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 음악
  • 1) 궁중음악의 변천과 새 경향
  • (4) 고취악의 변천 및 세악·내취의 등장

(4) 고취악의 변천 및 세악·내취의 등장

 조선 후기의 鼓吹樂은 아악·당악·향악의 경우처럼 조선 초기의 전통을 전승하였으나, 이것 역시 양란 이후 역사적 변천과정을 거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시대적 변천은 불가피했던 역사의 대세였다. 고취악의 역사적 변천은 고취악현 및 여민락의 경우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 후기의 고취악현은 초기 이래에 비해서 많이 축소됐다. 殿庭鼓吹의 악현을 실례로 들어 보건대, 성종 때의 악현은 50명으로 구성됐지만 정조 때의 악현은 27명으로 구성됐으니, 조선 후기에 이르면서 전정고취의 악현에서는 23명이나 감원됐다. 성종 때의 前部鼓吹와 後部鼓吹 악현은 모두 51명으로 구성됐으나, 정조 때에는 12명이 감원된 39명으로 구성되는 변천과정을 거쳤다.767)柳義養,≪春官通考≫권 하, 嘉禮, 行幸·狻御·擧動.
≪樂學軌範≫권 2, 雅樂陳設圖說.
고취악현의 축소과정에서 대체로 가얏고나 거문고 등의 현악기가 제외됨으로써 관악기 위주의 악기 편성으로 바뀌었으니, 이런 경향은 다른 궁중음악의 경우에서 발견된다.

 고취악의 계열에 드는 대표적 악곡 여민락은 조선 후기에 이르면서 역사적으로 변천됐다. 본래 한문가사를 가졌던 여민락이 현재의 것처럼 완전히 기악화된 때가 조선 후기였다. 조선 후기의 고악보에 나타난 현악여민락의 음악적 특징은 첫째 기본음 황종의 음고가 8도 높아진 점, 둘째 하행종지형이 상행종지형으로 변한 점, 셋째 10장의 여민락이 8·9·10장의 생략으로 인하여 7장으로 된 점, 넷째 여민락의 4·5·6·7장이 이전보다 빨라진 점, 이상의 네 가지였다.768)李惠求, 앞의 글(1977), 431쪽. 4장부터 빨라지는 여민락이≪芳山韓氏琴譜≫·≪學圃琴譜≫·≪西琴譜≫등과 같은 조선 말기의 고악보에 전하기 때문에, 현행 여민락은 19세기의 악곡에서 거의 그대로 전승됐음이 명백하다.

 細樂·內吹의 등장은 조선 후기 음악사의 발전과정에서 중요시되는 사건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고취계열에 드는 세악과 내취가 현행 또는 內吹打의 전통과 역사적으로 관련됐기 때문이다. 18세기부터 日本通信使의 行列圖 및≪大典會通≫·≪春官通考≫등에 등장하는 세악과 내취는 모두 조선 초기의 전부고취나 후부고취처럼 관악기와 타악기의 악기편성으로 行樂을 연주한 점에서 서로 공통적이다.

 일본통신사행렬도에 나오는 세악은 대체로 吹鼓手와 細樂手로 구성된다. 사신행렬의 앞에 따르는 악대가 취고수였고 행렬 뒤에 따르는 악대를 세악수라고 불렀다. 취고수는 어가의 앞을 따르는 전부고취에 해당하고 세악수는 어가의 뒤에 따르는 후부고취로 보면 이해가 빠르다. 취고수와 세악수의 악기편성은 서로 달랐다. 통신사 趙泰億의 수행원 494명 중에 세악수 8명과 취고수 43명 총 51명이 수행했는데, 세악수는 해금 2명, 장고 2명, 젓대(笛) 2명, 피리(苾) 2명 이상 8명으로 구성됐다. 그리고 취고수 43명은 喇叭手 6명, 螺角手 6명, 태평소 6명, 銅鼓 4명, 세악수(자바라) 3명, 鼓打手 6명, 三穴手 3명, 錚手 7명, 고수 2명이었다. 취고수의 이러한 악기편성에서 현행 취타나 대취타의 뿌리가 모색되어야 할 것이므로 취고수와 내취의 등장은 조선시대 음악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정조 9년(1785)에 편찬된≪大典通編≫의 조문에 비로소 등장하는 兼內吹와 元內吹에서 유래된 내취는 국왕의 거둥 때 또는 정전에 출좌할 때 시위가 그 임무였다.769)≪大典通編≫권 4, 兵典 侍衛. 그런데 그들은 장악원의 악공이라기보다는 어가의 거둥을 시위했던 군악대원일 것으로 보여진다. 헌종 10년(1844)경의 漢陽歌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나발·북 등의 악기들은 취고수의 악기편성과 관련됐기 때문이다.

崇禮門 밖 나오신, 啓螺次知 선전관이,

자주 걸러 여기 와서, 吹打를 청한 후에,

兼內吹 牌頭 불러, 취타령 내리오니,

겸내취 거둥 보소. 초립 위에 雀羽 꽂고,

누른 天翼 藍纏帶에, 鳴金三聲한 연후에,

고동이 세 번 울며, 군악이 일어나니,

엄위한 喇叭이며, 애원한 號笛이라.

旌旗는 표표하고, 金鼓는 당당하다.

한 가운데 吹鼓手는, 흰 汗衫 두 북채를,

일시에 수십 명이, 行鼓를 같이 치니,

듣기도 좋거니와, 보기에도 엄위하다.

  (李石來 校註,≪風俗歌詞集≫, 신구문화사, 1974, 79∼80쪽).

 위에 인용한 바의 한양가에 의하면, 국왕이 거둥할 때 참가했던 내취는 시위행렬의 일원으로 포함됐던 군악대원이었으며 행차 도중에 연주했던 악기들은 취고수의 악기편성처럼 호적·나발·북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행차 때의 내취와 다른 내취가 궁중에서 활동했는데, 그것이 바로 船遊樂의 정재반주를 맡았던 연주단이었다.

 순조 29년(1829) 慈慶殿의 진찬 때 선유락의 정재반주를 담당했던 내취의 악기편성은 鉦手 1명·고수 2명·호적수 6명·자바라수 4명·나발수 4명, 이상 5종의 17명으로 구성됐다.770)張師勛,≪韓國樂器大觀≫(한국국악학회, 1969), 239쪽. 선유락의 정재반주를 맡았던 내취들이 군인이었기보다는 장악원 소속의 악공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궁중정재의 반주음악을 악공이라는 전문음악인이 아닌 군악대원들이 연주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헌종 14년(1848), 고종 5년(1868)·14년·24년·29년 등의≪진찬의궤≫및 고종 10년의≪진작의궤≫와 광무 5년(1901)의≪진연의궤≫에도 선유락 관련의 내취가 언급됐으므로771)張師勛, 위의 책, 221∼239쪽.
≪進饌儀軌≫己丑 권 3 및≪進饌儀軌≫戊申 권 3(영인본:≪韓國音樂學資料叢書≫3·6, 1980·1981, 國立國樂院).
내취의 정재반주는 고종(1863∼1907) 말년까지 계속됐음이 확실하다.

 내취가 임금의 거둥 때 참여했고 내취의 악기편성이 취고수와 너무 비슷하기 때문에 내취는 취고수와 밀접하게 역사적인 관계를 맺고 있음이 분명하다. 정재반주의 음악을 제공하기도 했던 내취가 징·태평소·나각·나발·북으로 편성됐는데 이 편성은 대취타의 악기편성과 거의 같다. 따라서 조선 후기 내취의 전통이 현행 대취타에 전승되고 있다고 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