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1. 문학
  • 1) 국문시가와 한시
  • (1) 시조

가. 평시조

 18·19세기의 시조에서는 평민 가객들의 활동이 커지고, 각종 가집이 활발하게 편찬되었으며, 시조창이 널리 보편화되는 등 창작·수용계층의 확산과 중심 이동현상이 나타났다.

 그 중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이 金天澤·金壽長 등 중인층출신 가객들의 활동이다. 이들은 시조를 절실한 자기표현의 문학적·음악적 양식으로 여겼다. 그리하여 그들은 동호인적 취미집단을 형성하여 시조를 즐기는 歌壇활동을 전개했으며, 시조작품들의 수집 및 정리에도 힘썼다. 김천택의≪靑丘永言≫(영조 4:1728)과 김수장의≪海東歌謠≫(1차 편찬, 영조 31)는 바로 그러한 노력의 산물로서 편찬된 것이다.

 이들 가객과 평민층의 시조애호자들은 사대부들과 달리 시조를 ‘詩餘’가 아닌 진지한 양식으로서 옹호하고자 했으며, 더 나아가서는 경험과 감정을 표현하는 진실성에서 그것이 한시보다 더 가치 있다는 인식에까지 도달하였다. 그 한 예로서,≪청구영언≫에 서문을 쓴 鄭潤卿은 시조작품들이 화평·정대한 것과 애원·처절한 것을 모두 포괄하고 있어서 사대부들의 관습적인 시보다는 훨씬 다양하고 절실한 감흥을 준다는 점을 역설했다. 한편 왕족의 일원이면서 시조를 애호하여 김천택과 교분이 있었던 李廷燮은「磨嶽老樵」라는 필명으로 쓴<靑丘永言 跋>에서 한시가 지나친 형식주의에 매몰된 결과 性情의 자연스러움으로부터 멀어졌다는 점을 지적하고, 다음과 같이 시조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대변했다.

오직 가요의 한 가닥[時調]만이 風人의 남긴 뜻에 거의 가까워서, 情으로부터 솟아나는 것을 우리말로써 표현하여 읊조리는 가운데 유연히 사람을 감동시킨다. 길거리의 노래에 이르러는 樂調가 비록 바르게 다듬어지지 못했으나, 그 기뻐하고 원망·비탄하며 미친듯 울부짖고 거칠게 날뛰는 모습과 태깔은 제각기 자연의 眞機로부터 나온 것이다. 가령 옛적에 민간풍속을 살피던 자로 하여금 採詩하게 한다면, 나는 그가 한시에서 채집하지 않고 노래[시조]에서 채집할 것임을 아노라. 노래를 어찌 소홀히 여길 수 있겠는가.

 중인층 가객들을 중심으로 한 가단활동은≪歌曲源流≫(고종 13:1876)를 편찬한 朴孝寬·安玟英을 거쳐 19세기 말까지 다양하게 지속·확대되었으며, 그 가운데에는 사대부층이 적극적으로 참여한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시조를 애호하는 흐름이 발전하는 가운데「時調」라는 이름의 새로운 창법이 출현했다. 문학형식으로서의 시조는 조선 초·중기 이래로 歌曲이라는 고전적 창법에 의해 불리어 왔고, 김천택·김수장·안민영 등이 깊은 관심을 기울이며 애호한 것도 바로 이 악곡에 기반한 시조였다. 그러나 이러한 고전적 악곡이 성행하면서 그보다 반주악기 구성이 단순하고 창법 또한 평이한 악곡이 18세기에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 대중적 창법을 당시의 사람들은 ‘요즘 유행하는 곡조’라는 뜻으로 ‘싯조[時調]’ 혹은 ‘時節歌調, 新調’라 불렀다. 종래의 가곡보다 평이하며 대중적인 친화력을 가진 이 창법이 널리 확산됨으로써 문학양식으로서의 시조가 지닌 소통 범위는 더욱 확대되었다. 시조창을 위한 작품집인≪南薰太平歌≫가 철종 14년(1863)에 방각본으로 간행된 사실을 보면 19세기에는 시조창의 대중적 보급이 매우 넓은 범위에 이르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대부시조에서도 시대적 변화에 따라 작품의 관심사와 주제 및 미의식 면에서 적지 않은 변화가 나타났다. 작자의 사회적 처지와 의식 지향에 따라 그 흐름을 여러 가닥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安瑞雨(1664∼1735), 魏伯圭(1727∼1798) 등은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이 현실적으로 차단된 처지로 향촌생활을 영위하면서 생활체험을 사실적으로 노래한 작품들을 창작했다. 아래에 인용하는 위백규의 작품을 통해 그 전형적 사례를 볼 수 있다.

