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2. 미술
  • 5) 건축
  • (6) 주택건축

(6) 주택건축

 751)朱南哲,<서울의 古住宅>(≪文化財≫6, 문화재관리국, 1974).
―――,≪韓國住宅建築≫(一志社, 1980).
―――,<임진왜란과 주택건축의 변화>(≪韓國建築史叢書≫Ⅱ, 한국문화재보호진흥협회, 1992).
후기에 건립된 주택건축은 초기와 중기를 거치면서 이루어진 배치와 평면, 구조 등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었으나, 고종 31년(1894) 갑오경장을 맞아 사실상 신분제가 타파됨으로써 초기에 제정되었던 가사규제가 유명무실하게 되어 부를 축적한 사람들로서 커다란 집과 솟을대문 등을 건립할 수 있었다. 한편 개항과 더불어 서양식건축이 도입되어 주택건축에 변화가 일기 시작하였으며 서양식·일본식건축의 주택들이 지어지기 시작하였다.

 주택건축은 일반 백성의 집인 서민주택, 중인계급과 이교계급의 중류주택, 양반사대부의 상류주택으로 편의상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 서민주택은 우리 나라의 기후풍토에 따라 각 지역마다 서로 다른 모습을 이루고 있다. 추운 함경도지방은 이른바 田자형 평면으로 부엌과 정지방이 붙고 이 두 공간 사이는 단지 바닥의 고저 차이만 있을 뿐 사잇벽이 없다. 정지방 위쪽으로는 네 개의 온돌방들이 서로 벽을 중간에 두고 붙어 있어 열손실을 최소화하고 있는 것과 마루가 깔리지 않은 것이 특성이다. 평안도지방은 一자형의 평면으로 부엌·안방·윗방이 일렬로 늘어서고 마루가 가설되지 않는다. 중부지방은 ㄱ자형으로 부엌·안방이 일렬로 남향하고 ㄱ자로 꺾인 곳에 대청마루와 건넌방이 만들어진다. 다음 서울지방형은 같은 ㄱ자형이나, 부엌·안방이 세로로 동서향을 이루며, ㄱ자로 꺾인 곳에 대청마루와 건넌방이 온다. 남부지방은 一자형으로 부엌·안방·대청마루·건넌방이 일렬로 늘어선다. 제주지방형은 중앙에 대청마루인 상방이 오고 이 상방의 서쪽으로 정지(부엌)와 작은구들이, 동쪽으로 큰구들과 고팡(庫房)이 온다. 특히 정지의 솥 거는 불아궁이가 방과 반대편에 만들어져 취사 때 불길이 방에 들지 않도록 하는 것이 기후적인 영향이다. 서민주택의 구조는 기단은 토단이고 때로 기단의 가장자리를 막돌로 마감한다. 초석은 덤벙주초로 기둥 밑을 그랭이질하여 초석면에 맞춘다. 기둥은 직경 12cm 정도 되는 둥근기둥을 쓰거나, 또는 12cm 폭 되는 네모기둥을 세운다. 서울의 서민주택에서 네모기둥을 쓸 때가 많은데 이 때 초석은 네모뿔대의 다듬은 초석을 쓴다. 가구는 3량과 4량가구이며, 처마는 홑처마로 초가지붕이 일반적이다. 부유한 서민으로 기와지붕을 이는 때도 있는데 대부분 맞배지붕이고 팔작지붕은 드물며, 이는 순조년간 이후의 건축에서 볼 수 있다. 지방 산간의 서민주택 중에는 귀틀집·너와집·굴피집 등이 건립된다. 귀틀집은 화전민들이 많이 지었는데 통나무를 우물정자 모양으로 쌓아 벽체를 만들어 이 벽체 위에 지붕틀을 얹어 두꺼운 널조각(너와라 함)들을 얹어 지붕을 이룬다. 이 때 이러한 집을 너와집이라 하고, 지붕을 참나무껍질을 폭 약 12cm 정도, 길이 120cm 정도 되게 만들어 덮울 때 이를 굴피집이라 한다.

