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2. 미술
  • 2) 서예
  • (2) 금석학과 전예의 진흥

(2) 금석학과 전예의 진흥

 청대에는 經史의 실증적 연구를 중시하는 고증학이 일어나면서 그 학문적 기초로서 금석학이 진전되었고 이에 따라 금석문자의 연원과 변천에 대한 연구가 성행하였다. 더욱이 이전에 볼 수 없었던 고대의 문자자료가 점차 발견됨에 따라 고대문자가 지닌 서예적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17세기 이래 금석탁본의 수집 등으로 기초를 다져온 조선의 금석학은 이러한 청대금석학의 연구성과를 수용하기 시작하였다. 그 중 金光遂(1699∼1770)는 청나라 학자 林本裕·林价부자와 친교를 맺어 중국의 금석탁본을 다수 기증받는 등 청의 금석학계와 교류하기 시작했고, 金在魯(1682∼1759)는 고려·조선의 금석탁본을 수집하여 방대한 양의≪金石錄≫(246책)을 편찬하였으며, 홍양호는 고비에 대한 탁월한 고증을 남기는 등 조선의 금석학을 본격적인 궤도로 끌어올렸다. 홍양호 외에도 兪拓基(1691∼1767)·成大中(1732∼1812) 등이 금석학에 깊은 관심을 두었으며, 李德懋(1741∼1793)·柳得恭(1748∼?)·朴齊家(1750∼1815)·朴南壽(1758∼1787)·남공철 등의 북학파 인물들이 청의 금석학을 국내에 전파하는 등 금석학연구를 활발히 진행하였다.

 이러한 조선금석학의 진전에 따라 고대의 금석문자인 전예에 대한 연구 분위기가 성숙되기에 이르러 유척기·이광사·宋文欽(1710∼1752)·尹東暹(1710∼?)·이인상·李胤永(1714∼1759)·조윤형·李漢鎭(1735∼?)·金斗烈(1735∼?)·이덕무·李肇源(1758∼1832)·兪漢芝(1760∼1834)·申綽(1760∼1828) 등 전예를 전공하는 서예가들이 다수 나오게 되었다. 그 중 이광사는 石鼓文과 禮器碑·受禪碑를 전예의 준칙으로 삼을 것을 주장하여 당시로는 진보적인 면모를 보였으며(<사진 7>), 凌壺館 李麟祥(1710∼1760)은 당풍의 전예를 터득한 서예가로 유명하였다(<사진 8>). 炯菴 李德懋는 전서를 바탕으로 逼古한 서풍을 이루었으며 綺園 兪漢芝는 한예의 필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당대 최고의 명필로 평가받았다(<사진 9>).

 이러한 금석학과 전예의 진흥은 서예계에 변화의 조짐을 일으켰는데, 이 무렵 청에서 일기 시작한 碑學의 서예가 김정희에 의해 국내에 소개되면서 조선 후기의 서예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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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7>五言律詩
<사진 7>五言律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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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8>篆 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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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9>臨漢碑
<사진 9>臨漢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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