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1. 신분제의 이완과 민중사회의 성장
  • 1) 사족지배구조의 정착과 신분구조의 변화

1) 사족지배구조의 정착과 신분구조의 변화

 임진왜란은 조선 건국 이래 오랫동안 안정을 구가하던 당대인들에게 엄청난 심적·물적 피해를 안겨주었고, 급격한 인구 감소, 국가 행정체계의 마비와 같은 수많은 문제점을 한꺼번에 노정시킨 일대 사건이었다. 그렇지만 7년여에 걸쳐 전개된 임진왜란 종결 이후 복구사업이 신속하게 추진되었다. 전후 몇 년 동안은 영농에 적합한 기후가 지속되었으며 지주와 작인을 불문하고 영농욕구가 거세었으므로, 복구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국가의 적극적인 勸農政策에 힘입어 복구사업은 더욱 활기를 띠었다. 이 때 복구사업을 주도한 계층은 兩班層이었다. 그들은 임진왜란 발발 이래 義兵 활동에 참여하는가 하면 納粟政策에도 적극성을 보이는 등, 전란 초기 일본 정규군에게 일방적으로 밀리던 조선측이 전열을 재정비하고 행정체계를 수습할 시간을 벌어주었다. 양반층은 복구사업을 주도할 수 있는 명분을 획득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 이유에서 전후 복구사업의 진행 단계에 비례하여 양반층의 사회적·경제적 생활 또한 회복추세에 있었다. 각종 이권에 대한 양반층의 지나친 관심과 확대가 사회적 문제로 부각될 정도로, 양반층이 주도한 복구사업은 활기를 띠어갔다.

 당시 양반층이 복구사업을 주도하게 된 데에는 전후 국가의 대민 지배정책의 방향과도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당시 국가정책은 민간경제와 생활에 대해서 국가의 작위적인 공권력 개입을 가급적 억제하는 정책, 곧 ‘與民休息’정책을 기조로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반층은 개간전에 대한 조세징수의 유예라는 권농정책의 틈을 이용하여, 혹은 국가 공권력의 개입 유보라는 ‘여민휴식’정책의 기조와 관련하여, 개간 혹은 소유 토지의 量案 등재를 기피하거나 보유 노비들을 호적에서 고의로 누락시킴으로써 전세 및 가호세의 징세 대상으로부터 제외되었다. 그렇지만 양반층의 이러한 행위는 국가가 파악할 수 있는 實結數 및 家戶數를 감소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부분은 국가의 공권력 행사 영역이었다. 양안과 호적이 양반층의 조직적인 이탈, 탈루 상황에서 제대로 작성되지 않으면서, 국가에서 정상적으로 지출하는 경상지출 부분에 대한 세입의 총량이 항상 부족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왕실 및 중앙 각 아문은 긴축재정을 실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처럼 양반층의 성장, 그리고 그들의 사회세력화의 추세는 국가의 운영방식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셈이다.001)金盛祐,≪朝鮮中期 士族層의 성장과 身分構造의 변동≫(高麗大 博士學位論文, 1997).

 이 시기 양반층의 사회세력으로서의 성장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사건으로는 그들의 군역 면역층으로의 전환과 호적, 號牌 기재 양식의 변화를 꼽을 수 있다. 우선 양반층의 군역 면역층으로의 전환과정을 살펴보자. 조선 초기 이래 군역은 양인층의 仕宦權 곧 양인층의 보편적인 권리로 인정받았다. 그렇지만 16세기 전반 이래 國役體制의 해체과정에서 良賤制的 신분구조는 무너져 갔으며, 良人皆役制에 입각한 군역 동원 방식 또한 변질되고 있었다.002)金盛祐,<16세기 國家財政 수용의 증대와 國役體制의 해체>(≪韓國史硏究≫97, 1997). 임진왜란 시기 관군이 일본 정규군에게 일방적으로 패배한 것은 양인 상층, 곧 양반층을 군역에 동원시켜 국방력을 유지하려 한 조선 초기 이래 누적되어온 국방정책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계기였다.

