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2. 미술
  • 3) 조각
  • (1) 홍성기의 조각

가. 효종∼숙종기(1636년경∼1725년경)

 조선 중기에 정착되기 시작한 조선적 조각양식은 흥성기에 확립되었다.726)文明大,<조선 전기 조각의 양식적 특징>(≪세종시대의 미술≫,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86). 이 시기의 작품에는 조형의 평면성, 방형의 구성미, 비사실적 친근미 등 조선적 조각양식이 거의 모든 조각에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식이 잘 나타나 있는 최초의 명문불상은 작은 목제의 佛龕불상이다.

 인조 15년(1637) 화원, 賢元이 만든 아미타삼존불감(동국대 소장)의 삼존상이다.727)文明大,<朝鮮朝 木阿彌陀佛龕의 한 고찰>(≪考古美術≫146·147, 1980). 이 불상의 특징은 평판적이면서도 단아한 모습으로 사각형적인 넙적한 얼굴, 작은 눈과 입 등은 평판적인 특징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또한 양감을 느낄 수 없이 일률적인 두께이어서 얼굴의 평판적인 특징의 연장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평판성은 생동감을 현저히 감퇴시키는 요체이지만 그러나 얼굴에 나타난 미소는 부처의 격을 고양시켜 주고 있다. 이와 함께 이 삼존불의 형태는 단정한 모습을 하고 있어 자유분방함이나 생동감을 찾아볼 수 없다. 이 점은 어깨나 무릎, 손 등에서 보이듯이 인체적인 자연스러운 양감이 아니라 둥근 감만 지나치게 강조한 점에서도 더욱 그렇게 보이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이보다 7년 후에 비슷하게 만들어진 英賢이 조성한 목아미타삼존불감의 아미타삼존불상(인조 22:1644)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관음과 지장보살을 협시로 한 이 불감의 삼존불상은 불감의 구성이나 불상의 형식 그리고 형식적 특징까지도 거의 현원의 삼존상과 흡사한 것이다. 다만 현원의 불상보다 평판성은 오히려 줄어들고 단아한 형태미와 자연적인 양감이 보다 강조되어 한결 뛰어난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전자의 불상과 흡사한 평판적이고 단아한 특징을 나타내고 있으며 특히 중생들과 친근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시기부터 나무로 된 목불감이 크게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기년명이 있는 목불감 이외에도 이 시기에 조성되었다고 생각되는 많은 불감들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아마도 방에서나 이동할 때 예배용으로 사용했거나 작은 願堂에 봉안되어 돈독하게 신앙되었다고 생각된다.728)文明大,<朝鮮의 彫刻>(≪韓國美術史의 現況≫, 예경, 1992), 220∼226쪽.

 無量寺 소조아미타삼존불상의 계통을 이어받은 큼직한 불상은 인조 25년 조성된 龍興寺 목아미타불좌상(높이 120㎝)이다(<사진 1>). 큼직하고 박력있는 얼굴, 넓고 탄탄한 체구, 크고 높은 하체, 두꺼운 불의와 더불어 얼굴은 방형이지만 양감이 남아 있고 체구의 평판적인 형태미는 앞서의 두 불상과도 상통하지만 거의 조선 후기 불상의 전형적인 양식에 근접하고 있는 것 같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須彌壇式 거대한 불단의 등장을 분명히 볼 수 있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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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용흥사 목아미타불좌상
<사진 1>용흥사 목아미타불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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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기 불상에서 독특한 것은 거대하고 웅장한 불단 위에 삼존불·삼세불·삼신불이나 각종 불보살상을 봉안하는 불상 봉안방식의 변혁이다. 고려 이전에는 한 대좌 위에 한 불상을 봉안하던 방식이 주류를 이루었다. 고려 말 내지 조선 초기부터는 일부 경향으로 鳳停寺 극락전에서 보다시피 단독이지만 큼직한 불단(후기의 수미단식 거대한 불단의 선행형식으로 생각되는 새로운 불단)이 등장하여 어느 정도 유행하였다. 그러다가 조선조 전반기 말 내지 후반기 초경에 거대한 불단이 등장하며 모든 불군상을 봉안하고, 목패나 공양구인 화병 등도 배치하는 이른바 密壇的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런 거대한 불단형식은 조선 후기의 보편적 형식이며 대대적으로 유행하였다.

