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4. 무용·체육 및 연극
  • 3) 연극
  • (3) 판소리

(3) 판소리

 위에서 잠깐 언급한 18세기 중엽의 송만재의 시<관우희>에 의하면 광대들의 판놀음(<그림 4>)의 주요한 레퍼토리는 ① 가곡·음율·별곡, ② 판소리(本事歌) 12마당, ③ 줄타기, ④ 땅재주, ⑤ 呈才(舞樂)·假面劇, ⑥ 俳戱·劒舞, ⑦ 笑謔之戱, ⑧ 巫歌, ⑨ 傀儡戱들로서 광대들은 고사도 하였고, 농어촌을 다니면서 대중을 상대로 소리를 팔았고, 또 등과한 사람에게 불리기 위하여 유식한 사람 즉 양반들을 상대로 서로 소리경쟁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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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판놀음
<그림 4>판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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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연 조선 후기 호남지방의 世襲巫家 단골집안의 남자들 중에서 판소리 명창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그들 중 불행히도 성대가 나빠 소리광대가 되기가 불가능하면 기악을 배워서 잽이(악사)가 되고, 그것도 재주가 없으면 줄타기를 배워서「줄쟁인」(<그림 5>)이 되거나, 땅재주를 배워서「땅재주꾼」(재인)이 되고, 그도 저도 안 되면 굿판에서 잔심부름이나 하는「방석화랭이」가 되었다. 이들은 巫夫契를 조직하고 神廳(掌樂廳·才人廳·倡夫廳·工人房·風流房)을 중심으로 모였다. 그들은 조선시대를 통하여 8천(사노비·승려·백정·무당·광대·상여꾼·기생·공장)의 하나로 사회의 최하층에서 하대를 받았고, 그러한 수백년의 수난의 적층 속에서 이룩된 예술이 판소리이다. 판소리는 조선 후기에 가면극과 더불어 평민의 예술로서 일반에게 널리 받아들여졌던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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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줄쟁인
<그림 5>줄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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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소리(<그림 6>)는 판(무대)과 소리(곡·창)의 합성어로 무대에서 부르는 소리라는 뜻이니 장르로서는 먼저 음악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문제되는 것은 노래부르는 사설이다. 그것이 단가일 때도 있고, 중편일 때도 있으나<春香歌>와 같이 한편의 완결된 서사설화를 노래부를 때는 서양중세의 로망스 양식이나 연극양식의 중간형태에 해당된다. 판소리는 소리와 아니리와 발림(너름새)과 춤으로 연출되는 독연형태의 광대의 극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독연형태이기 때문에 연극이라고는 할 수 없고 서사시의 咏唱이라는 의견도 있으나, 판소리는 근래 우리의 전통적 공연예술의 하나로 크게 각광을 받고 있다. 판소리는 우리 연극사에서 근세의 연극(공연예술적 측면)이요, 또 희곡(문화적 측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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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판소리
<그림 6>판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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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대와 고수의 둘이서만으로 공연할 수 있는 판소리는 어디에서든 손쉽게 공연되어 남도 일대에 퍼졌다. 처음에는 일반 서민을 상대로 장터 같은 데서 공연되고, 양반가의 사랑에서 공연하고, 지방장관인 감사나 병사에게도 불려 갔다. 특히 향리들의 애호를 받아 판소리 전성기인 19세기에는 동짓날 전주부와 전라감영의 通引廳에 의해 명창들이 소집되어 유명한 全州大私習이 개최되었다. 나중에는 왕의 어전에서도 부르게 되어 헌종(1834∼1849)이나 철종(1849∼1863)으로부터는 동지나 선달 같은 벼슬을 받기도 하였고, 조선 말엽의 명창 李東伯(1867∼1950)은 광무 4년(1900) 고종의 탄신연 때 어전에서 판소리를 불러 통정대부(정3품)를 수여받기도 하였다.

 판소리의 사설은 처음에는 조잡한 것이었으나 순조(1800∼1834) 때의 명창 方萬春이 봉산읍의 음률가로 시문에 소양이 있는 자와 더불어 고전에서 赤壁歌와 沈淸歌를 윤색·개작하였다고 전해진다.

 호사가인 양반이나 지방관아의 향리들이 후원자가 되어 그들을 도왔다. 민속가면극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같이 판소리는 조선 후기의 국민예술로서 18세기 이후 일반에게 받아들여져 갔다.

 판소리의 발생에 대해서는 종래에도 여러 가지 논의가 있어 왔으나 판소리는 원래 굿(제의)에서 발생하여 그 후 굿에서 오락으로 전용되어 농어촌의 대중들을 전설 같은 것을 주제로 한 소리로 즐겁게 하였고, 그 가운데≪춘향전≫같이 유식계급에 환영을 받은 것은 점점 세련된 가사로 다듬어져 발전하여 생존하였고, 그렇지 못한 것은≪가루지기타령≫같이 조잡한 말을 지닌 채 도태된 것으로 추측된다. 무속은 그 가계와 叙事巫歌의 무악과 무속예능으로 판소리의 모태가 되었고, 민담은 여기에 그 모티브를 씨로서 뿌린 존재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제의(굿)가 판소리발생의 모태가 되었으리라는 이러한 의견은 앞으로 더 자세한 논증이 필요하다.

 판소리는 진양조·중머리·중중머리·자진모리·휘모리·엇모리 등의 창의 완급과 장단의 어레인지로 불리며, 민담의 스토리의 바탕 위에 여러 노래는 하나의 핵을 이루는 마디소리로서 집성되어 한 마당의 판소리를 이룬다.

