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2. 미술
  • 1) 회화
  • (1) 회화활동의 확대와 창작태도의 변모

(1) 회화활동의 확대와 창작태도의 변모

 명 말기 서화고동의 수집 붐과 시문·서화·가악의 애호와 산수유람 풍조의 성행 등에 의해 조성되었던 탈속·심미적인 문인취향이 17세기 이래 상품경제 및 도시발달과 고급문화 수요욕구 및 소비층의 증가 등을 매개로 조선과 일본으로 파급되어 이 시기 회화활동의 양적 팽창과 질적 변화를 초래하였다.621)洪善杓,<조선후기의 회화 애호풍조와 鑑評活動>(≪美術史論壇≫5, 1997), 120∼122쪽. 晩明期의 서화 애호풍조가 조선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선조 때부터였으나 보다 확산되는 것은 17세기 전반으로, 회화감평에 탁월했던 李恒福의 문인들인 문사관료들에 의해서였다. 시서화 삼절로 이름난 尹新之와 申翊聖·趙涑을 비롯하여 金尙容과 金尙憲·李廷龜·李明漢·朴彌·朴炡·趙偉韓 등, 詞章 능력으로 입신한 이들 문사관료들이 확산시킨 회화의 애호풍조는 숙종년간을 통해 북악산과 인왕산 아래의 北里 일대에서 복거하던 집권세력인 서인계 문사관료들 사이로 퍼지면서 京華의 새로운 문인문화로 크게 풍미하게 된다. 그 중에서도 金昌協·昌翕 형제의 안동 김씨집안과 혈맥 및 학맥관계를 지녔던 李夏坤과 李秉淵·申靖夏·趙裕壽·趙龜命·趙榮祏을 비롯해 南有容과 金光遂 등은 이 시기의 서화수집과 감평과 같은 애호풍조 유행에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이처럼 회화에 대한 애호풍조는 다음과 같이 말했을 정도로 과열현상을 빚기도 했다.

요즘 사람들은 고서화를 모으는 것을 고상한 취미로 삼아 누가 한 조각의 비단 화폭이라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을 듣기만 하면 반드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구입하여 농을 가득 채우고 대나무상자가 넘치게 하여 보물처럼 자랑하며 수장한다(李廷燮,≪樗村集≫권 4, 題李一源所藏雲間四景帖後).

 18세기 중엽과 후반에 이르르면, 회화 애호취향은 南公轍과 朴趾源·朴齊家 등 노론계 문사관료의 자제와 庶出들의 北學경향과 밀착되어 더욱 심화된다. 남공철은 젊어서부터 書畵癖이 있어 명품을 파는 것을 보면 입고 있던 옷을 벗어서라도 샀고 善本이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반드시 찾아가서 감상하는 적극성을 보였다.622)南公轍,≪金陵集≫권 23, 洪氏寶藏齋畵軸 참조. 특히 그는 자신의 집 건물들을「書畵齋」·「古董書畵閣」·「古董閣」등으로 불렀을 뿐 아니라 서화에 대한 題跋을 따로 묶어 상당량의<書畵跋尾>를 펴냈을 정도로 깊이 탐닉했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그 동안 京華巨族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오던 애호풍조가 박지원 중심으로 활동했던「燕巖그룹」의 서얼출신 문사들 사이로 파급되면서 더욱 고조되었다. 박제가는 친구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밤새워 가며 옛그림 베끼는 즐거움을 어느 것보다 더 크다고 생각했을 만큼 심취했었다.623)朴齊家,≪貞㽔詩集≫권 1, 夜宿薑山十首 참조. 박지원이 당대 최고의 감식가로 손꼽았던 徐常修는 小米點을 사용한 潑墨法에도 능했지만, 좋은 작품을 보면 값의 고하를 불문하고 사들였던 수장가로도 명성이 높았다. 그리고 鄭喆祚·金龍行·李德懋·李漢鎭·成大中 등도 서화에 능했을 뿐 아니라, 자주 모여 그림을 감식하고 품평하면서 자신들이 생각해도 지나칠 정도로 서화에 깊이 빠져 지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서출문사들 사이로 확산된 회화 애호풍조는 역관·의관 등의 기술직 중인과 하급관리인 京衙前과 吏胥輩들에게까지 퍼지면서 그 절정을 이루게 된다. 비양반출신의 이들 중간계층은 詩文에 능하여 여항문인으로도 지칭되는데, 17세기경부터 실무직위를 이용하여 재산을 축적하고 이를 토대로 조선 후·말기의 유흥·호사풍조를 일으키면서 서화창작과 수집 및 감상 등의 애호취미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624)姜明官,<18·19세기 京衙前과 예술활동의 양상>(≪民族史의 展開와 그 문화≫-碧史李佑成敎授停年退職紀念論叢-, 창작과 비평사, 1990), 798∼812쪽. 의관출신인 金光國을 비롯해 이들 계층의 애호취향은 점차 두드러져 정조조 이후로는 이 분야의 중추세력으로 회화활동과 창작성향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625)洪善杓,<19세기 閭巷文人들의 회화활동과 창작성향>(≪美術史論壇≫1, 1995). 한편 중간계층과 상인층으로까지 확산된 서화수장 풍조는 분별없이 수집 자체에 더 목적을 두는 속된 호사취미로도 흘러, 비판을 받은 바 있다.

