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2. 미술
  • 1) 회화
  • (4) 풍속화의 확대와 발전

(4) 풍속화의 확대와 발전

 조선 후기의 풍속화는 사·농·공·상 사민들의 생활모습, 즉「東國風俗」을 田野風俗과 城市·市井風俗, 관아풍속과 세시풍속 등의 장면에 담아 나타낸 것으로, 17세기 말경의 숙종년간부터는 주로「俗畵」로 불렸으며,「風俗畵」와「俚俗圖」로 지칭되기도 했다. 이러한 풍속화는 유교적 민본주의에 의한 정교적·위민적인 無逸정신에 의해 조선 초기부터 궁중 歲畵로도 제작된「無逸圖」와「豳風圖」·「耕織圖」·「農家十二月圖」와 같은 전야풍속도계열의 감계적 효용물을 비롯해, 신도읍지 한양의 도시적 위용과 번화상을 그린 성시풍속류와 왕실 및 관아의 각종 행사장면을 담은 관아풍속도들과「踏靑圖」등의 세시풍속계열로 전개되어 왔다.692)安輝濬 감수,≪風俗畵≫:한국의 미 19 (중앙일보사, 1985) 所收의 安輝濬,<韓國風俗畵의 發達>과 洪善杓,<朝鮮後期 風俗畵發達의 理念的 背景>참조. 그리고 이와 같은 전통적 기반 위에 17세기 이래로 명대 말기의 패관소품과 함께 유행했던 ‘市井俚民’의 일상적인 세속생활상을 그리는 풍조가 파급되고 이 시기의 새로운 시대조류를 비롯한 서화 애호취미와 창작이념, 조형의식 및 신화법과 결부되어 새롭게 성행·발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의 풍속화는 청나라사신들 요구에 의해 ‘我國 養蠶織造圖와 耕種收穫圖’가 국가적 繪事로 그려지는 한편, 윤두서와 그 아들인 윤덕희와 손자 윤용의 문인화가 일가에 의해 역시 전야풍속도계열의 향촌의 즐거운 생활과 부지런한 생업 모습을 小景人物畵의 구도로 나타내는 등, 전통적인 맥락에서 전개되기 시작했다.693)≪承政院日記≫549책, 경종 3년 1월 16일(秦弘燮 編,≪韓國美術史料集成≫4, 一志社, 1996, 402쪽;尹斗緖 풍속화의 산수인물계 분류는 鄭炳模,≪朝鮮時代 後半期 風俗畵의 硏究≫, 東國大 博士學位論文, 1991, 65∼71쪽). 윤두서에 의해 대두된 이러한 주제와 구성법은 남종화법이 좀더 가미되면서 金斗樑과 심사정 등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한정된 영역에서 벗어나「동국풍속」의 제반 時俗相을「草書法」의 간결하면서도 정확한 신감각의 담채소묘풍으로 나타내면서 조선 후기 풍속화를 새로운 방향으로 개척한 인물은 조영석이었다. “工人物及風俗畵”란 평을 받았던 그는 농민들이 새참을 먹고, 농가에서 아낙네가 절구질하는 전야풍속 장면뿐 아니라, 문사들의 장기두기와 서재에서의 담소를 비롯해 말징박기와 선반작업, 미장이, 통 만드는 장인, 그리고 조기장수와 시중에 팔 땔나무를 실은 말을 모는 전립 쓴 사람 등, 사·농·공·상 사민들의 시정세속사를 전반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이 밖에도 바느질과 다듬이질과 같은 女俗이라든가, 이를 잡는 승려와 행려승 등의 僧俗과 소 젖짜기와 마굿간 작두질 등 다양한 내용을 소재로 삼았다. 이처럼 조영석이 다방면의 풍속화를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했고, 이들 작품이 후대에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것에 대해서는 그가 남긴「동국풍속」그림 70여 점을 수집해 모사한 화첩을 보고 許佖과 柳得恭 등이 평을 했던 사실로도 파악할 수 있다.694)李德懋,≪靑莊館全書≫권 52, 耳目口心書 5 有人輯摹趙觀我齋榮祏所畵東國風俗凡七十餘帖 참조.

