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4. 무용·체육 및 연극
  • 1) 무용
  • (2) 산대잡희의 폐지

(2) 산대잡희의 폐지

 조선 후기의 무용이라 하면 영·정조 이후 평민사상의 신장과 儺禮都監의 해산 이후로부터 한말까지의 모든 광대·재인 및 민간에서 행해졌던 연희 전반을 의미한다.

演劇에는 山戱와 野戱가 있는데 儺禮都監에 속한다. 山戱는 다락을 매고 포장을 치고, 獅子와 호랑이, 만석중춤을 보인다. 野戱는 唐女와 小梅로 분장하고 춤을 춘다(柳得恭,≪京都雜志≫권 1, 風俗 聲伎).

 여기서 말하는 산희는 成俔(1439∼1504)의 傀儡戱와 마찬가지로 재담이 곁들인 꼭두각시놀음이 아니고, 4월 초파일에 연등놀이의 하나로 놀던 무언인형극인「만석중놀이」를 말한 것 같다.「만석중놀이」에는 만석중과 노루·사슴·잉어·용 등의 인형이 사용되었는데,830)金在喆,≪朝鮮演劇史≫(學藝社, 1939). 여기서는 사자와 호랑이의 인형이 사용되었음이 다를 뿐이다.

 야희의 “唐女는 高麗 때 禮成江가에 와서 살던 中國倡女의 이름이고, 小梅도 옛날 美女의 이름이다”라고 유득공이 설명하고 있으나, 당녀탈은 楊州別山臺놀이에서도 있었고, 송파산대에는 현존하며, 소매는 小巫와 음이 서로 가까워 동일한 역을 가리킨 것 같다. 이 야희는 벌써 산대놀이에 가까움을 느끼게 한다.

 정현근이 지은≪敎坊諸譜≫(고종 9:1872)에는 六花隊 이하 14종의 춤 속에「僧舞」가 들어 있는데 그 설명을 보면 산대놀이의 老長科場의 춤과 신장수와 취발이놀이를 합친 내용이다. 또 6종의 잡희 속에는「山臺」가 있는데, 목중과 소무와 샌님이 그 등장인물들임을 추측케 하며,「醉僧」은 취발이놀이로 생각된다. 이들「승무」와「산대」와「취승」이 하나의 테두리 속에 묶여지고, 재담이 따르면 오늘의 산대놀이의 노장과장과 샌님과장의 놀이가 됨을 짐작할 수 있다.831)李杜鉉,≪韓國의 假面劇≫(一志社, 1979), 86쪽.

 季冬儺禮는 흉년 기타 큰일이 생겼을 때에 停罷되는 예는 있었으나 거의 정례적으로 매년 除夕에 거행되고, 逐疫 외에 잡희 즉 나희가 따랐고, 이러한 나희는 나례와 迎使行事와 또 조정의 각종 행사에 없지 못할 절차로 되어 조선 초기의 국가신흥의 기운과 함께 그 규모도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그러나 임진·병자 양란 뒤의 조선조는 쇠운에 접어들어 인조(1623∼1649) 이후는 나례의 규모도 축소되어 축역행사 정도로 그치고, 명청의 교체 이후는 崇明排淸의 감정과 함께 청사영접 때의 산대시설도 열의가 감소되어 왕년에 성대히 베풀어지던 구경거리는 없어지고 그나마 몇 번씩 거행된 영조·정조시대 이후는 公儀로서의 나희는 정파되고 말았다.

 조선조의 獅子舞(<그림 4>)는 신라 이래의 전통이 지방의 민속무로 남아 내려오다가 궁중정재로 채택되기도 한다.≪國讌呈才唱詞抄錄≫에 의하면 사자무는 본래 成川(平南)의 잡희로서 고종 24년(1887)에 비로소 궁중에 들여온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平安監司歡迎圖>나≪華城城役儀軌≫를 보면 사자무가 나타나 있으니, 그것은 일찍부터 지방관아의 희연에서 상연되어 왔었음을 알 수 있겠다.832)李杜鉉, 위의 책, 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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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獅子舞
<그림 4>獅子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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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후기에 산대희를 비난하고 그 거행을 반대한 것은 그 내용이 유학정신에 어긋날 뿐더러 그것이 사회의 최하층의 倡優輩들에 의해 연출되는 것이고 또 경제적으로도 소요되는 경비가 막대하므로 자주 반대에 부딪혔다.

 산대잡희는 영·정조시대에 이르러 폐지되고 나례우인들의 지방정착으로 말미암아 각 지방에서의 민속춤이 활성화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재인·광대들은 사대부의 회갑연·遊街·掃墳·聞喜宴 등 잔치에 동원되고, 농산어촌·시장·倉村·사찰 등에서 민속연희를 연출하고 行下를 받으면서 각지를 순회하였다. 순조 14년(1824)에 제출된<完文等狀八道才人>과<八道才人等狀>에 의하면 여러 판소리 광대들도 근본적으로는 나례우인이었으며, 배우로서 산대희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광대란 말이 당초 가면을 뜻하고, 다음으로 가면놀이하는 자를 뜻하다가 배우의 신분적 칭호로서 특히 歌客을 부르기에 이른 것과 대비된다 하겠다.≪京都雜志≫에는 창우를 가객인 광대와 줄타기·땅재주 등을 하는 재인으로 나누고 있는데, 이것은 물론 조선 후기로 내려오면서 분업현상일 것이다.

 이같이 창우들은 궁중과 관가에서 뿐만 아니라 양반사대부의 사랑에서 또 유가와 소분·문희연 등에서 놀이를 놀았고, 한편 농촌·산촌·어촌·시장·창촌에서는 오락을 제공하였고, 마을의 都堂굿이나 別神굿에서는 축제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리하여 당시의 식자들은 시속의 이러한 好尙에 대하여 나라의 일대 병폐라고 개탄하기에 이르렀다. 한 예로 丁若鏞(1762∼1836)의≪牧民心書≫에 보면, 광대가 봄·여름이면 고기잡이를 좇아 어촌으로 모여들고, 가을과 겨울이면 추수를 바라고 농촌으로 쏠리는데 특히 창촌에서는 舍堂·娼妓·酒婆·花郞(즉 巫夫, 方言으로는 廣大)·樂工 등 잡류들을 엄금하라833)丁若鏞,≪牧民心書≫ 권 14, 戶典六條.고 하였다. 이로써 당시 조선 후기 사회에서는 재인·광대의 연희가 전국에서 성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나례에 동원된 우인들은 성종 2년(1481)에는 대부분 멀지 않은 경기 일대에서 상경하였고, 연산군(1495∼1506) 때에는 외방의 才人白 등을 서울에 이거시킨 일도 있다. 그런데<완문등장팔도재인>에 의하면 병자호란 이후 淸使가 올 때 좌우산대를 거행하기 위하여 설치된 각 도의 才人廳을 통합하여 전국적으로 조직을 넓힌 각도재인청은 자체 계급내의 통제기관의 역할을 하였으며, 나아가 巫契員들의 생활보장에 대한 절충도 하였다.

 이러한 조직을 통해 조선조의 연예인들은 시정 상공인이나 농어촌사회보다 양반관료에게 더 매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관료체제의 중앙집권화와 유교에 의한 전례화, 그리고 과거제도에 의해 폐쇄화된 관료의 비호를 받는 한편, 시장과 도시가 발달하지 못한 관계로 부르주아지의 생성도 없었고 극장도 가질 수 없이 버려진 상태였던 바로 여기에 조선조 연예문화가 부진하게 된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834)金東旭,≪國文學史≫(日新社,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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