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2. 미술
  • 2) 서예
  • (3) 추사체의 출현과 유행

(3) 추사체의 출현과 유행

 청에서는 금석학의 발전과 함께 금석문자의 서예적 가치가 제고되면서 刻石·碑版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碑學이 발흥되었다. 이미 옹방강과 같은 학자들에 의한 금석학연구가 서예와 금석의 밀접한 관계를 인식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비학의 발생시기는 대략≪四庫全書≫의 편찬(1773∼1782)으로 청대고증학이 일차 정리되는 건륭 말년이었는데, 이후 가경년간을 거쳐 道光年間(1820∼1850)에 이르러 비학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비학에 대한 견해는 학자마다 달라서 옹방강 쪽에서는 碑帖兼修를 주장하였고 鄧石如(1743∼1805) 쪽에서는 帖學을 부정하고 碑學絶對를 주장하였다. 이에 阮元(1764∼1849)이 南北書派論과 北碑南帖論을 발표하여 비학절대론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자 청의 서예계는 비학 위주로 급변하였고 이에 입각한 이상적 서법을 창안하려는 많은 시도가 이루어졌다.721)崔完秀,<碑派書考>(≪澗松文華≫27, 1984), 41∼56쪽.
이 시기의 淸代 서예에 대해서는 韓國民族美術硏究所 編,≪澗松文華≫8, 書藝 Ⅲ 中國(1975);≪澗松文華≫27, 書藝 Ⅵ 淸(1984) 참조.

 秋史 金正喜(1786∼1856)는 일찍이 북학의 대가였던 박제가로부터 훈도를 받으며 성장하였고, 24살 때에는 부친 金魯敬(1766∼1840)의 청국사행에 자제군관으로 동행하여 그 곳의 새로운 문물에 접하였다. 燕京에 머무는 동안 그는 대학자인 옹방강과 장년학자 완원과 사제의 인연을 맺고 많은 문사·서화가들과 교유하여 학문적 시야를 넓혔다. 이후 그는 학문적 심도를 더해가면서 서화·금석고증 등에서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는데, 특히 그가 종래의 조선글씨가 지니는 한계를 지적한 것이나 북한산 碑峰에 있는 비가 신라 진흥왕의 巡狩碑임을 고증한 것은 대표적인 예이다. 그는 법첩으로 전하는 역대의 필적이 오랜 세월 동안 傳摹를 거듭하여 원형을 잃었음에 반해 秦漢시대 이래의 비문서체는 건립 당시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또한 서법의 준칙으로 믿어 왔던 왕희지체가 八分隷書에 근원하였으므로 이를 학습하라고 주장하였다.722)김정희의 서예에 관한 글은 다음과 같다.
金正喜 著·崔完秀 譯,≪秋史集≫(玄岩社, 1976).
知識産業社 編,≪秋史名品帖≫(1976).
崔完秀 編,≪秋史精華≫(知識産業社, 1983).
任昌淳 責任監修,≪秋史 金正喜≫:韓國의 美 17(中央日報社, 1985).
예술의전당,≪秋史 金正喜 名作展≫(1992).
藤塚隣 著·藤塚明直 編,≪淸朝文化東傳の硏究≫(東京;國書刊行會, 1975).
崔完秀,<金秋史의 金石學>(≪澗松文華≫3, 1972), 41∼55쪽.
―――,<秋史書派考>(≪澗松文華≫19, 1980), 41∼60쪽.
―――,<秋史實紀>(≪澗松文華≫30, 1986), 59∼94쪽.
―――,<秋史墨緣記>(≪澗松文華≫48, 1995), 49∼79쪽.
崔筍垞,≪秋史 金正喜의 書畵≫(圓光大 出版局, 1994).

