나라에 전해준 곳이기도 하다. 효종년간에 밀양사람 劉興發은 일본인에게서 얻은 자명종을 스스로 연구해서 그 이치를 터득했다는 기록이 우리 옛글에 보이는데, 그가 밀양사람인 것을 보더라도 그가 서양식 시계를 얻은 것은 바로 초량의 일본인에게서였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조선사람이 일본인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초량의 왜관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유흥발이 얻은 자명종이란 지금과 같이 일정한 시각에 따르릉따르릉 하고 울려 주는 시계가 아니라 종이 달린 시계를 가리킨 말이었다. 지금의 괘종시계란 뜻에 더 가까운 것이다. 그리고 이보다 거의 1세기 뒤인 19세기 말에는 池錫永이 우두를 일본인에게서 처음으로 배워 국내에 보급하기 시작한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역시 초량의 왜관을 통해 가능했던 일이다.

 이규경의 책에서 우리의 전통과학이 상당히 중국의 영향을 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근대 과학기술의 지식이 우리가 아는 역사와는 달리 쇄국이 심한 시대에도 이 땅에 조금씩 흘러들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특히 19세기 초에 일본으로부터 서양의 근대 과학기술의 지식이 조금씩 들어오고 있었다는 사실은 지금까지의 역사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일이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실려 있는 수많은 기사들을 여기서 대강이나마 모두 소개할 길은 없다. 그러나 19세기 전반의 어둡던 시절에 나라 안에 이렇게 뛰어난 근대 과학기술을 소개하고 있던 과학기술의 선각자 이규경에 대해서는 알려진 사실이 별로 없다. 역시 실학자로 잘 알려진 李德懋의 손자였던 그는 전주 이씨였는데, 그의 박학은 할아버지 이래 가문의 전통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국립도서관 겸 연구소라 할 수 있는 奎章閣의 檢書였던 할아버지에 이어 아버지 李光葵도 같은 직책을 맡았었다.

 그는≪오주연문장전산고≫말고≪五洲書種博物攷辨≫·≪白雲筆≫등을 남겼으나≪산고≫같은 방대한 것은 못된다. 그의≪산고≫는 일제 때 엿장수에게 파지로 넘어간 것을 구해내게 되었다는 일화를 안고 있다. 이미 예로 든 몇 가지만도 다른 사료에서는 찾기 어려운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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