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1. 문학
  • 1) 국문시가와 한시
  • (3) 한시

(3) 한시

 이 시기의 한시는 실학사상의 발전에 직접 또는 간접적인 영향을 받는 한편, 조선조의 중세적 질서와 이념의 동요라는 사회상황을 체험하면서 여러 방향의 새로운 모색을 보였다. 정통적 한시에서의 시풍과 심미적 지향의 변모, 현실주의적 시의식의 대두, 민족적 개별성의 강조, 인정세태에 대한 적극적 관심, 민요적 요소의 수용, 그리고 委巷詩人들의 등장 등을 그 주요한 국면으로 지적할 수 있다.

 정통적 한시에서의 시풍의 변화를 보인 문인집단으로는 ‘四家’라 일컬어졌던 李德懋·柳得恭·朴齊家·李書九가 주목된다. 이들은 종래의 한시를 속박하던 관습적 규범과 중국 중심의 취향으로부터 벗어나, 조선사회의 현실감각과 생활감정에 맞는 시를 추구했다. 이들 가운데 이서구를 제외한 세 사람은 서얼출신이었으나 정조의 아낌을 받아 규장각의 檢書官으로서 문학적 재능을 발휘했다. 이들은 朴趾源(1737∼1805)으로부터 사상적·문학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은 北學派의 일원으로서, 그 시대의식과 함께 문학 쪽에서도 개방적인 기풍을 보여주었다.

 현실주의적 시의식의 실천이라는 측면에서는 丁若鏞(1762∼1836)과 李學逵(1770∼1834)가 대표적인 인물로 지적될 수 있다.

 정약용은 정치적으로 열세에 놓인 남인계열의 일원으로서 예민한 정치의식과 개혁적 안목을 가졌고, 이러한 성향에 기반한 현실비판적 시풍이 청년 관료시절의 작품인<飢民詩>에 이미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순조 원년(1801)의 辛酉迫害 이후 18년의 유배생활을 통해 그는 당대 현실의 여러 문제와 모순을 좀더 깊이 체험했다. 그는 이러한 체험을 자신의 시세계에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사회비판적 시의 경지를 확대해 나아갔다.

 다음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田間紀事 연작시의 일부분이다.

狼兮豺兮  이리여, 승냥이여!

旣取我尨  삽살개 이미 빼앗아 갔으니

毋縛我鷄  닭일랑 묶어가지 마라

子旣粥矣  자식은 이미 팔려갔고

誰賈吾妻  내 아내는 누가 사랴

爾剝我膚  내 가죽 다 벗기고

而槌我骸  뼈마저 부수려나

視我田疇  우리의 논밭을 바라보아라

亦孔之哀  얼마나 크나큰 슬픔이더냐

稂莠不生  강아지풀도 못자라니

其有蒿萊  쑥인들 자랄손가

殺人者死  살인자는 이미 자살했는데

又誰災兮  또 누구를 해치려느냐.

  (丁若鏞,≪與猶堂全書≫ 1-5권, 詩文集, 詩 豺狼)

 그의 유배생활 중에 씌어진 이 작품은 당대의 현실상에 대한 절박한 비판의 노래라는 새로운 시적 경향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이 시의 話者는 가혹한 정치에 의해 생존의 근거를 상실한 민중으로 설정되었으며, 그의 입을 통해 체제모순의 극심한 폐해가 생생하게 고발되는 데서 시적 효과가 뚜렷한 현실감과 직접성을 얻고 있다. 이러한 시정신은<哀絶陽>·<蟲食松>·<夏日對酒>·<龍山吏>등 그가 쓴 사회비판적 시편들 전체에 일관되어 있다.608)宋載卲,≪茶山詩 硏究≫(창작과비평사, 1986) 참조.

 이학규 역시 24년간 유배생활을 겪었고, 정약용과 교분을 가지면서 그로부터 상당한 시적 영향을 받았다. 그의 작품에서도 농민들의 참상을 다룬 작품들이 주축을 이룬다. 그는 정약용의 전간기사에 화답하는 己庚紀事를 창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당시의 사회적 모순을 사실적으로 파헤치는 작품들 외에도 자신의 생활 주변에서 보고 듣는 일들을 시로써 표현함으로써 다양한 시세계를 추구했다.