 이와 같이 조영석이 풍속화 영역을 확대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그림이 교화와 나라의 쓰임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공리적 입장과 글로 설명하고 형용할 수 없는 시각매체로서의 기능을 강조했던 자신의 회화관이 배경을 이룬 것으로 생각되며, 특히 그가 濟用監과 司僕寺·典牲署와 같은 물자와 마필·목축 등과 관련된 부서에 봉직했었기 때문에 이러한 소관업무에서의 효용적 체험성이 작용했을 가능성도 추측된다.695)洪善杓,<관아재고와 사제첩의 가치>(≪전통문화≫148, 1985), 134∼136쪽. 그리고 그가 명대의 仇英이 卞凉의 번창한 도시적 정경을 모사한<淸明上河圖>를 치밀하게 관찰한 것으로 보아,696)趙榮祏,≪觀我齋稿≫권 3, 淸明上河圖跋 참조. 성시·시정풍속에도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영석의 풍속화는「卽物寫眞」을 중시했던 자신의 자득적 창작태도에 따라 주로 실물을 직접 對看模寫했기 때문에<바느질>(<그림 10>)에서 볼 수 있듯이, 유탄으로 밑그림을 그리고 먹선으로 요체를 나타낸 소묘풍의 略畵이지만 생생한 현실감을 자아낸다. 특히 서민 모습의 소박한 표현은 근대 朴壽根 그림의 서민상과 유사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697)安輝濬, 앞의 글(1985), 176쪽. 구도에서는 소경인물화의 樹下式과 새로운 경향의 무배경식을 이용했는데, 후자의 경우도 인물 중심의 짜임새 있는 구성으로 삽화나 초본이 아닌 회화로서의 격조를 띠고 있으며, 김홍도 작으로 널리 알려진≪풍속화첩≫으로 계승된다. 그리고 그는 운치 있는 문사들의 눈 속 방문을 그린<雪中訪友圖>에서처럼 세밀한 필묵으로 격식을 갖춘 작품을 남기기도 했는데, 이러한 화풍은 강희언의≪士人三景帖≫ 세 그림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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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0>바느질
<그림 10>바느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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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술직 중인출신의 여항문인화가였던 강희언은 인물의 묘사 양태와 수지법 등에서 조영석의 영향과 함께, 음영법과 近大遠小의 단축원근법 등을 활용하여 좀더 시각적 이미지에 가깝게 표현한 풍속화를 통해 현장감까지 구체적으로 전하는 진전을 이룩했다. 특히 그의 사인풍속도들은 중인을 비롯한 비양반층까지 가세하여 붐을 일으켰던 시·서·화 등 당시의 遊藝的 문인취향의 현장과 그 형상을 생생하게 담고 있어 역사적 시대물로서의 가치를 지니기도 한다.≪사인삼경첩≫에 수록되어 있는<揮毫圖>(<그림 11>)는 화첩과 족자와 횡축을 각각 펴고 작품제작에 몰두하고 있는 작화장면을 그린 것으로, 생동하는 인물들의 정확한 묘사와 함께 서정적인 풍취가 화면에 넘친다. 정조 원년(1777) 무렵 중부동에 있던 강희언 집에서 수시로 김홍도·김응환·신한평·이인문과 같은 圖畵署의 일급화원들이 모여 공사간의 주문화에 응대하면 여항문인 馬聖麟을 비롯한 애호가들이 일년 내내 드나들며 감평을 했다고 하는데,698)馬聖麟,≪安和堂私集≫, 平生優樂總錄 丁酉. 이 그림은 아마도 이러한 미술문화의 발흥상을 담은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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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1>揮毫圖
