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 음악
  • 1) 궁중음악의 변천과 새 경향
  • (3) 향악·당악 및 궁중정재의 새 경향

(3) 향악·당악 및 궁중정재의 새 경향

 장악원의 우방 소속 악공에 의해서 연주됐던 향악과 당악이 조선 후기에 이르러 아악의 경우처럼 하향 추세를 보인 것은 불가피한 시대적 대세였다. 앞의<표 1>에 의하면, 영조 때의 악공은 성종 때의 572명에 비해서 126명이 감소된 446명이었음을 상기할 때, 악공들의 활동이 악생에 비해서 활발했고 따라서 향악과 당악이 아악보다 많이 연주됐음이 분명하다. 조선 후기의 향악과 당악은 조선 초·중기 이래 鄕樂呈才와 唐樂呈才의 반주음악으로 사용되면서 맹맥을 유지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鄕唐交奏의 출현은 정재의 반주음악에 나타난 특징 중의 하나로 꼽힌다. 향악기와 당악기의 혼합편성으로 향악과 당악을 교대로 연주하는 새로운 연주형태의 향당교주가 조선 초·중기에 비해서 조선 후기의 정재반주 때 많이 사용됐는데 그 향당교주가 당악의 향악화를 입증하는 중요한 단서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로 이르는 동안에 나타난 향악의 변천은 다음의 세 가지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로 조선 초기까지 연주됐었던 고려 향악곡들이 사라진 사실에서, 둘째로는 악기편성에서, 셋째로는 향악정재의 唱詞에서 향악의 변천이 각각 발견된다. 먼저 첫째로 선초≪時用鄕樂譜≫에 전하는 靑山別曲·西京別曲·雙花店·風入松·紫霞洞 및 선조 5년(1572)의≪琴合字譜≫에 전하는 鄭石歌·翰林別曲·思母曲 같은 고려의 향악곡들이 양란 이후의 고악보에서 사라졌다. 둘째, 조선 후기에 이르러 향당교주가 정재의 반주음악에서 보편화되자, 향악기의 악기편성이 따로 없어지게 됐다. 순조 29년 明政殿의 進饌 때 정재의 반주음악을 위한 향당교주의 악기편성은 笳·피리·젓대·唐笛·洞簫·비파·奚琴·方響·장고·笙·거문고·가얏고·牙箏·敎坊鼓 등 향악기와 당악기의 혼합으로 이루어졌다.764)≪進宴儀軌≫己丑 권 3. 이 글에서는 國立國樂院이≪韓國音樂學資料叢書≫3(1980)으로 펴낸 영인본을 참조하였다. 셋째, 향악정재에서 노래로 불린 한글의 창사가 한문으로 바뀐 사실에서 향악의 변천이 확인된다. 이 세 가지 사실이 조선 후기 향악의 역사적 변천을 입증해 주는 결정적인 단서들이므로 음악사적 관점에서 중요시되어 마땅하다.

 당악도 향악의 경우처럼 조선 후기에 이르는 동안에 역사적 변천과정을 거쳤다. 다시 말해서 水龍吟·太平年·夏雲峰·金殿樂과 같은 宋詞계통의 당악곡, 五雲開瑞朝·折花·會八仙 등과 같은 당악정재의 반주음악, 그리고 與民樂令·與民樂慢·靖東方曲처럼 선초에 창제된 당악곡들이 모두 전승되지 않았다. 오직 조선 후기에 전승된 洛陽春과 步虛子만이 현재까지 국립국악원에서 연주되는 송사계통의 당악곡이다. 당악의 향악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증거가 정재의 반주음악에 나오는 향당교주인데, 향당교주의 등장은 조선 후기 당악의 역사적 변천을 입증하는 중요한 단서의 하나이다.

 조선 초·중기에 향악화된 보허자가 두 갈래로 발전했는데, 하나는 黃河淸 또는 步虛詞로 알려진 현악보허자이고, 다른 하나는 長春不老之曲이라는 雅名의 관악보허자이다. 현악보허자는 민간풍류방에서 널리 연주되면서 많은 변주곡이 파생됐으나, 관악보허자는 주로 궁중에서 연주됐을 뿐이다.765)李惠求, 앞의 글(1977), 420∼428쪽.≪대악후보≫의 현악보허자는≪韓琴新譜≫(경종 4:1724)에서는 이미 기악화됐으며, 현행 관악보허자의 모체는≪속악원보≫에 전한다.766)李惠求, 위의 글, 424쪽.

 조선 초·중기에 비해서 조선 후기의 呈才는 두 가지 면에서 특징적인데, 첫째는 새로운 정재가 순조 때 많이 창제됐다는 사실이고, 둘째는 당악정재와 향악정재의 구분이 희미해졌다는 사실이다. 정재의 역사적 변천을 음악사에서 중요시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정재의 반주음악 때문이다.

 순조의 아들 익종은 부왕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궁중잔치 때마다 새로운 정재를 만들어 부왕을 즐겁게 했다고 하는데, 이 당시 새로운 향악정재와 당악정재가 많이 창제됐다. 순조 때 새로 창제된 향악정재는 佳人前牧丹·舞山香·船遊樂·春鶯囀을 포함해서 24종이었고, 長生寶宴之舞·演百福之舞·帝壽昌·催花舞 이상의 네 종류가 순조 때 새로 창제된 당악정재였다.

 조선 초기 이래 향악정재와 당악정재는 반주음악이나 창사, 또는 의물과 의상에 의해서 구분됐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면서 향당교주가 본격적으로 향악정재 및 당악정재의 반주음악으로 등장함으로써, 반주음악에 의한 두 정재의 구분이 어렵게 됐다. 그리고 조선 초기에는 향악정재의 창사가 井邑詞처럼 한글가사였지만, 순조 때 새로 창제된 撲蝶舞·響鈴舞 등과 같은 향악정재의 창사에 한문가사가 사용됨으로써, 향악정재의 창사가 당악정재의 것과 구분하기 어렵게 됐다. 이렇듯 조선 후기에 이르러 정재의 반주음악과 창사가 역사적 변천과정을 거치게 됐기 때문에, 향악정재와 당악정재의 구분이 불분명해졌다. 이러한 정재의 역사적 변천은 조선 후기 음악사의 발전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므로, 그것이 결코 과소평가 될 수 없는 중요한 사항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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