 그러한 모색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성과로서 일련의 樂府 시들이 주목된다.<嶺南樂府>에서 그는 역사를 읊조리는 詠史樂府의 일반적 양식을 따르면서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일화와 소재들을 통해 당대의 사회상을 풍자했다. 이러한 경향이 민간생활에 대한 관심 쪽으로 좀더 접근해 간 데에 그의 紀俗樂府 시편들이 있다. 기속악부란 민요를 포함한 민간가요를 흡수하거나 원용하면서 민간의 생활풍속을 노래하는 악부시로서, 조선 후기 한시의 새로운 경향을 반영하는 유형의 하나다. 이에 속하는 작품인<秧歌五章>은 민요를 그대로 한역한 것이며,<金官竹枝詞>는 그가 유배생활을 하던 고장의 풍속과 세세한 일들을 노래하면서 일상적 방언까지 한시로 표현하는 데 힘썼다. 이 밖에<山有花歌>·<前下山歌>·<後下山歌>등의 작품을 통해 이 시기의 한시가 조선 고유의 문화적 전통과 생활정서를 표현하면서 기층 민중의 삶에 밀착하여 간 모습을 여실하게 볼 수 있다.609)李東歡,<朝鮮後期 漢詩에 있어서의 民謠趣向의 擡頭>(≪韓國漢文學硏究≫3·4, 韓國漢文學硏究會, 1979) 참조.

 이학규는 화폐경제가 발달하면서 새로운 세태가 출현하던 사회적 상황을 시로써 예리하게 포착하기도 했다. 그 대표작인<觀市八十韻>은 시장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서, 물건이 풍성한 가운데 떠들썩하고 야단스러운 흥정이 벌어지는 시장의 모습을 실감나게 표현했다. 그런 가운데도 푼전의 이익을 얻으려고 아귀다툼을 벌이는 시정사람들의 생활상을 따뜻한 눈으로 관찰하여, 새로운 시대적 활력에 대한 긍정적인 의식을 보여주었다.

 李鈺(1760년대∼1800년대)은 문체가 稗官·小品類와 흡사하다 해서 벼슬길이 아주 막힌 채 울분을 품고 문학에만 전념하며 어두운 생애를 살았던 인물이다. 이러한 생애를 바탕으로 그는 다수의 주목할 만한 산문저작과 아울러, 시정의 서민·기녀 등을 다룬 시를 썼다.610)金均泰,≪李鈺의 文學理論과 作品世界의 硏究≫(創學社, 1986) 참조. 연작시<俚言>이 특히 주목되는 대표작이다. 이 작품에서 그는 여염집의 여인에서부터 시정의 평민층 아낙네와 기녀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과 처지에 속한 여인들의 모습을 그렸다. 이를 표현하는 시적 수법은 참신하고도 기발하며, 우리말 속어와 구어를 풍부하게 구사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시적 모색은 내용과 형식 양면에서 전통적 한시의 관습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혁신적인 것이었다.

巡邏今散未  순라 도는 일이 하마 지금쯤 끝났을까

郞歸月落時  서방님은 달 떨어질 무렵에야 돌아오는데

先睡必生怒  먼저 자면 영락없이 성을 낼테고

不寐亦有疑  안 자고 있으면 또한 의심할게라.

 

早恨無子久  일찍이는 오래도록 아들 없음을 한탄했더니

無子反善事  이제보니 아들 없는 게 오히려 좋았을 것을

子若渠父肖  아들 녀석이라고 어찌 아비를 꼭 닮아서

殘年又此淚  남은 생애가 또 이 모양으로 눈물뿐이라네.

 

寧爲商賈妻  차라리 장사꾼 아내가 될지언정

莫作蕩子婦  건달의 아낼랑은 되지 마오

夜每何處去  밤이면 밤마다 어디로 나가더니

今朝又使酒  오늘 아침에도 또 술주정이네.

  (李 鈺,≪藝林雜珮≫, 俚諺)

 이처럼 중세적 규범에의 예속으로부터 벗어나, 시정의 세계에 살아가는 여인들의 생활상을 그리는 데 대해 그는 뚜렷한 옹호의 논리를 제시했다. 그는 시가 추구해야 할 최고의 가치를 천지만물과 사람들의 삶에서 우러나오는 情의 진실성에 두었으며, 남녀간의 일이야말로 그 가운데서도 가장 진실하고도 중요한 관심사가 된다고 보았다.

