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4. 무용·체육 및 연극
  • 3) 연극
  • (2) 조선시대의 재인과 광대

(2) 조선시대의 재인과 광대

 조선시대의 연희문화는 대체로 ① 妓女(掌樂院妓·內醫院妓·惠民署妓·外方捧上妓·絃首), ② 工(樂工·掌樂院樂工·外方捧上樂工·樂生·歌童·舞童), ③ 俳優(優人·倡優·廣大·才人·水尺), ④ 花郎(兩中·群中), ⑤ 社堂, ⑥ 巫女, ⑦ 農民(民俗的)들에 의하여 유지되었다. 이네들 중 妓·工·俳優가 그 주류를 이루고, 나례나 明使·淸使영접이 있을 때, 또는 野人(女眞)·倭人接禮에도 이들이 동원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평소 관가에 매여 있는 敎坊妓女나 악공·악생은 고사하고, 지방에서 봉상되는 악공이나 악생, 창우까지도 점차 무계에 속한 광대나 재인으로 대치되어 갔다. 이것이 조선시대의 연희문화를 수정하는 근본적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형편은 특히 임진·병자 양란 후 조정의 악사들이 많이 죽거나 포로가 되어 그 수가 격감하였으므로 응급책으로 재인·광대를 각 고을에서 봉상시킨 뒤부터 두드러졌다. 그 뒤에도 해마다 조정에 행사가 있을 때마다 수명씩 봉상되어야 하는 소임에 응하기 위해 巫契가 전국적으로 조직되었다. 천민이며 무당 서방인 그 고을의 재인·광대는 才人廳(神廳·廣大廳·花郞廳)에 소속되어 원님의 행차의 선두에서 三絃六角을 연주하고, 연회 때에는 여러 가지 놀이와 재주를 연출하였다. 이 고을의 재인청이 모여 각 도에 大房을 두고, 그 밑에 右道都山主와 左道都山主가 있으며, 다시 그 밑에 執綱·公員·常務를 두어 서무를 맡겼다. 이 팔도의 都聽이 전국적으로 모여 八道都大房·八道都山主·都執綱·都常務 등의 여러 소임을 두고 지방의 향연에서부터 서울에서의 나례 등 모든 연예적인 행사에 재인·광대를 참가시켰다.

 광대란 말이 당초에 가면을 뜻하고 다음으로 가면놀이하는 자를 뜻하다가 나중에는 배우의 신분적 칭호로서 특히 판소리하는 가객을 부르기에 이르렀으나 판소리 광대들도 근본적으로는 儺禮優人이었으며, 배우로서 산대희도 하였다. 柳得恭은 창우를 가객인 광대와 줄타기와 땅재주 등을 하는 재인으로 나누었는데,869)柳得恭,≪京都雜志≫권 1, 風俗 遊街. 이것은 물론 조선 후기로 내려오면서의 분업현상이다.

 인조 4년(1626)에 중국사신을 영접할 때의≪儺禮廳謄錄≫을 보면 그 때 소용된 각종 자료의 품목과 수량을 들고, 畵員·木手·銀匠·花匠·冶匠·漆匠 등 27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재인으로는 京畿才人은 廣州 등 18군에서 30명, 忠淸才人은 韓山 등 21군에서 52명, 慶尙道才人은 咸昌 등 16군에서 33명, 全羅道才人은 全州 등 36군에서 171명의 이름이 올라 있다. 世襲巫系의 전라출신의 재인들이 단연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이 선출되어 왕궁의 나례나 산대잡희를 위해 서울로 왕래할 때에는 호조에서 발급받은 圖書(일종의 증명서인 完文)를 갖고 전국의 관아와 사찰 등을 돌면서 乞糧이라고 하여 비용을 걷기도 했다. 봄에는 蟬印, 가을에는 虎印을 썼다고 한다.

 이러한 광대와 재인 그리고 사당 등 이들 연예인들의 생활에 대한 단편적인 기록들이≪조선왕조실록≫과 기타의 문헌들에 산견되는데, 그들은 농사를 짓지 않고, 걸량(乞粒)으로 생활하며, 국가나 관가에 행사가 있을 때마다 모여들었는데, 사회악의 원천이라고 보고 부정적으로 기록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와 같은 실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李)命崇이 ‘식량을 휴대하고 상경한 儺禮優人들을 다수 서울에 머무르게 하기 어려우니 돌려보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아뢴 데 대해, 임금은 ‘나례는 祖宗朝부터 행해 오던 것이니 지금 경솔히 바꿀 수 없으며, 優人들은 대체로 농사를 짓지 아니하고, 乞糧으로 살아가는 자들이고, 또 서울에서 멀지 않은 이틀 정도의 거리에서 온 자들이니 이미 상경한 이상 正朝가 지나 내려보냄이 좋겠다’(≪成宗實錄≫권 136, 성종 12년 12월 정사).

