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2. 미술
  • 1) 회화
  • (2) 새로운 화법의 수용과 전개

가. 남종화법의 파급

 南宗畵는 문인화가들의 탈속정신과 창생적 창작이념에 기초하여 형성·발전된 산수화의 양식적 계보로, 명 말기의 동기창에 의해 분류되고, 배워야 할 정통화법으로 강조됨에 따라 17세기 이후 동아시아 화단에서 새로운 고전적 위치를 누리며 크게 확산되었다. 이러한 남종화법은 개조로 추앙된 王維에서 명대 중기의 吳派에 이르기까지의 선행양식과, 명말청초 이래 이를「정통」으로 의식하며 재창조된 신흥양식의 형태로 파급되면서 기존의 화풍을 쇄신시켜 나갔다. 그리고 남종화의 전면적인 확산과 더불어 대가들 화법의 정수를 결합하여 나타내는 형식미와 문인화의 순수한 이념미를 추구하는 두 가지 경향을 보이며 전개되기도 했다.

 우리 나라에서 남종화법의 선행양식은 披麻皴이나 米法의 경우, 고려시대의 전칭작이나 조선 초기의 몇 작품에 부분적으로나마 수용된 흔적이 있다.632)安輝濬,<韓國 南宗畵의 變遷>(≪三佛金元龍先生 停年退任記念論叢≫;≪韓國繪畵의 傳統≫, 文藝出版社, 1988, 258∼271쪽). 그러나 보다 종합적인 양태로 소개되는 것은 남종화계보의 저명한 화가들의 작품이 판화의 상태로 수록된 화보류가 전래되던 17세기 초부터가 아닌가 싶다. 특히 黃公望·吳鎭·倪瓚·王蒙 등의 원말 4대가와 沈周·文徵明·文嘉와 같은 명대 오파 및 莫是龍·董其昌의 그림이 실려 있는≪顧氏畵譜≫가 1610년대 무렵 유입되어 남종화법 보급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萬曆畵院에서 활동했던 杭州 화가 顧炳이 편찬하고 그 곳 雙桂堂에서 문인서화가 朱之蕃의 서문을 붙여 1603년 출간했던≪顧氏歷代名公畵譜≫는 선조 41년(1608) 承襲使로 북경에 갔던 李好閔이 숙소로 팔러 온 것을 돈이 없어 구입하지 못하고 寫字에 능했던 역관 李彦華(1556∼1629)에게 청해 그림 없이 글 내용만을 필사해 온 적이 있다.633)李好閔,≪五峯集≫권 8, 畵譜訣跋. 이 때 黃公望의<寫山水訣>도 함께 필사해 왔다. 移模者 李彦華의 인적사항과≪顧氏歷代名公畵譜≫의 글 내용만 옮겨 왔을 것이라는 견해는 崔耕苑,<朝鮮後期 對淸 회화교류와 淸 회화양식의 수용>(弘益大 碩士學位論文, 1996), 70쪽. 이≪고씨역대명공화보≫는 1613년 고병의 아들인 顧三聘에 의해≪고씨화보≫란 이름으로 그대로 중간되는데,634)小林宏光,<中國繪畵史における版畵の意義-『顧氏畵譜』にみる歷代名畵複製をめぐって>,≪美術史≫128, 1990), 134쪽의 주 4 참조. 4책으로 이루어진 이 화보를 여러 명의 국내 문사들이 보고 각 그림에 대한 제화시를 남기기도 했다. 그 중에는 인조 원년(1623) 타계한 柳夢寅(1559∼1623)과 洪命元(1573∼1623) 등이 있어≪고씨화보≫의 유입시기는 1613년에서 1623년 사이였을 것으로 생각된다.635)洪命元,≪海峯集≫권 1, 題顧氏畵譜一百七首.
柳潚이 題한 4권의 古畵帖은≪顧氏畵譜≫로 ‘於于叔父首題’, 즉 柳夢寅이 제일 먼저 제를 쓰고 세월을 격해서 여러 인사들이 읊은 것으로 명기했다(≪醉吃集≫권 1).