 인조 26년(1648)에는 삼세불상이 조성된다. 우리 나라에서 남단인 淨水寺(지금의 玉蓮寺) 목삼세불상인데 약사불일 가능성이 있는 이른바 석가불로 강진 옥련사에 이안되어 있는데(<사진 2>), 이 불상의 복장에서 인조 26년에 조성되었다는 조성기가 발견되어 편년이 확인된 것이다. 이 불상은 정수사에 있는 본존 석가불보다는 훨씬 작지만 양식은 그런 대로 잘 알 수 있다. 가는 눈과 납작하고 짧은 코 등의 표현으로 다소 날카로운 면을 보여주지만 그런 대로 순박한 면을 나타내고 있다. 체구는 방형이 기본적이지만 어깨는 둥근 맛이 있고 결가부좌한 무릎도 양감이 듬직하게 느껴져 아직도 앞선 시대의 특징이 그대로 보여지고 있다. 이런 점은 목걸이의 화려한 영락장식과 통견의 菩薩衣가 완전한 두께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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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옥련사 목아미타불좌상
<사진 2>옥련사 목아미타불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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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종 2년(1651)에 조성된 옥천 龍巖寺의 목아미타불상(높이 90㎝)도 앞의 불상과 상통하고 있다. 얼굴은 둥글게 보이지만 부피감이 없고 가늘고 날카로운 눈, 짧고 납작한 코, 작은 입의 표현으로 냉정한 표정을 나타낸다. 체구는 기본적으로 방형이지만 어깨나 무릎 등은 역시 둥근 맛이 돌며, 가슴이나 배 등도 완전히 평판적이지는 않다. 옷은 상당히 두꺼워졌으며 내의의 상단은 수평적이고 옷주름은 단순하다. 말하자면 방형적이고 평면적인 불상으로 이행되기 직전의 작품인 것이다.

 같은 해 8월 19일에 조성된 신흥사의 목아미타삼존불 역시 거의 비슷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사진 3>). 높다란 수미단 위에 안치된 이 삼존불은 본존아미타불상과 좌우관음·세지보살로서 상당히 우람한 편이며, 그래서 당대를 대표할 만한 작품으로 손색이 없을 것 같다. 본존아미타불은 앞에 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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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신흥사 목아미타삼존불
<사진 3>신흥사 목아미타삼존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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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상과 마찬가지로 육계가 불분명하며 평판적인 방형의 얼굴, 특이하게 오뚝한 코, 가늘고 작은 눈과 입, 건장하면서 평판적인 체구, 넓게 벌린 결가부좌의 하체, 일정한 두께를 가진 통견의와 평행선과 간략한 층선의 의습선 등은 당대의 불상양식을 잘 보여주는 것이며, 거구의 목좌불로서도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좌우의 협시보살들도 본질적으로 본존불과 흡사한 특징인데 보관이 너무 장식적이라든가 다소 작은 체구 등이 다를 뿐이다. 불상 밑바닥에 ‘順治辛卯八月 日畵員無染’이라는 묵서명이 있고 관음보살의 복장 속에도 ‘順治八年八月十九日畵員無染’이라는 조성기가 있어서 효종 2년 無染畵師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上院寺 문수보살상도 현종 2년에 조성되었는데 이런 경향을 잘 보여주고 있다(<사진 4>). 용암사불상의 얼굴과 비슷하게 침잠하면서도 적정한 표정인데, 얼굴이 다소 길어졌고, 이마가 보다 넓고, 코가 오린 듯이 오뚝하여 다소 다른 분위기를 보여준다. 가슴은 평판적이며 배는 다소 볼록하고 결가부좌한 다리는 낮은 편이다. 두께있는 통견의 옷, 裙衣 상단의 독특한 접힘, 간략한 옷주름 등도 앞의 불상과 비슷한 편이다. 번잡하고 화려한 보관을 쓰고 두 손으로 연꽃가지를 든 모습은 문수보살상으로서는 독특한 모습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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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4>상원사 목문수보살상
<사진 4>상원사 목문수보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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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양식은 상주 南長寺의 관음전에 안치된 塑觀音菩薩坐像에도 반영되고 있다. 현종 9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觀音殿重創記, 康熙七年戊申春…初創) 이 관음상은 거대한 화관을 쓰고 있는데 이 당시의 보관형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얼굴은 방형이지만 꽤 세련된 모습인데 가늘고 긴 눈, 오뚝한 코, 작은 입 등과 조화되어 당대 보살상의 수작으로 생각된다. 신체 역시 둥근 어깨, 자연스러운 가슴, 결가부좌한 단정한 하체 등 단아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통견한 옷은 단정하면서도 간결하며 왼팔의 Ω자 주름, 배의 띠매듭, 가슴과 무릎의 영락장식 등은 조선 전반기의 특징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인데, 圓覺寺 목보살상(인조 27:1649)과 비슷하지만 보다 단아한 편이다.