② …본디 나례는 배우의 장난으로 한 가지도 볼 만한 것이 없으며, 또 배우들이 서울에 떼지어 모이면 표절하는 도둑이 되니 앞으로는 나례를 베풀지 말아 옛날 폐단을 고치게 하라(≪燕山君日記≫권 60, 연산 11년 12월 기축).

③ 憲府에서 아뢰기를 ‘歲時의 逐疫行事는 좋으나, 觀儺 즉 雜戱로서 絃手才人들이 버릇없이 宮禁에 출입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방자하게 만드니 이를 폐지하여 달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왕은 ‘觀儺가 잡희라고는 하지만 이는 고풍을 전하는 것이며, 하물며 이를 보는 자들이라고 하여 다 방자하게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歲時는 삭막한 고로 옛부터 이를 행하여 온 것이요, 지나친 놀이는 아니다’라고 하여 그 청을 듣지 않았다(≪中宗實錄≫권 1, 중종 원년 11월 갑오·을미·병신).

④ 賑恤廳(흉년에 飢民을 돕는 관청)의 節目으로 승정원에 내려 이르기를 ‘…呈才人·白丁 등은 본시 無恒産한 자들로 優戱를 전업으로 하여 마을을 돌아다니며 乞糧을 하나 실은 겁탈과 다름없으며, 이들은 민가에 기생하여 作害가 심하며, 올해 같은 흉년에는 그 도둑질함이 전보다 더할 것이니 이들이 경내에 돌아다니는 것을 일절 痛禁하라’(≪中宗實錄≫권 95, 중종 36년 5월 기해).

 특히 社堂(寺黨·舍堂)에 관해서는 태종 5년(1405)에서 6년에 걸쳐 寺社革罷政策을 실시한 지 반세기가 넘는 세조 때에 이르러서는 벌써 아래와 같이 무시 못할 동냥중들의 기형적·반사회적 집단이 생겨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社長이라고 하는 자가 가짜 勸善文을 가지고 圓覺寺 緣化僧인양 촌락을 횡행하며 민폐를 끼치고 있으니, 각읍의 수령들은 이런 자들은 僧俗을 가리지 말고 잡아 올리라’고 하였다(≪世祖實錄≫권 36, 세조 11년 8월 무자).

 절에서 쫓겨난 才僧, 伎樂人과 사찰에 매어 있던 하층민들은 악의 집단이란 규탄을 받더라도 몸에 지닌 재주를 밑천으로 살아가야 했으며, 念佛·歌舞·賣淫·盜賊 등으로 사는 길밖에 없었다. 그 후 이들에 관한 기록이 예종·성종·중종·선조 때에 이르면서 심심치 않게 보이다가 ‘男爲居士, 女稱社堂’으로 이름이 바뀌고,870)≪宣祖實錄≫권 211, 선조 40년 5월 병인. 이후의 문헌들 예컨대≪星湖僿說≫·≪芝峰類說≫·≪五洲衍文長箋散稿≫·≪牧民心書≫등에는「社堂」으로 그 이름이 전해 내려오고 있어 이미 특수집단으로 정착하게 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조선 후기 이래로 1920년대까지도 우리 나라 농어촌을 돌아다니며 풍물(농악), 버나(대접 돌리기), 살판(땅재주), 어름(줄타기), 덧뵈기(탈춤), 덜미(꼭두각시놀음) 등의 레퍼토리로 민중오락을 제공하여 왔고, 오늘날도 그 여맥을 잇고 있는 굿중패 또는 남사당이라고 불리는 직업적 유랑연예인들이 이 社長輩 즉 사당거사배의 후예들이다.

 이상에서 조선 초기 이래 연희문화가 주로 나례도감의 공의 즉 공식행사와 함께 존속되어 왔고, 優人들은 유사시에만 상경하여 궁중에도 출입하여 나희에 출연하였으나, 평상시에는 떼를 지어 다니며 각종 연희를 보여주고 이른바 걸량으로 생계를 유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寺社革罷 이후 才僧·伎樂人들이 사찰에서 연출하던 기악 즉 불교의식 가무가 자연 속화의 길을 걷게 되고, 소학지희에서 파계승놀이가 연출되게 되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조선 초·중기 연예문화가 관에 의해 주도되고 산대나례도 공의로서 거행되었지만 그것에 대한 일반의 호기심은 대단하여 산대희가 거행될 때는 민중이 운집하였고, 관극은 점차 일반화되어 갔다. 그러나 조선시대 선비들은 그들의 유학적 견지에서 매번 산대희의 거행을 비난하고, 특히 風敎上의 이유로 일반의 관람과 부녀자의 참관을 반대하는 의견이 분분하였다. 산대희를 비난하고 그 거행을 반대한 것은 그 내용이 유학정신에 어긋날 뿐더러 그것이 사회의 최하층의 창우배들에 의해 연출되는 것이고, 또 경제적으로도 소요되는 경비가 막대하므로 번번히 반대가 있었다.