 이러한 화보 유입과 함께 원말 4대가의 예찬이나 명대 오파 문징명과 같은 남종화계의 대표적인 문인화가들의 화적이 申翊聖(1588∼1644)과 崔鳴吉(1586∼1647), 李明漢(1595∼1645), 金尙憲(1570∼1652), 許穆(1595∼1682), 崔後亮(1616∼1693), 李萬基(1633∼1687), 李俁(1637∼1693) 등에 의해 수장되거나 완상되었다.636)崔鳴吉,≪遲川集≫권 4, 次文徵明畵帖韻.
李明漢,≪白洲集≫권 16, 東淮所藏上林畵軸小跋.
金尙憲,≪淸陰集≫권 13, 題崔秀才後亮所軸文徵明畵五首.
許 穆,≪記言≫권 29, 朗善公子畵帖序 및 별집 권 10, 衡山三絶帖跋.
金萬基,≪瑞石集≫권 3, 次文衡山仙山圖詩韻.
이 밖에도 인조 14년(1636)에 통신사 종사관을 지낸 당대의 문사인 黃㦿는 문징명이 나이 80에<王會圖>를 모사하는데 파리머리 모양의 蠅頭體로 그렸던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그리고 명말 서화고동 취미의 파급으로 17세기 초부터 불기 시작한 회화 애호풍조의 확산에 따라 ‘富貴之家’와 ‘洛下卿相’들이 연경에서 사들인 역대 명화들 가운데 남종계 화적이 섞여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특히 명대 중기 이후로는 문인화가들의 작품도 애호가들의 수집과 매매의 대상으로 활발하게 소통되었기 때문에 양국간의 사절단 교류나 또 볼모로서 瀋陽에 체류했던 왕족과 문신들을 매개로 국내 유입이 종전보다 손쉬워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이 17세기 초 무렵부터 남종화법이≪고씨화보≫와 문징명 등의 화적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했으나, 17세기 후반경까지는 실제 창작에서 눈에 띄게 활용되지 않았던 것 같다. 이러한 양상은 이 기간을 통해 명대 초·중기의 관학풍으로 확산되었던 浙派화풍이 크게 유행되었던 데 기인하기도 했겠지만, 그보다는 문인화가 본연의 창작이념 및 태도와 계보의식에 기초하여 차별화된 남종화법을 주체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전문성을 띤 문인화가층이 영성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즉 직업화가와 신분적·직능적 차이에서가 아니라, 창작사상과 조형방법에서「정통」이란 뚜렷한 구별의식을 가지고 회화상황을 개혁하고자 했던 문인화가들이 숙종년간(1675∼1720) 이전에는 없었으므로 남종화법의 본격적 수용이 미진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 나라에서 남종화법이 본격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한 것은 창작이념적으로나 조형적으로 문인화가로서의 자의식을 지닌 작가들이 대두한 숙종년간부터로 생각된다. 이러한 새로운 형식의 문인화가로 먼저 尹斗緖(1668∼1715)를 꼽을 수 있다. 李萬敷(1664∼1732)는 그를 영모나 화초 등, 한두 화목에서 ‘偏勝’했던 종래의 문인화가와 달리 인물·산수·금수·초목에서 귀신에 이르도록 ‘博而又精’, 즉 넓고 깊게 통달하여 도학자에서 밑으로 곡예자까지 모두 고루하기 짝이 없어 古에 미치지도 못하는데 홀로 古를 좇아 초절하게 되었다고 했다.637)李萬敷,≪息山集≫권 20, 尹恭齋畵評 참조. 그리고 金克讓은 옛날 우리 나라 그림에는 墨만 있을 뿐 筆이 없어 體格이 거칠고 속된 상태로 수백년 동안 서로 답습하며 고루한 투가 한결같았는데, 윤두서가 나와 그림의 변화를 자기가 직접 터득하여 인물과 산수그림에 법도가 있는 등, 우리 나라 사람들이 古畵를 배우는 것을 안 것은 윤두서로부터 시작되었기에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고 할 만하다고 했으며, 趙龜命(1693∼1737)은 문장에선 김창협·김창흡 형제로부터, 그림에선 윤두서로부터 처음으로 精奧하고 속진을 벗어난 길로 향하게 되어 중국인과 더불어 전후를 다투게 되었다고 했다.638)金克讓,≪海南尹氏文獻≫권 6, 跋恭齋畵帖.
趙龜命,≪東谿集≫권 6, 題柳汝範家藏尹孝彦扇譜帖 참조.
또한 沈도, 위로 올라가면 이른바 명수라고 해도 옹졸하고 거칠어 볼 만한 것이 없었는데 윤두서로부터 차츰 門路를 열어서 속된 것을 떨치고 세련되게 된 것으로 보았다.639)沈 ,≪松泉筆談≫, 東國畵家說 참조.