 남장사와 대칭되는 北長寺도 유사한 양식의 삼존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남장사관음상보다 8년 뒤인 숙종 2년(1676)에 조성된 이 아미타삼존불상은 당대 불상의 특징을 여러모로 보여주고 있는 중요한 작품이다. 불단 위에 본존아미타불과 좌우관음·세지보살을 배치한 이 아미타삼존상은 상당히 큼직한 편이면서 꽤 정제된 삼존불이다. 육계가 불분명한 타원형 머리와 촘촘한 육계, 이 위에 독특한 頂上髻珠가 볼록 솟아 있고 중앙계주는 작은 편이다. 얼굴은 갸름하지만 평판적이고, 가는 눈, 작은 입과 긴 귀, 볼록 솟은 코의 표현으로 적정하면서도 안온한 인상을 나타내고 있다. 다소 긴 장방형의 상체는 어깨를 움츠리게 나타내었지만 가슴은 밋밋한 편이며, 결가부좌한 하체는 넓고 큰 편이다. 즉 방형적이고 평판적이지만 아직도 둥근 양감 등은 살아 있으며, 안온한 인상도 보이고 있어서 당대 불상의 수작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통견한 법의는 두꺼운 편이며, 간결한 옷주름과 형식적인 주름처리 등으로 불상양식이 일치되고 있다.

 좌우의 관음과 대세지보살상은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높고 화려한 화관, 방형의 평판적 얼굴, 가는 눈, 작은 입, 오뚝한 코의 이목구비 등은 본존과 흡사하며, 방형의 상체와 넓은 하체, 그리고 두껍고 간결한 주름 등은 모두 본존과 흡사한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보관에 화불표현이 없고 두 손으로 긴 연꽃가지를 잡고 있는 수인 때문에 관음과 대세지보살의 특징을 알아낼 수 없지만 본존의 수인이 특색 있는 아미타불의 下品中生印을 짓고 있어서 좌우협시보살의 명칭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하품중생인은 통상의 수인과는 약간 달리 오른손을 올려, 이른바 施無畏印形을 짓지 않고 오른손을 무릎 위에 살짝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댄 변형의 하품중생인을 표현하고 있다. 좀더 무릎 아래로 대면 降魔觸地印으로 오인되기 쉽지만 이런 형식의 수인도 가끔 보인다.

 龍門寺의 아미타목각탱과 아미타삼존불상은 숙종 10년에 조성된 이 시기 조각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사진 5>). 당시 우리 나라의 조각사상 새로운 기법의 기발하고 특이한 조각이 창출되고 있었다. 이른바 木刻幀으로 조각에 탱화형식의 기법을 응용함으로써 새로운 바람을 몰고 왔다. 이것은 조각과 회화를 복합시킨 새로운 기법인데, 이런 기법의 불상을 목각탱이라 불렀던 것이다. 용문사 목각탱의 아래쪽에 붙인 이 조성기 말미의 ‘康熙二十三甲子季’에서 숙종 10년(1648)에 조성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현존하는 목각탱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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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5>용문사 목각후불탱과 삼존불상
<사진 5>용문사 목각후불탱과 삼존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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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각탱의 기본구도는 상하가 긴 장방형의 거대한 조각군상인데 좌우로 구름광선을 묘사한 능형의 조각을 첨가시켜 장엄하게 보이도록 했다. 목각탱의 중심에는 정교한 키형 광배 속에 결가부좌한 아미타본존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넙적한 얼굴에 가늘고 긴 눈, 꽉 다문 입을 나타내어 조선조적인 불안을 확립하고 있다. 머리모양은 팽이형인데 육계표현이 거의 없고, 정상과 중앙에 각각 계주가 새겨져 있다. 어깨는 약간 움츠러들게 처리했지만 앉아 있는 모습은 사각형의 체구와 큼직한 좌세 등으로 다소 중후한 인상을 준다.

 두 손은 무릎 위에 올려 놓았는데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어 위로 놓았고(上掌), 오른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어 아래로 놓은 하품중생인의 변형수인을 짓고 있다. 오른손의 손가락을 유별나게 높여 맞대지 않으면 항마촉지인으로 오인하게 할 수 있는 수인이다. 아마도 오른손을 높이 든 시무외인은 조성하기가 꽤 어렵기 때문에 오른손을 무릎 위로 내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앞에서 언급한 현원의 아미타불감의 본존상이나 북장사아미타본존상의 수인 등 여러 예가 있다. 통견의 佛衣 또한 두껍고 간략한 도식적 옷주름선 등으로 조선조 불의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본존불 이외의 협시상들은 사천왕·8대보살·제자들인데 이들을 상·중·하 3단으로 배치시키고 있다. 하단은 대좌 좌우로 2왕씩 사천왕을 배치하였고, 중단에는 4보살, 상단에는 4보살과 2제자를 좌우로 배치하였다. 2제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입상이며 방형적이며 투박하고 평판적인 특징을 보여주고 있지만, 나무로 거대하고 복잡하게 조각한 솜씨는 당시로서는 결코 범상하지 않은 뛰어난 목각이라 할 수 있다.

