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4. 과학과 기술
  • 3) 근대 과학기술의 수용-실학과 과학기술
  • (7) 최한기의 종합적 과학기술 수용

(7) 최한기의 종합적 과학기술 수용

 崔漢綺(1803∼1877)는 정약용이 세상을 떠난 그 해 헌종 2년(1836)에 그의 첫 저서를 낸 것으로 밝혀져 있다. 그 해에 낸 그의 두 가지 책≪神氣通≫과≪推測錄≫은 뒤에 한 권으로 묶여≪氣測體義≫란 책이 되기도 한다. 철학자 朴鍾鴻의 높은 평가 이후 최한기에 대한 철학사 내지 사상사 측면의 연구는 계속되고 있지만, 과학사 측면의 관심은 아직 별다른 큰 성과를 얻지는 못하고 있다.601)權五榮,<惠岡 崔漢綺의 科學思想>(≪國史館論叢≫63, 1995).
許南進,<惠岡 科學思想의 哲學的 基礎>(≪과학과 철학≫2, 1991).
朴鍾鴻,<崔漢綺의 科學的인 哲學思想>(≪韓國의 思想的方向≫, 博英社, 1968), 101∼163쪽.
金容沃,≪讀氣學說≫(통나무, 1990).
조동일,≪우리 학문의 길≫(지식산업사, 1993), 특히 176∼183쪽 참조.
그러나 헌종 2년 작품의 개괄적인 연구만으로도 우리는 그 내용이 거의 다 당시 중국에 소개되어 있던 서양과학을 그대로 소개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오목렌즈와 볼록렌즈를 비롯한 광학현상에 대한 설명이 있고, 대기의 굴절현상에 대한 글도 나온다. 소리와 색깔, 냄새 등의 전달은 근대과학의 파동이론을 동원해 설명하고 있고, 온도계와 습도계도 설명되고 있다. 또 그는 지구의 모양을 설명하고, 그것은 하루 한 번씩 자전한다는 사실도 주장하고 있다. 그 책에서는 아직 지구의 자전만을 주장하다가 헌종 14년의≪地球典要≫에서는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함께 주장하고, 또 이와 같은 자전공전설이 코페르니쿠스의 것임을 밝히고 있다.

 지구의 자전설에서 자전공전설로 바뀌는 헌종 2년과 헌종 14년 사이의 최한기의 지적 변화가 어떤 것이었을까는 상상하기가 어렵다. 최한기라는 실학사상가에 대해서는 어느 다른 실학자보다도 알려져 있는 것이 적기 때문이다. 그의 가정이나 교유관계 등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적지만, 그의 글이 아주 많이 남겨져 있는 것은 사실이다. 또 그는 분명히 방대한 자료를 가지고 있었거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 자료들을 활용해서 그의 작품을 써 놓은 것이었다. 개인 최한기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는 가운데 그의 책만은 방대한 양이 남아 있다. 그러면서도 그의 책들이 정말 어떻게 쓰여졌고, 그 책들에 담긴 내용 가운데 얼마 만큼이 그의 독창적 사고의 결실인지는 아직 판단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최한기가 쓴 글들은 거의가 당시 중국에 들어와 있던 서양 과학기술 또는 지리적 지식을 그대로 번안해 국내에 소개한 것이 중심을 이루고 있지 않은가 생각된다. 그의 대표작인≪지구전요≫는 서문에 밝혀져 있는 것처럼 중국에서 나온 魏源의≪海國圖志≫와 徐繼畬의≪瀛環志略≫을 간추려 정리한 것이다. 또 고종 4년(1867)의≪星氣運化≫는 영국의 천문학자 월리엄 허셸의 책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그 대본은 중국에서 번역되어 나온 허셸(候失勒)의≪談天≫이었다. 이 책은 중국에서 활약하던 알렉산더 와일리(偉烈亞力)가 중국 최초의 근대 수학자 李善蘭과 함께 번역한 것으로 철종 9년(1858) 처음 출간되었다. 또 고종 3년의≪身機踐驗≫은 역시 당시 중국에서 활약하던 영국출신의 선교사(의사) 벤자민 홉슨(合信)이 50년대에 중국에서 여러 권으로 출간했던 근대 서양의학을 다시 나름대로 정리해서 국내에 소개한 것이다.

 대체로 그의 중요작품은 거의 漢譯 서양과학서의 편저 정도라고 생각되는데, 그의 첫 작품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한 것을 알 수가 없다. 즉<기측체의>가 그의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보여준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 안에 실려 있는 물리학 일반의 내용은 분명히 당시 중국에 소개되어 있던 지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아직 그 책의 지식을 최한기는 어떤 책에서 구했으며, 얼마나 자기 것으로 소화해서 소개한 것인지가 연구되어 밝혀져 있지 않을 뿐이다.

 고종 13년(1876) 나라의 문이 열리기까지 조선시대 실학자 가운데 가장 뛰어난 마지막 실학자였다고 불러도 좋을 최한기의 작품세계가 대체로 중국에서 나온 한역 서양 과학기술서의 번안 소개라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볼 것인가. 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최한기의 시대에 이르면 이미 조선의 실학자에게는 중국에 들어와 있는 새로운 서양 과학기술의 지식이 이미 분량에 있어서 쉽게 소화하기 어려울 만큼 많아지고 있다는 자각을 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최한기가 손에 닿는 것이라면 모두를 그 나름으로 정리해서 그의 글로 발표하게 된 까닭은 바로 그런 조급함을 반영하고 있다. 이미 시간은 흐르고 이웃 중국의 서양 과학기술의 수준은 간단히 소화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만 가고 있음을 알게 되면서 최한기는 그 수용을 서두르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최한기의 실학에서 드러나는 서양 과학기술에 대한 높은 관심과 그 조급한 소개 노력은 다름아닌 당시 조선의 지식층의 의식을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거나 그들은 이웃 일본의 서양 과학기술 수용과정까지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고, 중국의 서양 과학기술 서적은 상당히 많이 들여다가 읽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실학적 취향의 학자들이 조급하게 느끼고 있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최한기의 글 속에서 우리는 당시 조선의 과학기술 수용의 한계성을 가장 뚜렷한 증거로 발견할 수도 있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그가 헌종 14년(1857)에 쓴≪地球典要≫에는 영어 알파벳 26자가 처음으로 국내에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 그 글자를 그려 놓은 모양은 지금 우리들에게는 전혀 영어 글자처럼 보이지도 않을 정도이다. 그리고 이 26글자에 대한 설명이라고는 이 가운데 3자만이 독자적인 뜻을 가지고 사용된다면서 A, I, O가 각각 一, 我 및 감탄사로 사용된다는 점만을 설명하고 있다. 당시 이미 중국과 일본에서는 서양말이 상당히 보급되고 있었지만, 조선에는 이 정도의 서양말에 대한 지식이 싹트고 있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후 25년 동안 사태는 바뀌지 않아서 조선 말기에 서양어를 배운 사람은 고종 20년의 尹致昊가 처음이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