 이와 같이 윤두서는 종래의 문인화가와는 질적으로 다른 창작태도를 가지고 기존의 회화풍토를 개혁한 작가로 인식되었으며, 이러한 의식세계는 그가 서술한<畵評>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640)이<畵評>의 내용에 대해서는 李泰浩,<恭齋 尹斗緖-그의 繪畵論에 대한 연구>(≪全南地方의 人物史 硏究≫, 全南地域開發協議會, 1983)와 李英淑,<尹斗緖의 繪畵世界>(≪미술사연구≫창간호, 1987) 참조. 이<화평>에서 그는 安堅에서 洪得龜까지 모두 19명의 작가들에 대해 원체화와 문인화의 품격상의 차이점을 부분적으로 의식하며 품평했는가 하면, 趙涑의‘蕭洒超逸’한 풍을 원말 4대가인 倪瓚을 따른 것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의 창작에 대해서는<自評>을 통해 진술했는데, 특히「畵道」로 강조한「識」과「學」·「工」·「才」는 문인화론을 기반으로 심화되어 온 창생적 창작과정을 개념화한 것으로 명말의 반의고주의와 결부하여 중요시했던 김창협의「才·學·識」論과 그의 친구이기도 했던 이하곤의 眞文구현론과 상통된다.641)李相周,<澹軒 李夏坤의 文論>(≪韓國漢文學硏究≫16, 1993), 157∼160쪽. 그 중에서도 “만물의 情과 象을 회통하고 분별하여 삼라만상을 총괄적으로 탐색하는”「識」의 과정은 대상물을 직접 관조하여 체득하는 것을 중시했던 자신의 작화태도를 이론적으로 설명한 것이면서,642)尹斗緖,≪記拙≫ 自評. 당시의 창작풍토를 일신하는 핵심요소로서의 의의를 지닌다고 하겠다.

 윤두서는 이와 같이 명 말기를 통해 새롭게 의식화된 문인화가로서의 작가상과 창작론에 기초하여 말그림과 초상화·풍속화 등에서 신격을 창출했을 뿐 아니라, 문인 주도의「정통」화법으로 부각된 남종화법을≪고씨화보≫와≪唐詩畵譜≫ 등을 통해 습득하고 활용했었다. 산수화에서 그는 예찬식 구도에 의거해 성긴 나무숲 아래의 고적한 띠정자(疎林茅亭)와 강물을 사이에 둔 평담한 먼산을 근·원경으로 구성하는 등, 명말부터 크게 성행한 남종문인 취향의 蕭散한 경색을 새로운 脫俗隱逸景으로 즐겨 다루었고, 또 남종화와 연계된 점묘풍 樹枝法을 다채롭게 구사하였다. 이러한 남종화법을 기존의 남송적이고 절파적인 화풍과 혼용해 쓰기도 했지만, 해남 尹氏家傳古畵帖에 수록되어 있는<樓閣山水圖>와<樹下茅亭圖>를 비롯한 몇 작품에서는 갈필의 간결한 선묘와 준찰과 함께 담박한 느낌의 문기를 풍기는 등, 남종문인화 세계의 심화된 경지를 보여주기도 한다.643)權熹耕,≪恭齋 尹斗緖와 그 一家畵帖≫(효성여대 출판부, 1984), 도판 12·39·44·46·47 참조.

 윤두서에 의해 본격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한 남종화법은 그의 아들 尹德熙(1685∼1766) 및 그와 절친한「鑑覽友」였던 이하곤을 포함한 북리의 문인화가 정선과 조영석 등을 통해 더욱 확산되었다. 이러한 확산에는 명 말기 문인들의 새로운 회화론에 대한 공감과 함께 남종계 화적들의 유입, 그리고≪고씨화보≫와≪당시화보≫·≪十竹齋書畵譜≫·≪十竹齋箋譜≫와 같은 화보류가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그 중에서도 청 초기인 1679년에 초집(山水譜)이 간행된≪芥子園畵傳≫은 남종화를「정통」으로 인식하던 명말청초의 분위기를 배경으로 제작된 것으로, 동아시아의 남종화법 파급에 교재적 구실을 했던 것이다. 특히≪십죽재서화보≫나≪십죽재전보≫의 영향으로 정교한 多色판화로 편찬되었기 때문에, 기존의 묵화적 경향을 새로운 감각의 수묵담채풍으로 전환하는 데도 크게 기여한 것으로 생각된다. 정선이 숙종 45년(1719)에 이하곤 집에서 그린<四時四景圖>첩 4폭은 완연한 남종풍 정형산수화로,≪당시화보≫와 함께≪개자원화전≫도 수용하고 있어 이 화보 활용의 가장 빠른 예를 보여준다.644)金明仙,<芥子園畵傳 初集과 조선 후기 남종산수화>(≪美術史學硏究≫210, 1996), 12∼13쪽.<四時四景圖>는≪謙齋 鄭敾≫:한국의 美 1 (中央日報社, 1983. 개정판), 도판 65∼68 참조.