 중인계급의 주택은 양반계급의 주택과 흡사하고, 이교의 주택은 서민계급의 주택과 흡사하다. 무교동의 신씨가는 1820년대 건축으로 줄행랑채의 남쪽 단에 위치한 대문으로 들어서면 행랑마당이 된다. 이 마당에서 서쪽에 있는 담장의 일각대문을 들어서면 사랑마당이 되고, 북쪽 중문간의 중문을 들어서서 마주하는 내외벽을 돌아 들면 안마당에 이른다. 사랑채는 ㄱ자형 평면으로 침방·사랑방·대청·건넌방으로 구성되고, 사랑채 남서쪽에 서고와 광이 자리잡고 있다. 안채는 H형으로 부엌·안방·윗방이 일렬로 동서로 면하며, 안방에서 ㄱ자로 꺾이어 대청마루가 있고 이의 옆에 중간에 작은 대청을 두고 앞뒤로 방들을 두었다. 이러한 안채의 평면은 같은 지역 중인주택인 백씨집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부엌 뒷마당에는 일자형의 별채가 있는데 이 중 한 칸은 사당칸이고, 나머지 두 칸은 마루방이다. 남성용인 外厠은 사랑마당 구석에 여성용의 內厠은 안채 동쪽 줄행랑 중간에 자리잡고 있다. 이 주택에서 특기할 것은 대문이 솟을대문으로 되어 있으나, 본래 평대문이었던 것을 1900년대 솟을대문으로 고친 것으로 이는 신분제 타파 후의 변화인 것이다(<도면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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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면 10>무교동 신씨가
<도면 10>무교동 신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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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대부의 주택으로 대표적인 실례는 창덕궁 후원 안에 자리잡은 演慶堂이다. 이 주택은 순조 28년(1828) 세자의 청으로 당시 민간의 주생활을 궁중에서 알기 위하여 사대부집을 표본으로 궁궐내에 지은 이른바 아흔 아홉 칸 집이다. 아흔 아홉 칸 집은≪경국대전≫에서 대군가 60칸으로 상한선을 그었었으나, 이를 위반하고 더 크게 짓는 사례들이 많아 아흔 아홉 칸까지 비공식적으로 허용한 까닭에 큰 저택을 아흔 아홉 칸 집이라 칭하게 되었던 것이다. 연경당은 그간 일부 변형되었으나 東闕圖形에 의하여 복원함으로써 본래의 모습을 알 수 있다. 큰 느티나무가 서 있는 행랑 바깥마당으로 접근하면 동쪽에 方池가 있고, 서쪽에 도랑이 흐른다. 작은 돌다리를 건너면 장락문이라 이름하는 솟을대문에 이르고 이 문을 들어서면 행랑마당이 된다. 행랑마당은 바깥행랑채와 중문간행랑채로 구성되는데, 바깥행랑채에는 외측·마굿간·가마고·행랑방·헛간 등이 자리잡고 있다. 중문간행랑채의 동쪽에 있는 작은 솟을대문으로 된 중문을 통하여 사랑마당에 들어서고, 서쪽 평대문으로 된 중문을 통하여는 안채에 이른다. 이는 남존여비사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사랑채는 사랑방·침방·대청·누마루로 구성되어 안채와 붙어 있으나, 사랑마당과 안마당 사이에 담장을 설치하여 두 공간을 남성적인 공간과 여성적인 공간으로 구획하고 있다. 사랑채의 동쪽에는 방과 대청으로 구성된 서고인 선향재가 자리잡고 있는데 이는 서책을 보관하고, 독서하며, 또 귀한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이다. 선향재의 동쪽 높은 언덕 위에는 정자 농수정이 자리잡고 있으며, 중문간행랑채의 동쪽에는 청지기방이 자리잡고 있다. 안채는 누다락·안방·대청·건넌방이 ㄱ자형으로 구성되었는데, 특히 이 연경당은 대가를 표본으로 한 만큼 부엌간이 안방에 붙어 있지 않고 안채 뒤 따로 쌓은 담장 속에 별채로서 자리잡고 있으며, 이것이 곧 飯婢間이다. 반빗간은 차집·반빗아치들이 음식장만, 빨래손질 등 집안의 잡일을 하는 곳으로 대가에서 따로 짓는 것이다. 안채를 둘러싼 중문간행랑채에는 女婢들이 거처하고, 이와 연이어진 온돌방들과 마루들은 이 집안의 여식들이 기거하는 공간이다. 내측은 집 바깥 서쪽 터에 있다. 구조는 단층 팔작기와집인데, 사랑채는 굴도리집이고, 안채는 납도리집이며, 가구는 5량가구이다. 뜰의 담 모퉁이에는

 정심수가 심어져 있는데 정심수를 마당 가운데 심으면 그 모양이 곤할 ‘困’字가 되므로 이를 피하여 모퉁이에 심는 것이다. 또 마당에 방지를 팔 수 없어 석련지를 놓아 연을 키우며, 담밑에 괴석을 담은 석함들을 늘어놓고, 기단 아래는 노둣돌을 놓아 말이나 가마를 탈 때 또 내릴 때 딛도록 한다. 정심수 앞에는 작은 석상도 하나 놓았다. 선향재 뒷동산의 경사면은 석단을 축조하여 花階를 이루어 꽃을 심고, 주변에 철 따라 수형이 변화하는 활엽수들을 심는다. 이는 사계가 분명하여 자연에 순응하려는 조형의식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주택이 일반 종가집과 다른 점은 사당이 건립되지 않은 것이다(<도면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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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면 11>연경당 평면도
<도면 11>연경당 평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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