 판소리는 대체로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숙종-영조)에 이르는 동안 광대들의 구전에 의하면 河漢譚과 結城의 최선달 등의 선구자들에 의하여 개척되고, 다시 이 독연형태의 극예술은 19세기 중엽에서 말엽에 이르는 동안에 하나의 장르로서 정립되어 송만재의<관우희>에 의하면 18세기 중엽에는 이미 아래와 같은 열두 마당의 고정된 레퍼토리를 갖기에 이르렀다.

① 춘향가 ② 華容道(적벽가) ③ 박타령(흥부가) ④ 강릉매화가 ⑤ 가루지기타령(변강쇠타령) ⑥ 曰字打令 ⑦ 심청가 ⑧ 배비장타령 ⑨ 옹고집타령 ⑩ 가짜신선타령 ⑪ 토끼타령(수궁가) ⑫ 장끼타령

 다시 정조조에 權三得(1771∼1841)이 양반출신이면서 판소리 광대가 되어 이른바 비가비로서 전주와 익산 사이에서 소리의「제」(制)871)東便制는 純祖∼哲宗代(1800∼1863)에 걸쳐 명창이었던 宋興祿이 정한 음악의 법칙에 따라 雲峰·求禮·淳昌·興德 등 주로 全羅北道에서 불려지는 歌風을 말한다. 羽調를 기본으로 하고, 그 가풍은 ‘雄健淸淡’하고 號令調가 많다. 西便制는 憲宗∼高宗代(1834∼1907)의 명창 朴裕全이 정한 음악법칙에 따라 光州·羅州·寶城 등 주로 全羅南道의 각지에서 불려지는데, 그 가풍은 界面調를 기본으로 하고, ‘軟美浮華’의 말이 있고, ‘津津然 肉味的’이라고도 한다. 中高制는 非東非西의 중간으로 취하는 것이나 전자에 가깝다고 일러오는데 京畿·忠淸道 일대에서 많이 유행했다(鄭魯湜,≪朝鮮唱劇史≫, 朝鮮日報社 出版部, 1940).를 순화하고, 19세기 중엽에 이르는 사이에 “高宋廉牟”(공주의 高壽寬, 운봉의 宋興祿, 여주의 廉季達, 죽산의 牟興甲)의 4대 명창과 해미의 방만춘 같은 명창들이 순조·헌종·철종조에 뒤를 이어 나타나 완전한 짜임새를 가진 노래와 아니리, 律文과 散文으로 엮어진 독특한 극시로서 완성시켰다. 현재 남아 있는 판소리사설들은 국한문에 능한 자들, 주로 향리 등의 손을 거쳐 다듬어졌다고 추측되는데, 권삼득이나 신재효 같은 비가비의 참여가 판소리로 하여금 ‘조선의 국민문학 즉 위로는 王侯로부터 아래로는 서민에 이르기까지 이해하고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문예로서’ 또 국민연예로서 세련되어 갔다.

 그러나 아직 구비문학에 지나지 않았던 판소리는 19세기 중업에 이르러 전라도 고창의 향리로 중인출신인 신재효가 전래하는 판소리 열두 마당을 여섯 마당의 극본 즉 춘향가·심청가·박타령·토별가·적벽가·橫負歌로 재정리하여 기록함으로써 浮動文學에서 고정문학으로 정착되기에 이르렀다. 판소리는 다시 신재효의 횡부가(가루지기타령)를 제외한 오가가 현재 판소리의 고전으로 불리고 있다. 그는 판소리작가로서 뿐만 아니라 교육가로서도 진력하여 그의 문하에서 李捺致·金世宗·丁昌業·陳彩仙·許錦波 등 당대의 명창들을 배출시켰다. 또 이론가로서도 판소리의 미학을 읊은<廣大歌>에서 “광대라 하는 것이 제일은 인물치레, 둘째는 사설치레, 그 지차 득음이요, 그 지차 너름새라”고 하여 광대(배우)의 얼굴 생김새도 포함한 인간됨(인물치레)과 더불어 말재주와 문학(사설), 음악(득음)과 연기(너름새)를 판소리 극예술의 4대 기본요소로 들고 있다.

 광대는 우리의 배우요 광대의 예술인 판소리는 우리의 근세 특유의 연극이요, 판소리의 사설은 우리의 희곡이다. 종래에 판소리를 연극과 가요의 중간형태라고 하여 서사시의 영창이라고 하고, 혹은 소설이라고 하고, 또는 창악이라고 하여 음악적 측면만을 내세웠으나, 판소리가 갖는 종합적 성격 중에서 연극적 측면이 가장 두드러진 것이며, 판소리는 음악극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제까지 판소리 명칭은 打令·雜歌·倡歌·판놀음·廣大소리·歌曲·唱劇調·劇歌·唱調·舊劇·唱詞·唱樂·本事歌 등 여러 가지로 불려 왔으나 그 중 창극(舊劇·國劇)은 광무 7년 協律社에서 姜龍煥이 춘향가의 대화창을 시작하였고, 융희 2년(1908) 圓覺社 무대에서 주로 강용환과 김창환이 활약하여 배역과 분창이 생긴 뒤 宋萬甲이 주도한 朝鮮聲樂硏究會(1933) 공연에 이르는 동안 정립된 것이며, 조선 말엽까지의 형태는 그대로 판소리(타령)라고 불러 창극과 구별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한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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