吏胥들 사는 곳 재상집 같아 圖書와 玩物이 방안에 가득하니 어찌 취미로 풍속을 옮길 수 있으리오 모두가 유행 탓에 풍속을 버렸다(申 緯,≪警修堂集≫ 권 20, 碧蘆舫列藁 雜書).

 그러나 이에 대한 욕구는 여항의 이름 없는 소년한테까지 확산되었을 뿐 아니라, 지방으로도 파급되어 호남의「小胥家」에선 京華를 흉내내어 서화를 방에 벌여 놓고 있을 만큼 널리 퍼지게 되었다.626)馬聖麟,≪安和堂私集≫, 朴生所請橫軸題.
金進洙,≪蓮坡詩鈔≫하, 湖南謠送李子安.
그리고 돈 있고 풍류를 아는 사람이면 먼저 酒色을 배우고 다음으로 서화고동을 모으고 탐닉한다는 속설이 생겼을 정도로 관례화되기도 했다.

 이와 같은 회화 애호풍조는 탈속·심미적 문인취향의 확대 및 확산현상에서 기인된 것으로, 경화사족들의 서재문화 또는 일상적인 생활문화로서 자리잡았을 뿐 아니라 시정문화로의 저변화와 함께 문인주의와 문인의식을 크게 고조시키면서 회화의 창작과 수요에서 그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양적 팽창과 질적 발전을 이룩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서·화 겸비와 회화 수장 등이 사대부들 전유에서 비양반 중서층으로 확산되었는가 하면, 직업화가인 화원들도 여항문인과 같은 의식세계를 통해 창작주체로의 자각을 심화시켜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회화상황과 풍토의 변모에 따라 그림에 대한 높아진 관심과 의식의 성숙과 밀착되어 鑑評활동에서도 괄목할 만한 양상을 보이게 된다.