은 든 대로 듯고 볏슨  대로 다

쳥풍의 옷깃 열고 긴 파람 흘리 불 제

어셔 길 가 소님 아시 머무고

 權燮(1671∼1759)은 노론의 명문출신이었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일생을 보내며 많은 시조를 창작했다. 그의 시조는 사대부시조의 전통적 주제와 어법을 벗어나, 일상적 언어로써 다채로운 생활감정을 표현했다.

 李鼎輔(1693∼1766)는 이조판서·대제학 등의 고위관직까지 지낸 인물인데, 그의 작품이라 전해지는 90여 수 중에는 회고·풍류를 노래한 것들과 더불어 비속한 소재와 어법을 거리낌없이 구사한 작품들도 많이 들어 있다. 아울러, 그의 작품 중에는 남녀간의 애정을 다룬 것들도 다채롭게 들어 있어서, 다음 시대에 李世輔에 의해 사대부층의 애정시조가 더욱 확대 발전되어 가는 역사적 맥락을 찾아볼 수 있다.605)朴魯埻,<李鼎輔 時調와 退行 속의 進境>(≪古典文學硏究≫8, 韓國古典文學硏究會, 1993), 170쪽.

 이세보(1832∼1895)는 왕실의 종친으로서 무려 450여 수나 되는 시조작품을 남겼는데, 이들 작품에는 그의 유배체험과 관직생활 및 개인적 풍류가 두루 다채롭게 반영되어 있다. 그 중 현실의식이 강한 작품들에는 三政의 문란과 수령들의 탐학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담겨 있으며, 전통적 애민의식에 기반한 교훈성이 나타나기도 한다. 한편 그의 작품 중 다수를 차지하는 애정시조들은 중세적 관념의 규제에 억눌려 있던 애정의 갈망과 정감 및 섬세한 심리를 본격적인 시적 관심사로 떠올린 점에서 주목된다.

 시적 관심과 미의식의 변화는 전통적인 소재에 대한 재해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白沙場 紅蓼邊에 굽니러 먹는 져 노야

 닙에 두셋 물고 무엇 낫 굽니느냐

우리도 口腹이 웬슈라 굽니러 먹네.

  (≪南薰太平歌≫)

江湖에 노는 곡이 즑인다 블어 말아

漁父 돌아간 後 엿는이 白鷺ㅣ로다

終日을 락 기락 閒暇  업들아.

  (一石本≪海東歌謠≫)

 앞의 시조는≪南薰太平歌≫에 수록된 작자미상의 작품이다. 자연의 근원적 조화와 윤리적·심미적 가치에 대한 16·7세기 사대부시조의 시각과는 전혀 다른 세계관이 이 작품을 지배하고 있다. 위의 시조는 이 세계를 생존을 위한 갈등의 현장으로 파악한다. 江湖시가에 흔히 등장하는 백사장, 붉은 여뀌, 백로가 여기서는 극히 현실적인 사물로 전환되어, 관조의 심미성 대신 구체화된 세속적 삶의 문제 안에서 파악되고 있다.

 이정보의 창작인 둘째 작품에서도 이러한 새로운 자연관이 엿보인다. 16·7세기 사대부들의 시가에서 조화와 관조의 공간으로 인식되던 강호가 이 작품에서는 절박한 생존의 공간으로 바뀌어 있다. ‘백로’와 ‘고기’는 이같은 긴장관계 속에서 각자의 삶을 영위하기에 분주한 존재들이다. 작자가 사대부로서 고위관직을 역임한 인물이었음을 생각하건대, 이러한 자연관의 변화는 이 시기의 시조들이 상하층에 두루 향유되면서 성격상의 변화를 겪었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고 하겠다.

 이와 같은 관점의 전환 및 새로운 시적 관심의 대두는 중인층의 시조에서도 풍부하게 나타난다.

長劒을 혀 들고 다시 안자 혜아리니

胸中에 머근 이 邯鄲步ㅣ 되야괴야

두어라 이 한 命이여니 닐러 므슴 리오.

  (진본≪청구영언≫)

 

이 눈을 모라 山窓에 부딋치니

찬 기운 여 드러 는 매화를 侵勞터니

아무리 어루려 허인들 봄 이야 아슬소냐.

  (≪金玉叢部≫)

 ‘장검을 혀 들고’는 중인층에 속했던 김천택의 신분적 갈등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중세적 신분질서 앞에서의 번민(초장), 참담한 좌절의 확인(중장), 그리고 우울한 체념의 탄식(종장)으로 표현되어 있다. ‘흉중에 머근 뜻’은 아마도 사회적 진출에 대한 포부일 것이다. 그러나 그 포부는 신분의 장벽을 넘을 수 없다는 데에 작자의 고뇌가 있다.

 ‘이 눈을 모라’는 안민영이 그의 스승인 박효관의 산방을 방문하여 지은<梅花詞>8수 중의 여섯 번째 작품이다. 겨울의 찬 기운 속에서도 고고하게 피어 있는 매화를 통해 작자는 신분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드높은 예술적 정취를 표현하고자 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