 정선은 기존의 고루하고 모의적인 창작 폐단을 개혁하기 위해 명말청초의 신문인주의적 경향 등에 민감한 관심을 보이고 있던 김창협·김창흡 형제와 그 인맥들이 세거하던 북리 일대에서 함께 종유하면서 명말의 화보와 청초의 최신판≪개자원화전≫ 등을 통해 남종화법을 습득하고 화풍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그의 이러한 쇄신작업은 이하곤과 조영석도 지적했듯이 남종화계의 가장 대표적인 문인화가 米芾과 황공망·예찬·문징명·동기창의 畵境과 筆意에 토대를 두고 전개되긴 했지만,645)李夏坤,≪頭陀草≫권 14, 題一源所藏鄭敾元伯網川渚圖後;권 15, 鄭元伯敾畵卷.
趙榮祏,≪觀我齋稿≫권 3, 丘壑帖跋.
이를 작가의 심의와 대상물의 특질에 따라 재창출하여 장쾌한 필묵미와 담묵 또는 담채의 은은한 바림에 의해 웅혼하면서 유현한 감흥을 주는 특유의 양식으로 발전시켰다. 그리고 이와 같은 독자적 양식이 이상적 고전경인 정형산수와 이상적 실물경인 진경산수를 통해 창조력을 발휘하면서 일가를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조영석은「南派」와「北派」의 분종과 직업화가풍의「市氣」와 문인화가풍인「書氣」의 차이에 대한 인식을≪개자원화전≫(1권)에 있는 王槩 집록의<靑在堂畵學淺說> 가운데 ‘分宗’과 ‘去俗’에 서술된 내용과 용례를 매개로 개진한 바 있다.646)姜寬植,<朝鮮後期 南宗畵風의 흐름>(≪澗松文華≫39, 1990), 49∼50쪽.
金明仙, 앞의 글, 13쪽.
남종화와 북종화 양파를 李奎象은「儒畵」와「院畵」라 했고, 鄭元容은「王派」·「李派」로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童子牽牛圖>와<高士觀瀑圖>에서는 문징명이 유행시킨 폭이 좁고 긴 長條幅과 함께 피마준을 능란하게 사용했는가 하면,<出帆圖>의 白描風 암벽묘사에선 청초 安徽派 弘仁의 신흥양식을 활용하는 등의 전위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647)姜寬植,<觀我齋 趙榮祏 畵學考>(≪美術資料≫45, 1990), 도판 7·8·11 참조.