 17세기 이래 회화 애호풍조의 확산에 따라 그림을 완상하고 감식하고 품평하는 감평활동도 크게 활성화되었다. 특히 시·서·화를 창작하고 향유하는 문인취향과 활동의 일체화 위에서 대부분 작가와 수장가를 겸했던 감평가들의 대두 및 활약과 함께「鑑賞之學」과 같은 전문영역이 형성되었을 뿐 아니라 이론비평과 실제비평에서도 두드러진 진전을 이룩하였다. 그리고 그림과 관련된 문제가 문사들의 보편적인 관심사로 부각되면서 이에 대한 이론적·이념적 서술과 담론이 증대되었으며, 기존의 경향을 반성하고 비판하는 비평의식이 팽배해지게 되었다. 이러한 비평의식은 조선 후기의 회화관과 창작론 등의 회화사상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게 했을 뿐 아니라 주제와 양식의 신격 창출에 역동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 후기의 이와 같은 회화활동의 양적 팽창은 이 시기의 개혁 또는 개량의지와 밀착되어 기존 조류에 대한 반성과 함께 질적인 새로움을 추구하게 되었다. 특히 이 시기의 회화 애호풍조와 감평활동을 선도했던 경화사족들은 詞章家의 성격을 지닌 문사관료들이 주축을 이루었기 때문에 조선 초기 사장파의 회화관 계승과 함께 명 말기의 문예의식 및 비평사조를 수용하여 새로운 견해를 개진하였다.627)洪善杓,<조선후기의 회화창작론>(≪一浪李鍾祥 華甲記念論叢≫, 근간예정) 참조. 종래의 餘技觀에서 탈피하여 그림도 높은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집중적인 노력과 지속적인 탐구가 필수적임이 강조되어, 왕공사대부가 서화분야에서라도 명성을 떨치고 후세에 이름을 남기게 되면 관료로서 입신양명하는 것과 방법은 다르지만 부모의 이름을 빛나게 하는 것은 같다고 하면서 효도로 보기까지 했었다.628)李 健,≪葵窓集≫권 5, 花善二男畵帖書 참조. 그리고 본말론적 관점에서 강조되었던 玩物喪志의 경계적 언술 또한 이 시기를 통해 약화되고 그 대신 세계인식의 토대이며 사물의 이치를 직접 투시·파악하는 觀物論的 측면에서 완물을 중시하는 태도가 대두되었으며, 이와 더불어 天機論이 새롭게 부각되었다. 이와 같은 천기론은 董其昌(1655∼1636)을 비롯한 명 말기 문인들에 의해 정해진 법식을 답습하며 인위적인 기술에 예속된 직인적 직업화가의 그림과 준별되는 남종문인화 창작의 핵심개념으로 떠오른 것이다.629)董其昌,≪畵旨≫, 南北分宗論 참조. 우리 나라에선 북송대 士夫畵論의 수용을 통해 심화되었던 創生的 창작관의 압축된 개념 또는 評語로서 고려 후기경부터 활용되기 시작하여 조선 초기를 거쳐 17세기 이후 증가되었다.630)洪善杓,<朝鮮前期 繪畵의 思想的 基盤>(≪韓國思想史大系≫4,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548∼551쪽. 그러나 조선 후기를 통해 흥기된 천기론은 李夏坤(1677∼1724)이 “무릇 그림은古人을 모방하면 필세가 제한 받아 天機가 발현 못한다”고 했듯이 擬古主義 풍조를 반대하는 비평의식과 결부되어 개진되었다는 데 특징이 있다.

 천기론에 입각한 이러한 反模擬的 입장에서 ‘熟看’과 ‘觀物’ 등에 의해 대상물과의 직접적인 교감을 통해 체득하여 그리는 自得的 창작태도가 중시되었다. 北里의 문인화가 조영석은 화본을 보고 그리는 것은 잘못된 소치이고 ‘卽物寫眞’해야 살아 있는 그림이 된다고 했고, 같은 동네에서 이병연 등과 함께 살면서 시화를 매일 주고 받았던 鄭敾(1676∼1759)도 그릴 뜻이 서면 앞산을 마주 대하고 그림으로써 주름을 나타내고 먹을 쓰는 것이 마음속에서 스스로 직접 터득한 것이었다고 한다.631)洪啓能,<通政大夫敦寧府都正觀我齋趙公行狀>.
趙榮祏,≪觀我齋稿≫권 3, 丘壑帖跋.
이러한 자득적 창작태도에 따라 묘사대상으로 앞에 나타나 있는 실물소재가「眞者」로서 중시되었으며, 특히 천지만물의 오묘한 조화를 빼어나게 갖추고 있고 청정세계의 표상이기도 한 명산대천을 비롯하여 직접 ‘熟看’·‘熟覽’할 수 있는 실물경관인「眞景」이 선호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진경」의 취재는 소재의 현실성 확보 또는 민족적 자아의 각성과 성취란 측면에서의 의미보다 궁극적인 목적은 우주만물의 신묘한 조화와 이치 및 生成化育하는 자연의 창생적 道體를 갖추고 있는「眞境」을 직접 분명하게 나타내기 위해서였다고 본다. 즉 이상적이고 본체적인「진경」구현을 위해 古人(문인화가)들이 이룩한 고전적인 定型景의 추구와 함께 빼어난 실물경관인「眞景」을 매개로 삼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실물과 고전을 통해「眞境」 또는「眞色」 구현을 창작목표로 하는 상보적이고 이원적인 경향에 따라 창작론도 크게 이분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적인 대상물의 정수를 나타낼 경우 ‘以形寫神’ 즉 형상과 닮은 양태를 통해 정신을 옮겨 내는 形似的 傳神論과 고전적 정형경의 경우 자연과 합일·동화되어 그 본체적 영상이 작가의 가슴에 서린 ‘胸中丘壑’을 드러내거나 ‘胸中逸氣’를 통해 외형을 뛰어넘어 적출하는 ‘離形寫神’의 寫意的 傳神論으로 나누어 전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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