 목각탱 전면의 불단 위에 목삼존아미타불상이 놓여 있다. 목각탱의 불보살상과 모든 점에서 일치하기 때문에 같은 작가에 의해서 동시에 조성된 삼존상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좀더 둥글게 처리하였고 좀더 생동감이 나며, 오른손을 들어 시무외인 형태를 짓고 있는 점 등은 한결 정성을 들여 제작한 작품으로 보아 좋을 것 같다.

 숙종 20년에 제작된 남장사목각탱도 용문사목각탱과 동일한 목각탱인데 다소 축소되었으면서 덜 장식적이지만 보다 깔끔한 것이 특징이다(<사진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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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6>남장사 목각탱
<사진 6>남장사 목각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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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에 있는 광배도 형태는 키형으로 비슷하지만 남장사의 광배가 덜 장식적이다. 본존상도 활짝 핀 연꽃 위에 높이 솟은 대좌에 결가부좌로 앉아 있는데 육계가 거의 무시된 낮은 머리형, 각지고 방형적이며 평판적인 체구, 두꺼워진 불의와 간략한 옷주름 등은 서로 유사하지만, 이 불상은 얼굴이 다소 갸름하며, 좀더 각지고 방형적이며 보다 단정한 형태가 다소 다른 점이다.

 모든 협시상들은 본존보다 작게 조각했는데 사천왕상 이외의 보살상들은 좌상들이다. 형태는 모두 본존과 흡사하게 연약하고 단정한 모습이며 보다 깔끔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이런 목각탱들은 이 시기에 꽤 많이 조성되었으리라 생각되지만 경북 북부지역인 예천과 상주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목각탱들을 조성하고 있어서 퍽이나 흥미롭다.

 용문사목각탱과 남장사목각탱 사이인 숙종 15년(1689) 地藏三尊木佛龕이 조성되었는데 이 삼존상의 특징은 당시에 목불감이 성행했다는 사실을 잘 알려주고 있다(<사진 7>). 조성기에 “조상공덕이 헤아릴 수 없어 금속과 돌, 나무와 흙으로 모두 불상을 조성한다”면서 “地藏·道明·無毒의 3상을 조성하여 한 藏 속에 함께 봉안한다”는 내용에서 보다시피 지장·도명·무독의 3상을 목감에 안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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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7>지장삼존목불감
<사진 7>지장삼존목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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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실은 다른 예와 마찬가지로 포탄형이며 3부분으로 분리된 것을 연결한 목감이다. 본존은 별도로 된 것을 끼워 넣은 것인데 줄무늬가 있는 仰伏蓮臺座 위에 결가부좌로 단아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다. 삭발한 머리칼, 다소 평판적인 얼굴, 그러면서도 양감있는 안면의 미소, 방형적인 단정한 얼굴, 좁아진 무릎, 통견의 두께있는 불의, 배에 늘어진 독특한 U형의 착의법 등에서 17세기 말 내지 18세기 초 양식의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으며 얼굴의 丸美나 미소 등은 당대의 수작으로 평가된다.

 왼쪽 협시상은 道明尊者인데 서 있는 입상은 합장한 단정한 모습이나 망토같은 뻣뻣한 옷자락과 간략한 옷주름 등에서 형식적인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얼굴은 생기에 찬 동자승 모습이어서 본존불과 유사한 면을 나타내고 있다. 무독귀왕상도 도명존자와 흡사한 모습의 입상이며 높다란 관만 다를 뿐이다. 이런 일련의 생기차고 환미있는 얼굴과 단정한 모습은 숙종 27년의 강진 白蓮寺의 삼세불에 계승되었다. 육계가 약화된 머리, 환미있는 단아한 얼굴, 방형적이면서 단정한 신체 등은 비슷한 특징이며, 다만 본존석가불의 촉지인한 오른팔이 통견의에서 삐어진 듯 나와 어색하게 보인다든가, 넓고 얕은 결가부좌의 하체 등에서 다소 다른 면을 묘사하고 있다.

 이 석가·약사·아미타의 삼불상은 영조 49년(1773)에 조성된 삼불후불탱화와는 달리 다른 절에서 이안한 것으로 1700년경 불상의 특징을 잘 표현하고 있다. 물론 법화 천태종의 고찰과 잘 어울리는 삼불상이어서 이 절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729)文明大,<昆盧遮那三身佛圖像의 形式과 祗林寺 三身佛 및 佛畵의 연구>(≪佛敎美術≫15, 1998), 77∼100쪽.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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