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4. 과학과 기술
  • 3) 근대 과학기술의 수용-실학과 과학기술
  • (8) 대원군의 군사기술 맛보기

(8) 대원군의 군사기술 맛보기

 앞에서 우리는 실학자들의 서양 과학기술에 대한 관념적인 반응을 대체로 살펴보았다. 그런데 그들 실학자들의 서양 과학기술에 대한 인식이 그런 대로 상당한 수준에 이르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사상은 그저 사상으로 머물 수밖에 없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인물도 실제 정치에서 권력을 휘두를 정도에 이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그들이 그렇게 비교적 선진적이고 개방적인 사상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들이 집권층에서 소외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지적할 수 있다.

 그런 뜻에서 실학자들이 갖고 있던 서양 과학기술에 대한 높은 관심은 우리 나라 역사상 중요한 무게를 갖기 어려웠다고도 할 수 있다. 차라리 그런 뜻에서는 실제 권력의 자리에 올랐던 대원군 李昰應(1820∼1898)의 경우가 더 서양 과학기술의 도입문제를 이해하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다.602)朴星來,<大院君시대의 과학기술>(≪한국과학사학회지≫2, 1980). 12살의 어린 아들이 갑자기 임금이 되는 바람에 실제적인 정권을 잡게 된 이하응은 어린 고종의 아버지로서 고종 원년(1864)부터 10년 동안은 가장 확실한 조선왕조의 지배자였다.

 집권 초기에 대원군은 분명한 개혁의지를 가지고 여러 가지 노력하는 가운데 특히 서양의 군사기술을 습득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집권 전에 재야학자들과도 상당한 교분을 쌓고 있었고, 그 가운데에는 실학자로 이름난 金正喜도 들어 있다. 대원군은 김정희를 몇 차례 찾아가 만난 일도 있고, 그의 제자를 비롯한 당대의 학자들과도 교류가 있었다. 또한 그의 부인과 종들 사이에는 천주교가 어느 정도 전파되어 있었던 것도 분명하다. 그의 부인, 딸, 그리고 고종의 유모 등이 기독교 신자였다고도 하지만, 어느 범위까지가 얼마나 기독교에 기울어 있었던 간에 대원군이 집권 초에는 승지였던 천주교도 南鍾三과 접촉해서 기독교를 그의 정치적 목적에 맞게 이용하려던 생각까지 했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신부들을 접촉하려던 그의 계획은 실현되지 못한 채 그의 기독교 탄압은 고종 3년(1866) 초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반응으로 丙寅洋擾가 일어났다. 프랑스의 침략을 당한 대원군은 이를 물리치면서 기고만장했고, 서양에 대한 적개심이 크게 일었는 데다가, 고종 8년의 辛未洋擾로 서양에 대한 적개심은 더욱 높아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서양 군사기술의 우월성이 여지없이 드러난 싸움이기도 했다. 결국 서양의 군사기술을 배우려는 그의 생각은 더 가열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계획은 서양인들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가지지 않은 채 진행시켜야만 되었다. 초기에는 분명히 서양선교사들을 이용하여 군사기술을 습득하려던 그의 계획은 방향을 수정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고종 2년 대원군의 주도 아래 실시되었던 몇 가지 신식무기 실험은 서양 무기기술의 흉내내기가 어떻게 열심히 진행되었던가를 어설프나마 잘 보여준다. 훈련대장 申觀浩는 노량진에서 水雷砲를 시험발사하는 실험을 했고, 또한 서양식 기선을 시험해 보기도 했다. 고종 2년 9월 10일 신관호가 만든 수뢰포는 노량진 앞 한강 위에서 실험발사를 실시하여 성공시켰다. 고종과 대원군 등이 참가한 성대한 시험에서 성공했다 하여 신관호는 상까지 받았다. 수뢰포란 물속을 달려가다가 적선을 만나면 부딪혀 폭발하도록 만든 것으로 시험에는 일단 성공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서양기술을 본받아 만든 이 무기에 대한 규모나 위력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수뢰포가 중국에서 발행되어 당시 꽤 국내에 보급되어 있던 魏源의≪해국도지≫에서 발상을 얻었던 것이므로 그 대강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또 같은 이름의 무기는 명치 초기 일본에서도 만들어 사용되었고, 고종 13년 개국과 함께 처음 일본을 공식 방문했던 조선의 修信使 일행도 일본에서 수뢰포를 구경했다.

 같은 해에 대원군은 한강에서 국산기선을 세 척이나 시험 제작해 실험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마 이 가운데 적어도 하나가 또한 서양식 기선이었다고 생각된다. 고종 3년 미국 상선 셔먼호가 평양의 대동강에 좌초하여 공격을 받자, 사건 후에 그 배의 증기기관은 한강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그 증기기관을 써서 최초의 서양식 기선이 제작되었던 것이다. 대원군은 金箕斗를 시켜 그 증기기관을 활용하여 처음으로 서양기선을 흉내낸 기선을 만들었다. 이미 서양기선에 대해서는≪해국도지≫같은 책에서 뿐만 아니라 여러 차례 난파해 들어왔던 서양배를 구경할 수 있었기 때문에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물론 다 망가졌었을 것이 분명한 제너럴 셔먼호의 증기기관을 어떻게 수리해 사용할 수 있었던가는 의문스런 일이다.

 여하튼 김기두 등은 이 서양의 증기기관을 달아 조선식 기선을 한 척 만들어 보았던 것 같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는 석탄은 없었으므로 숯을 때서 증기기관을 움직였다. 선체는 상당한 크기와 무게를 가졌고 석탄은 없었으므로 숯을 때서 증기기관을 움직였으니 그 추진력은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대원군이 참석한 가운데 배를 움직여 보았으나, 그 배는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1분에 열 발자국 정도밖에 움직이지 않았다. 끝내 어쩔 수가 없게 되자 밧줄을 매어 여럿이 끌어가게 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대원군은 후회하는 말은 하지 않은 채 그 배를 부셔 쇠는 대포제조에 사용하라고 지시했다.

 대원군은 또한 서양무기에 대항하기 위해 아주 특이한 새 발명품 같은 것도 만들어 실험해 보았다. 그 가운데 무명을 13겹이나 누벼서 일종의 방탄복을 고안해 본 것도 흥미로운 시도였고, 더구나 서양 해군의 공격을 받고 배에 구멍이 뚫려도 가라앉지 않게 하기 위해 뱃전에 깃털을 달아서 飛船을 만들어 본 일도 있다. 그 이름이 비선이어서 지금까지도 많은 한국인들이 일종의 비행기였을 것이라 오해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배였다.

 제한된 가운데 겨우 서양 과학기술의 선진성에 주목하고 이를 빨리 받아들여야겠다는 각오가 일부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각오는 실제 권력에서 격리되어 있던 학자들이 아니라 실권을 가진 인물에게 그런 생각이 엿보인다는 데 그 역사적 중요성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방법으로 당시의 서양 과학기술을 간단히 배워 들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미 일본에서는 이 때쯤까지에는 몇 세기 동안이나 서양사람들에게서 직접 서양의 과학기술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영향으로 일본에서 발달한 것이 蘭學이었다. 중국의 경우에는 17세기 초 마테오 리치가 북경에 자리잡은 이후 바로 대원군이 집권하던 때까지 역시 몇 세기 동안이나 서양선교사들이 근대 과학기술을 한역서로 내놓고 있었고, 중국학자들이 이를 직접 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긴 시간을 조선인들은 아무런 서양과의 직접적 교섭의 기회가 없는 채였고, 대원군의 방법은 그런 시기를 그저 더 연장시키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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