 조선시대의 연희문화가 서울에서의 공의와 지방관아의 행사에 의존하는 한편 민간의 지지조건으로는 사대부와 이속과 시정 상공인 및 농어촌의 서민들이 자기들의 오락을 요구하여 후원한 데도 있다 하겠다. 17∼18세기 조선 후기에 있어서 상공업의 발달은 六矣廛과 같은 특권적 상업에서 자유로운 상업으로 이행되고, 또 주기적인 시장도 상설시장으로 이행되면서 서민경제의 발전과 더불어 서민문화도 향상되어 재인·광대들은 농촌·산촌·어촌·시장·창촌(稅米를 걷어들이는 창고가 있는 마을)에서 오락을 제공하고, 마을의 도당굿이나 별신굿에서 축제의 일익을 담당하고 보수인 行下를 받으면서 각지를 순회하였다. 그리하여 당시의 식자들이 시속의 이러한 好尙에 대하여 나라의 일대 병폐라고 개탄하기에 이르렀다.

廣大가 봄 여름이면 고기잡이를 좇아 어촌으로 모여들고, 가을과 겨울이면 추수를 바라고 농촌으로 쏠리는데, 특히 倉村에서는 舍堂·娼妓·酒婆·花郞(즉 巫夫·廣大)·樂工·탈꾼 등 雜流들을 엄금하라(丁若鏞,≪牧民心書≫권 5, 戶典六條 稅法 하).

 이로써 당시 재인·광대의 연희가 전국 방방곡곡에서 성행되었음을 알 수 있겠고, 巫系에 속한 광대나 재인의 존재를 유지한 서민생활과 그 경제적 여건을 엿볼 수 있다 하겠다.

 그러나 조선조의 연예인들은 시정 상공인이나 농어촌사회보다는 더 많이 양반관료(향리도 포함하여)에게 매이지 않으면 안 되었고, 바로 여기에 관료체제의 중앙집권화와 유교에 의한 전례화, 과거제도에 의해 영세화된 관료의 보호를 받아야 했고, 한편 시장과 도시의 충분한 발달을 보지 못해 부르주아지의 생성도 없었고, 상설극장 하나도 가질 수 없이 버려진 상태에서 무대예술로서의 연희문화는 부진했고, 대신 서민들 속에서 자라난 무기록 전승의 민속극이 존속하였다.

 19세기 중엽에 申在孝(1812∼1884)가 정리한 판소리 여섯 마당 중 흥부가와 변강쇠타령에 보면 당시의 雜藝人들이 보인다. 그들은 세습무가출신의 창우들과는 달리 八賤에도 들지 못하는 유랑예인들로 나례나 내연에도 불리지 못하고, 제각기의 지역내에서 떠돌아다니던 잡류들이다.

 이러한 遊藝人들의 필두는 사당패들이었는데 어린 여사당과 그 남편이자 포주인 거사가 한짝이 되어 이러한 부부가 20∼30쌍이 모여 한패를 이루고, 마을을 돌면서 가무와 놀이를 보여주고 관객의 청에 응하여 매춘도 서슴치 않았다. 조선조 말에 가까워 오면서 여사당 대신 소년들의 남사당이 등장하여 오늘날까지 그 맥을 잇고 있는 남사당패가 등장하였는데 그들의 공연종목의 여섯 가지는 앞에서 든 바와 같다.

 다음으로 솟대를 타는 곡예를 보여주는 솟대쟁이패(<그림 2>)와 공던지기의 弄丸을 보여주는 대광대패가 있었는데 오늘날 영남지방의 五廣大놀이는 처음 이들이 놀았다고 한다. 다음으로 乞粒패인데 농악의 꽹과리와 징과 장고를 뚜드리며 집집을 돌면서 덕담도 해주고 錢穀을 모았다. 그 중 잡승들이 꽹과리를 치고 염불을 외우며 구걸하는 자들은 굿중패(<그림 3>) 또는 중매구라고 했다. 다음은 문전이나 장터에서 소리를 하거나 속악을 연주하며 금전을 구걸하는 풍각쟁이패들인데, 그 일행에는 가객과 대금·가야금·꽹과리·북 등을 연주하는 자와 검무를 추는 무동도 끼어 있었다. 각설이패는 장타령을 노래부르며 구걸하는 걸인과 다름없는 자들이다. 또 혼자서 돌아다니는 초란이가 있는데, 목에 장고를 걸고, 초란이탈을 쓰고, 집집을 돌면서 장고를 치며 주문을 외우고, 잡귀나 액을 쫓고 전곡을 구걸하였다고 한다.

확대보기
<그림 2>솟대쟁이패
<그림 2>솟대쟁이패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그림 3>굿중패
<그림 3>굿중패
팝업창 닫기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