 이처럼 시정의 세태와 서민들의 생활상을 그리는 가운데 민요적인 어법과 소재를 활용함으로써 그의 시 역시 민요의 수용이라는 당대의 새로운 동향을 보여준다. 다만 이옥은 정약용·이학규와 달리 학정과 사회적 모순이라는 현실적 문제보다는 다양한 인물들의 삶을 탐구하면서 禮敎의 규범을 넘어서 감정과 욕구의 진실성을 추구하고자 주력한 데에 독자적인 면모가 있다.

 17세기부터 초기의 군집적 움직임을 보이던 위항시인들은 18·19세기에 와서 더욱 수적으로 증가하여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洪世泰(1653∼1725)가 편찬한≪海東遺珠≫(숙종 38:1712), 高時彦(1671∼1731)과 蔡彭胤(1669∼1731)이 편찬한≪昭代風謠≫(영조 13:1737), 千壽經(?∼1818)이 중심이 되어 편찬한≪風謠續選≫(정조 21:1797) 등이 그러한 흐름 속에서 나온 위항시 선집의 대표적 성과들이다.

 중인층이 중심이 된 위항시인들은 조선조의 신분질서에 예속된 처지에서도 그들의 문학적 욕구를 한시로써 표현했고, 그들 자신을 포함한 낮은 신분층의 사람들이 쓴 한시를 간추려서 보존하고자 했다. 이러한 욕구는 일차적으로 상층문화에 대한 갈망과 접근 의욕의 산물이었으나, 그 밑에 깔린 의식과 창작상의 실천에는 사대부들의 시와 다른 관심 및 변별성이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래의 예에서 보듯이, 그들은 사대부와 위항인들 사이의 신분적 차이를 인정했으나, 시에 관한 한 귀천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는 의식이 뚜렷했다.

與東文選相表裏  (昭代風謠가) 東文選과 더불어 표리를 이루니

一代風雅彬可賞  一代의 風雅가 고루 갖추어져 찬탄할 만하다

貴賤分岐是人爲  귀천의 구분은 사람이 만든 것일 뿐

天假善鳴同一響  하늘이 빌려 준 노래는 같은 소리라네.

   (高時彦,≪昭代風謠≫, 書昭代風謠卷首)

 홍세태의 뒤를 이어 18세기 전·중반의 위항시인으로 활동한 주요 인물로는 고시언, 채팽윤, 鄭來僑(1681∼1757), 李彦瑱(1740∼1766) 등이 있었다. 이들은 사대부문학의 기본이념이었던 載道論을 답습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지닌 성정과 天機의 본원적 진실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특히 정내교는 하층 서민들의 궁핍한 생활상에 대한 관찰과 동정을 작품화하여, 사대부 시인들의 현실주의적 시풍보다 더 핍진한 안목을 보여주었다. 이언진은 탁월한 재능을 가진 시인이었으나 젊은 나이에 병들어 죽으면서 자신의 재능과 신분 사이의 어긋남을 한탄하고 원고를 모두 불태웠다고 한다. 중세적 신분질서의 질곡과 인간의 개체적 생명 및 그 해방이라는 문제는 그만큼 그들의 시세계에 깊이 잠재해 있는 숙제였다.

 18세기 말 이래의 위항시는 더욱 성행하였다. 천수경은 車佐一(1753∼1809), 張混(1759∼1828) 등과 함께 松石園詩社를 결성하여 위항시운동의 절정기를 이루었다. 장혼과 그의 제자들은 七松亭詩社를 결성했고, 朴允黙(1771∼1849) 등은 西園詩社를 통해 시사활동을 전개했다. 이들의 시풍 역시 적지 않은 개인차가 있으나, 사대부층의 한시보다 풍부한 개성적 경향을 추구하는 한편 시적 관심의 다양화와 현실적 확산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올렸다.

 19세기 전기의 사대부 한시에서는 金正喜(1789∼1858), 申緯(1769∼1845)가 시풍을 주도했다. 이들은 모두 시·서·화의 예술적 교양과 감각을 중시했다. 김정희는 시에 있어서의 개성의 표현을 중시하면서도 독서와 고도한 교양에 바탕한 문기를 갖추어야 시의 최고 경지가 이루어진다고 보아, ‘文字香, 書卷氣’를 갖춘 시를 지향했다. 신위는 다수의 시조작품을 한역하는 등 악부체 시에도 관심을 가졌으나, 시풍의 중심은 심원한 의취와 여운을 중시하는 데에 두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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