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 음악
  • 1) 궁중음악의 변천과 새 경향
  • (2) 아악의 명맥과 종묘제례악

(2) 아악의 명맥과 종묘제례악

 장악원의 악생들이 관장했던 아악의 전통은 영조조에 이르는 동안 역사적 변천과정을 거치지 않을 수 없었다. 성종 때 399명이었던 악생의 수가 영조 때에는 204명이나 감소된 195명에 불과했기 때문에 악현의 축소는 불가피 했고, 이에 따르는 아악의 역사적 변천은 필수적이었다.

 병자호란 이후 인조 21년(1643) 제례아악에 참여했던 악생의 수는 헌가에 22명이었고 등가에 20명이었다. 헌가의 악생 22명은 성종 때≪악학궤범≫의 124명보다 102명이나 감소된 숫자였고, 등가의 악생 20명은 성종 때의 62명보다 42명이나 감소된 숫자였다.758)≪增補文獻備考≫권 105, 樂考 16 樂人.
≪樂學軌範≫권 2, 雅樂陳設圖說 登歌·時用軒架(이혜구 역,≪국역악학궤범≫, 권 1, 민족문화추진회, 1979, 80∼83쪽).
이렇게 감소된 악생의 숫자가 정조(1776∼1800) 때에도 크게 변하지 않고 거의 그대로 전승됐다. 성종 때 악생의 숫자와 비교할 때, 정조 때 등가의 악생은 40명이 감소된 22명이었고 헌가의 악생은 102명이나 감소된 22명이었다.759)宋芳松,≪韓國音樂通史≫(一潮閣, 1984), 381쪽. 이처럼 감소된 악현을 조선 초기의 것과 비교해 볼 때, 그것은 조선 중기 이래 후기에 이르러서도 여전한 아악의 하향세를 입증해 주는 결정적인 증거의 하나이다.

 종묘제례악은 임진왜란 때 종묘가 불타버렸으므로 선조 41년(1608) 다시 중건될 때까지 10여 년간 중단됐고, 병자호란 이후 10년 동안 정지됐다가 인조 25년에 복설됐다. 양대 전란으로 인하여 중단됐던 종묘제례악은 역사적 변천과정을 거쳐야만 했고, 그런 변천은 등가악현과 헌가악현의 축소에서 확인된다.

 인조 21년 종묘의 등가악현은 악생 20명이었고 헌가악현은 22명이었으나, 그 이후에는 등가악생이 22명이었고 헌가악생은 24명으로 약간 증원됐다.760)≪增補文獻備考≫권 105, 樂考 16 樂人. 등가의 악생 22명은 성종 때의 37명보다 15명이나 감소된 숫자이며, 헌가의 24명은 성종 때의 71명보다 47명이나 감소된 숫자였다. 한편 정조 때 종묘의 등가악현은 악생 22명이었고 헌가악현은 20명이었는데, 등가의 22명은 성종 때보다 15명이나 감소된 숫자였고 헌가의 20명은 51명이나 감소된 숫자였다.761)柳義養,≪春官通考≫권 8, 吉禮, 宗廟 軒歌·登歌.
이혜구 역,≪국역악학궤범≫권 1, 88∼89쪽의 *표 각주와 표 2 참조.

 양란 이후 축소된 등가악현에서는 특종·특경·지·화·대쟁·월금·해금이 사라졌고, 헌가악현에서는 지·관·화·우·퉁소·거문고·가얏고·향비파·월금·교방고가 연주되지 않았다. 특종·특경·지·화·우 같은 아악기가 종묘악현에서 사라진 것은 악기편성이 이론보다는 실제적인 경향으로 흘렀음을 입증해 주는 중요한 단서이다. 다시 말해서 악생의 감소 때 실제 연주에서 필요불가결한 악기가 아닌 것은 제외시켰다. 거문고·가얏고·향비파·월금·대쟁·해금 같은 현악기의 제거는 종묘제례악이 관현합주의 악기편성에서 관악기 위주의 편성으로 변천됐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이렇게 관악기 위주로 달라진 악기편성은 조선 후기 종묘제례악의 역사적 변천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인조 4년 선조대왕의 光國重興의 위업을 기리기 위하여 종묘의 선조실에 重光악장을 새로 만들어 사용하였다.762)李惠求,<李朝後期의 音樂>(≪韓國藝術總覽:槪觀篇≫, 예술원, 1964), 285쪽.
李惠求 공저,≪國樂史≫(한국국악학회, 1965), 51쪽.
새로 창제된 중광장을 保太平의 貞明장 다음에 삽입시켰고, 이에 따라 정명장은 앞의 龍光장과 합쳐서 용광정명장이라고 개칭됐다. 그 결과 보태평의 11곡은 熙文·基命·歸仁·亨嘉·輯寧·隆化·顯美·龍光貞明·重光·大猶·繹成으로 구성되는 변천과정을 거쳤다. 영조 41년(1765) 새로 만든 악장을 더 이상 보태평 11곡과 定大業 11곡에 추가하지 못하도록 결정함에 따라서 인조 이후 현재까지 종묘악장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순조 29년(1829)에 중수된≪俗樂源譜≫에 의하면, 권 1의 정대업과 보태평은 16井間譜와 五音略譜로 기보됐고, 권 6의 16정간보와 律字譜로 기보됐다.≪속악원보≫권 1의 종묘제례악은 각 음의 時價가 다르지만, 권 6의 종묘제례악은 규칙적인 等時價의 음들로 기보됐으므로, 권 1의 종묘제례악이 권 6의 것보다도 오래된 악보로 추정됐다.763)李惠求,<韓國의 音樂>(≪한국사≫23, 국사편찬위원회, 1977), 417∼419쪽. 왜냐하면 세종(1418∼1450) 때 창제된 정대업과 보태평은 각 음들이 불규칙했었지만, 조선 후기의 종묘제례악은 중국의 아악처럼 규칙적인 등시가의 음으로 변천되는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이렇듯 종묘제례악의 아악식 변천도 조선 후기에 이르면서 생긴 하나의 특징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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