<그림 11>揮毫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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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후기의 새로운 시대적인 세태 또는 人情物態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풍속화의 새 경향은 서화 애호풍조의 확산과 창작 및 향유 성향의 변화 등에 따라 여항문인을 비롯하여 부유한 비양반층까지 가세한 애호가들의 후원을 받으면서 화원화가들에 의해 정조년간을 통해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김홍도의 정조 2년 작인<行旅風俗圖> 병풍도 강희언 집에서 제작되었던 것이고, 또 정조 14년경에 성립된 姜彛天의<漢京詞>에는 廣通橋다리 기둥에 그림을 걸어 놓고 파는데 가장 많은 것이 최근 도화서 高手들 작품으로 많이들 俗畵를 탐닉하여 묘하기가 살아 있는 것 같다고 했다.699)방현아,<강이천과 漢京詞>(≪민족문학사연구≫5, 1994), 209쪽. 이러한 풍속화의 유행은 지방으로까지 파급되었던 듯, 18세기 후반 이래 대대로 무반을 지낸 求禮五美洞의 柳氏집 雲鳥樓 큰사랑채 벽이 김홍도풍의 풍속도로 장식되어 있었다고 한다.700)求禮郡,≪求禮 雲鳥樓≫(1988), 219쪽. 그리고 무엇보다도 풍속화는 정조 7년 奎章閣 差備待令 화원의 祿取才 畵科로 설정되어 순조년간(1801∼1834)까지 지속됨으로써 이 분야 발달에 크게 기여하였다.701)姜寬植,<朝鮮後期 奎章閣의 差備待令畵員制>(≪澗松文華≫47, 1994), 66∼69쪽. 특히 이 녹취재「俗畵」科에서 중국풍속화와 동국풍속화가 함께 취급되었던 사실로 미루어 보아≪詩經≫ ‘國風’의 ‘豳風’에 ‘朝鮮風’을 첨가하여 고금의 조화를 꾀하고자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아무튼 18세기 말엽의 정조대부터 풍속화는 공적·사적 수요의 확대로 전과 비교할 수 없는 성황을 이루었다.

 풍속화에서의 공적 수요는 영조도 위민과 정교의 뜻으로 사·농·공·상 사민들의 맡은 소임 또는 재능을 四民月令類 그림으로 圖繪한 바 있고,702)崔完秀,≪謙齋 鄭敾 眞景山水畵≫(汎友社, 1993), 325쪽. 또 규장각 화원의 녹취재 試題로 미루어 볼 때 이 분야 본연의 감계와 태평성세를 선양하기 위한 용도로 제작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비해 민간에서의 사적 수요는 당시 패관소품류의 성행과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세간에서 완상되던 풍속화도 공적인 그림과 마찬가지로 기존의 전야풍속도와 한양의 활기찬 도성의 번창과 상업적 발달상을 다룬 성시풍속류가 대종을 이루었다. 그러나 공적 풍속화로는 잘 제작되지 않았던 도시적 행락과 유흥의 각태를 묘사한 시정풍속도가 세간의 수요로 이 무렵부터 대두되어 적지 않게 그려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정풍속류는 기술직 중인을 비롯한 아전서리배와 시전상인들의 경제적 부를 토대로 크게 조성된 소비와 향락풍조를 배경으로 전개되었으며, 도시 유흥과 관련된 투전·연희 등의 ‘俚俗之事’와 기방과 기녀 및 여색을 소재로 한 작품에서 남녀간의 정념과 성애장면을 노골적으로 묘사한 성풍속도로까지 발전하게 된다.703)洪善杓,<조선후기 性風俗圖의 사회성과 예술성>(≪月刊美術≫, 1994) 참조.

 이 시기의 풍속화는 정조의 각별한 사랑과 문사관료 및 여항부호들의 후원을 받으며 크게 활약했던 김홍도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는 이미 20대 초반에 당대 최고의 풍속화가로 손꼽혔으며, 당시 감평의 일인자였던 강세황은 그를 우리 나라 400년 만의 破天荒的 솜씨로 풍속에 더욱 뛰어나 한번 붓이 떨어지면 손뼉을 치며 신기하다고 부르짖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절륜하다고 했다.704)馬聖麟,≪安和堂私集≫참조.
姜世晃,≪豹菴遺稿≫권 4, 檀園記又一本 참조.