 그리하여 漢隷를 널리 학습하여 古樸險勁한 필획과 독특한 짜임을 가미한 특유의 예서풍을 보여 秋史體의 백미를 이루었는데, 이는 일찍이 청의 비학파 서예가들이 이루지 못한 탁월한 경지였다. 또한 해서에서는 구양순·저수량·안진경체를 혼융한 자가풍을 이루었으며, 행서에서는 옹방강의 행서를 따르다가 후년에는 강경한 骨法으로 개성적 서풍을 이루었다(<사진 10·11>). 그는 당시 서예의 학문적 수준을 끌어올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또한 ‘文字香 書卷氣’를 지론으로 한 그의 서화관은 당대나 후대 서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반면 그가 당시의 서화계에서 지배적 위치를 점유함에 따라 다양한 서풍의 발전을 제약하는 역기능이 초래되기도 하였다. 여하튼 추사체가 많은 사람들에 의해 추종되자 이를 흡사히 써내는 서예가들이 다수 출현하였다. 그러나 그의 필법정신을 제대로 얻은 사람은 드물었는데 이는 추사체가 학문연구를 바탕으로 역대 서예의 정수를 소화해 낸 이상적 경지의 글씨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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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0>黙笑居士自讚(부분)
<사진 10>黙笑居士自讚(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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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1>隷書對聯
<사진 11>隷書對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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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희와 관련하여 거론되는 인물로서 우선 평양에서 활약한 訥人 曺匡振(1772∼1840)을 들 수 있다. 그는 원교체를 따르다가 늦게서야 안진경의 진수를 깊이 얻었는데 篆隷金石氣가 있었다고 하며, 고법의 임모에도 뛰어나 행초는 劉墉을 指隷는 張道渥과 비슷하였다고 한다. 그의 글씨는 신위와 김정희로부터 높게 평가받았는데, 특히 변화있는 짜임의 독특한 예서는 추사체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김정희와 시서화로 교유하였던 인물로 신위·權敦仁·金逌根(1785∼1840) 등이 있는데, 그 중 가장 친밀했던 彛齋 權敦仁(1783∼1859)이 김정희와 매우 흡사한 서풍을 구사하였던 반면, 신위와 김유근은 주로 동기창이나 옹방강의 글씨를 수용하는 보수적 성향을 보였다(<사진 12>). 김정희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서예가로는 趙熙龍·이상적·方羲鏞·許維·申櫶·李昰應·田琦 등의 후배나 제자, 그리고 아우 金命喜(1788∼?)·金相喜(1794∼?), 손자 金商佑(1817∼?)·金商懋(1819∼?) 및 인척 閔台鎬(1834∼1884)·閔奎鎬(1836∼187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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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2>論 書
<사진 12>論 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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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중 又峰 趙熙龍(1797∼1859)은 추사체를 따랐으나 寫蘭이 畵法一路에 그쳐 書卷氣가 없다는 김정희의 평을 들었고, 藕船 李尙迪(1804∼1865)은 역관으로서 청조학계와 김정희의 연계 역할을 하였는데 서풍은 주로 동기창체를 수용했으며, 蘭石 方羲鏞(1805∼?)은 김정희의 금석학으로부터 영향받아 漢隷碑 25종을 모사하여≪隷源津逮≫(5권)를 저술하였다고 한다. 또한 小癡 許維(1809∼1892)는 김정희의 화법을 따른 제자로 추사체를 추종하였고, 威堂 申櫶(1810∼1892)은 예서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였으며, 石坡 李昰應(1820∼1898)은 추사체를 방불하게 구사했으며 墨蘭에도 뛰어나 김정희로부터 동방 제일의 평을 들었다(<사진 13>). 이 밖에 古藍 田琦(1825∼1854)는 30세에 요절한 애제자로서 예서에 매우 뛰어났으며 행서는 동기창체와 추사체를 구사하였다. 아우 김명희·김상희도 추사체를 방불하게 구사하였는데, 김명희는 순조 22년(1822) 부친 김노경을 따라 자제군관으로 연행하여 청의 금석학자 劉喜海(1794∼1852)와 교류하여 유희해가≪海東金石苑≫을 저술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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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3> 行書對聯
<사진 13> 行書對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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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밖에 추사체가 유행하던 시기에도 李鍾愚(1801∼?)·李南軾(1803∼1878)·李裕元(1814∼1888) 등 전예에 뛰어난 서예가들이 다수 활약하였으며, 秦鍾煥(1803∼?)·曺錫輿(1813∼?)·曺錫元(1817∼?)·박문회 등 18세기 이래의 조선서풍을 이어가는 서예가들도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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