 이와 같이 문인화가로서의 자의식에 기반을 두고 숙종년간을 통해 윤두서·정선·조영석 등에 의해 본격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한 남종화법은 다음 세대인 沈師正(1707∼1769)과 姜世晃(1713∼1791), 李麟祥(1710∼1749), 崔北(1712∼1786) 등에 의해 영조년간(1725∼1776)을 통해 전면적으로 확산되었다. 이 기간에는 원말 4대가와 명대 오파의 대표적인 문인화가들의 화의와 필묵법을「眞趣」로서 심득하고 정통 고전으로 재창출하기 위해「倣作」을 의식적으로 추구하면서 남종화법의 선행양식을 스승으로 삼아 자기양식을 변화·심화시켜 나갔으며, 또한 청대 개성파 문인화가들의 신흥양식을 수용하여 다채롭고도 독특한 화풍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남종화법의 진수를 형식미로 구현하는 경향과, 문인화로서의 이념미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뉘어 전개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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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溪居上樂圖
<그림 1>溪居上樂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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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선의 화숙에서 25세 무렵 수묵산수를 배웠던 심사정은≪고씨화보≫와≪십죽재전보≫·≪개자원화전≫ 등의 여러 화보와 대수장가이며 감식가였던 金光遂와 金光國의 소장 화적들을 통해 남종화계 대가들의 古法에서 揚州畵派 高其佩계통의 최신 신흥양식인 指頭法에 이르기까지 진수를 두루 체득하여 일가를 이루었고, 스승과 더불어「謙玄兩齋」로 병칭되고 또 도깨비도 탄복했다는 일화가 전할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특히 그는 오파의 개조였던 沈周를 사숙하여 활달하고 거친 발묵법과 短筆皴과 같은 조방한 화법을 애용했는가 하면,648)金起弘,<玄齋 沈師正의 南宗畵風>(≪澗松文華≫25, 1983), 46∼48쪽. 맑고 은은한 담채풍의 온건한 화경을 즐기기도 했고, 또 바위결이나 석벽 등에서 逸格的이고 장식적인 조형법을 구사하기도 했다. 그리고 남종문인화의 시조인 王維가 항상 사용했다는 ‘披麻間斧劈法’ 즉 피마준에 부벽준을 섞는 법을 수록한≪개자원화전≫의<山石譜>에 근거해<溪居上樂圖>(<그림 1>)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남·북종 혼합의 강렬한 화풍을 수립하고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649)沈師正의 남북종 혼합의 절충화풍과 후대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安輝濬,<朝鮮후기 및 말기의 山水畵>(≪山水畵≫下:韓國의 美 12, 中央日報社, 1982), 206∼208쪽. 강세황도 심사정과 마찬가지로 남종문인화 대가들의 화법에서 청대의 八大山人과 고기패의 참신한 신흥양식을 수용하여 자신의 확고한 회화세계를 구축했었다.650)邊英燮,≪豹菴 姜世晃의 繪畵硏究≫(一志社, 1988) 참조. 그러나 심사정이 남종화의 화법적 진수를 종합하여 탁월한 기량으로 표현하는 형식미 구현에 특장했다면, 강세황은 보다 선비적인 儒畵家의 자세로 순수한 문인화의 치졸기와 이념미 추구에 더 치중하였다. 특히 그는<疎林孤舍圖>(<그림 2>)에서처럼 화첩류의 작은 화면에 예찬식의 疎林荒山을 성글고 거친 필치로 간결하게 묘사하여 자연의 이념적 본질미와 함께 反俗미학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는 업적을 남겼다. 이인상 또한 남종화법을 토대로 이와 같은 순수한 문인화세계의 이념미를 지향하면서 자신의 개성을 발휘했는데, 서예미의 전용과 石濤와 홍인, 양주화파 등 개성파 화가들의 逸格風을 활용하여 질박한 문기와 새로운 감각의 독특한 조형미를 이룩하고 사대부와 여항문인 화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651)兪弘濬,<李麟祥 繪畵의 形成과 變遷>(≪考古美術≫34, 1984).
金起弘,<18세기 朝鮮 文人畵의 新傾向>(≪澗松文華≫42, 1992), 48∼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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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疏林孤舍圖
<그림 2>疏林孤舍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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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와 같이 영조년간을 통해 전면적으로 확산된 남종화법은 시정의 직업화가였던 최북에게 미쳐 賣畵의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최북은 기술직 중인집안 출신으로 그림을 팔아 생활했지만, 시·서·화를 겸비했을 뿐 아니라 극도로 낭만적인 분방한 삶을 살면서 한때 황공망을 사숙하고 화보와 문징명의 ‘맑게 야윈(淸瘦)’ 필법, 심사정풍의 형식을 통해 고담하면서 활기찬 화풍을 보이다가 狂草的인 일격풍에서 참신한 개성을 발휘한 바 있다.652)洪善杓,<崔北의 生涯와 意識世界>(≪미술사연구≫5, 1991), 23∼29쪽. 그리고 남종화법은 金有聲(1725)을 거쳐 정조년간(1777∼1800)의 金應煥(1742∼1789)과 金弘道(1745∼ ), 李寅文(1745∼1821)과 같은 화원화가들에 의해 관학화되었을 뿐 아니라, 뛰어난 기량과 이 시기 특유의 시적 정서와 풍류를 통해 개성화되었다. 이들 화원화가들의 화풍이 심사정류의 형식미 구현을 계승하여 남종문인화적인 필묵미 추구에 치중하면서 말기로 이어졌다면, 尹濟弘(1764∼ ), 申緯(1769∼1845), 金正喜(1786∼1856) 등의 사대부문인화가와 李維新·李在寬·趙熙龍·田琦·劉在韶·金秀哲 등의 여항문인화가들은 주로 강세황·이인상처럼 문인화의 본질적인 이념미와 일격풍의 독특한 조형미를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寫意的 傳神」또는「주관적 寫意」라는 외형과 범속을 초월한 사물의 정신과 문기가 지배하는 작가의 심의를 본체적 眞形의 이미지로 나타내고자 하는 창작론과 결부되어 전개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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