그는 각 계층사람들의 일상사의 모든 것과 생업의 장면, 세시풍속과 통과의례 광경, 그리고 시정의 유희나 잡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소재를 풍류적인 정감과 흥취가 넘치는 모습으로 탁월하게 형상화하는 혁혁한 예술적 업적을 남겼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행려풍속도>와<평생도>와 같은 병풍류의 큰 화면에서는 佩文齋耕織圖의 구도에 강희언이 진전시킨 사실적 경향과 낭만적 풍취를 더욱 정밀하고 재치있게 구사하였다. 화첩류의 작은 화면에서는 조영석이 전형화시켰던 소경인물도와 무배경의 구도를 좀더 짜임새 있게 운영하면서 특유의 개성을 발휘했다. 특히 호암미술관 소장의<負商圖>와 개인 소장의<涉牛圖>를 비롯한 소경인물식 구도의 작품들은 그가 50대를 통해 완성시킨 단원법의 독창적인 필묵법에 의해 배경산수를 진경화풍으로 처리하여 서정적 정취와 남종문인화의 격조를 융합시킨 새로운 사경풍속도의 영역을 개척했었다. 그리고<舞童圖>(<그림 12>) 등이 수록되어 있는≪풍속화첩≫은 대부분 무배경의 구도로서, 투박하면서도 생명력 있는 필선을 사용하여 소탈한 인물상의 풍부하고 익살스런 표정과 흥겨운 생활감정 및 구수하고 정감 넘치는 삶의 생생한 정경을 요점적으로 재미있고 감칠맛 나도록 묘사한 특징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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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2>舞童圖
<그림 12>舞童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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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홍도의 이러한 병풍류와 화첩류 풍속화풍은 화원화가들의 정형을 이루면서 金得臣과 申潤福을 비롯하여 金良驥와 金厚臣·劉淑 등으로 계승되었고, 민화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 중에서도 김득신은 김홍도의 화풍을 토대로 풍속화가로서 크게 활약했다. 특히 화첩류의<破寂圖>(<그림 13>)에선 김홍도의 후기양식인 소경인물식에 기반을 두면서도 등장인물과 동물의 심리 묘사와 상황의 극적 처리에서 갈등하는 시대상을 풍자하는 현실의식을 엿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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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3>破寂圖
<그림 13>破寂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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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때 御容畵師로 발탁되었으나, 왕실납품의 冊架圖를 잘 못 그려 도화서에서 퇴출당하고 귀양까지 간 申漢枰의 아들이었던 신윤복은 아버지의 풍속화와 김홍도 화풍의 영향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면서도 소재와 구성방식, 인물화법·설채법 등에서 독창성을 발휘하고 이 시기 풍속화의 새로운 조류를 보여주었다. 간송미술관 소장의≪傳神畵帖≫(<그림 14·15>)에 전형적으로 나타나 있듯이 당시 유흥향락문화를 주도했던 아전서리층의 왈자패들을 중심으로 기방과 기녀를 둘러싸고 전개되는 호색적이고 질탕한 정경을 주로 묘사하였다. 이러한 선정적 경향은 호색한이나 기생뿐 아니라, 시정의 俗態와 여속에도 노골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변화된 시속을 실감케 한다. 그의 이와 같은 작품들은 명말과 청대 염정소설의 삽화나 일본 에도시대 浮世繪와 상통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어 구성법이나 인물상 등에서 상호간의 연관성을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신윤복의 풍속화는 섬세하고 유연한 필묵법과 곱고 화사한 청홍색의 대비효과와 등장인물들의 풍부한 표정을 통해 핍진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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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4>月下情人圖
<그림 14>月下情人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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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5>酒店擧杯圖
<그림 15>酒店擧杯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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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용되어 있어 조선 후기 사람들의 낭만적인 시정생활과 멋스러움을 예술적 감동과 더불어 가장 실감나게 보여준다. 이와 같은 신윤복의 풍속화세계는 순조년간 이래 고전적 문인주의와 사의적 전신 또는 주관적 사의론의 팽배에 따른 이 방면의 전반적인 퇴조 속에서 劉運弘과 유숙 등의 화원화가와 춘화류의 성풍속도로 이어졌다. 그리고 1930년대 일제 강점기의 민족문화운동의 조류를 타고「동양화」1세대인 李用雨에 의해 복원되기도 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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