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4. 무용·체육 및 연극
  • 2) 체육
  • (2) 각저

(2) 각저

 고려시대의 씨름이 주로 무인들 사이에서 개인적 호신술 또는 군사적 목적으로 연마되는 한편 부수적인 여흥행사로서 경기가 치러졌다면 조선시대에 와서는 양상이 바뀌게 된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와 비슷한 모습을 보이지만 후기로 갈수록 점차 씨름의 참가자 신분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문헌을 통하여 볼 수 있다.

 세종 8년(1426) 3월과 4월에 木覓山(지금의 남산)에서 力士로 하여금 씨름하게 하고, 세종 13년 3월에는 경회루 북쪽에서 종친의 활쏘는 재주와 역사 安思義 등으로 씨름을 하게 하는 한편, 같은 달에 모화관에 거동하여 군사에게 擊毬하는 것과 말타고 창쓰고 毛毬쏘는 것을 구경하는 동시에 두 사람으로 하여금 각각 皮頭槍을 가지고 말을 달려 겨루도록 하고 혹은 역사 다섯 사람을 모아 씨름하게 하고 상을 차등있게 주었다는 실록의 기사851)≪世宗實錄≫권 31, 세종 8년 3월 기미·4월 을축.
≪世宗實錄≫권 51, 세종 13년 3월 병오·임오·임진.
로 보아 고려시대의 행사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씨름경기에 나서는 사람들은 무인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시대가 내려온 다른 실록기사852)≪明宗實錄≫권 26, 명종 15년 5월 신미;권 31, 명종 20년 12월 기축.
≪顯宗實錄≫권 7, 현종 5년 5월 계미.
에서는 씨름에 출전하는 자들이 유생을 포함한 양반과 노비에 이르기까지 확대되고 있었다. 그리고 씨름 때문에 불상사가 야기되자 사헌부에서 금령까지 내린 기록이 있다. 한편 歲時記와 기타 문헌을 통하여 조선 후기의 상황을 살펴보면 씨름경기는 지역·계절·연령·신분의 차별이 없이 일반화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젊은이들이 남산의 倭場이나 북악산의 神武門 뒤에 모여 씨름을 하여 승부를 겨룬다. 그 방법은 두 사람이 서로 상대하여 구부리고 각자 오른손으로 상대방의 허리를 잡고 왼손으로는 상대방의 오른다리를 잡고 일시에 일어나며 상대를 번쩍 들어 메어친다. 그리하여 밑에 깔리는 자가 지는 것이다.

內局(배지기)·外局(등치기)·輪起(딴족거리) 등 여러 자세가 있고 그 중에 힘이 세고 손이 민첩하여 연해 이기는 사람을 都結局이라 한다. 중국사람들이 이를 본받아 이름하여 高麗技라 하기도 하고 또 撩跤라고도 한다. 단오날 이 경기는 매우 성하여 서울을 비롯한 각 지방에서도 많이 한다(洪錫謨,≪東國歲時記≫, 5월 端午).

 또한 씨름은 참가하는 자의 연령의 폭이 넓고853)洪錫謨,≪東國歲時記≫7월 中元·8월 月內. 실시하는 시기도 단오날에 국한되지만 않았다. 그 당시 유행하였던 씨름은 현대와 같은 왼씨름이며 내국·외국·윤기와 같은 용어를 통하여 볼 때 다양한 기술이 존재하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도결국이란 판막음이라는 뜻으로 그 씨름판에서 특히 힘이 세고 기술이 좋아 계속 승리하는 자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오늘날의 씨름경기가 토너먼트방식으로 진행되는 것과 비교하여 볼 때 연전연승하여 아무도 당할 자가 없는 제일인자의 체력과 기술의 탁월함은 현대의 천하장사를 능가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며, 조선 후기에 이르면 초·중기와는 달리 완전히 스포츠화되어 현대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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