 그리하여 임진왜란 이후에는 양인층 이외에도 賤人層이 군역에 편성되는가 하면 국가에서 재정을 지원하는 訓鍊都監이 새롭게 설치되는 등 군역 및 군제운영에서 중요한 변화가 나타났다. 이러한 변화는 양인층만이 군역을 져야 한다는 양인개역제 원칙과 兵農一致 방식에 의한 군제운영 방식으로부터, 군역편성의 대상이 천인층까지 확대되고 養兵制 방식으로 군제를 운영하는 것으로 전환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군역 및 군제의 이와 같은 변화는 군역의 주요 대상층으로 간주되던 양반층의 면역 가능성을 넓혀주는 계기가 되었다. 16세기 이래 양반층의 면역추세는 대세를 이루었지만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그 대세를 추인받기에 이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에서는 여전히 양반층을 군역의 주요 대상층으로 파악하는가 하면 그들을 充軍시키고자 노력했다. 물론 국가의 이러한 정책은 양반층의 저항에 부딪쳐 번번히 무산되었다. 광해군 초반과 인조 초반에 각각 시도되었던 호패법과 校生考講政策이 실패로 끝난 것이 그러한 예이다. 이후 양반층은 면역층으로서의 지위를 국가로부터 부여받았으며, 살아서는 幼學을, 죽어서는 學生이란 직역을 공식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003)崔永浩,<幼學·學生·校生考-17세기 身分構造의 변화에 대하여->(≪歷史學報≫101, 1984).

 두번째 변화는 호적·호패 기재 양식이었다. 조선 초기 이래 국가의 인민 지배 방식은 양천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지만 양반층의 사회적 성장이 이루어지던 상황 아래에서 점차 그 규정성을 상실하고 있었다. 군역의 주요 대상층으로 파악되던 양반층이 면역층으로서의 합법성을 획득해 갔으며, 국역 면제층으로 간주되던 천인층이 새롭게 군역에 편제되어 가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국역편성과 관련하여 ‘有役者=良人’, ‘免役者=賤人’으로 전체 인민을 구분하던 조선 초기의 양천제적 신분구조로부터 ‘兩班=免役者’, ‘常民=有役者’로 구분하는 방식, 곧 班常制를 용인하는 형태로 신분구조가 전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변화는 호적과 호패의 기재양식에도 영향을 끼쳐 여성의 稱氏 대상자 혹은 角牌 착용 대상층이 양반으로 국한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축차적으로 진행되면서 양반층은 사회구조, 관습 전반에 이르기까지 영향력을 확대시켜 갔으며, 사회 전반을 주도하는 세력으로 자리잡았다. 양반층이 주도하는 이 시기의 사회구조를 士族支配構造라 부를 수 있다.

 임진왜란은 양반층의 사회적 성장 못지 않게 국가의 대민 지배방식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16세기 이래 사회적 현실관계를 반영하는 반상제가 국가의 주요 대민 지배방식이었던 良賤制的 신분구조를 밀어내고 중요한 사회신분구조로서 자리를 잡아갔다. 그렇지만 양반층과 상민층의 사회경제적, 정치사상적 차이가 노골적으로 표출된 계기는 임진왜란이었다. 양반층은 관군이 궤멸적 패배를 당하고 있던 전란 초기 상황에서 의병을 일으켜 전투에 임하는가 하면 향토방위를 위해서도 노력했으며, 전쟁의 소강기에도 納粟 혹은 軍功을 통해서 국가와 운명을 같이하는 계층으로서의 그들의 소임을 다했다. 반면 상민층은 일본군의 대대적인 침입으로 국가의 공권력이 와해된 상황에서 평소에 축적되어 오던 국가와 양반층에 대한 적대의식을 그대로 드러냈다. 임진왜란은 양반층과 상민층 양자의 지향과 생활방식이 현격한 차이가 있음을 확인시켜준 계기로 작용했다.

 따라서 임진왜란 이후 국가의 신분정책 또한 이러한 상황에 조응하여 전환되지 않을 수 없었다. 양반층에 대해서는 사회를 주도하는 특권층으로 인정해 주는가 하면 ‘封建的 存在’로서의 그들의 특수성을 부여해 주었다. 반면 상민층에 대해서는 村氓, 無識·無賴輩라고 폄하하는 경향이 늘어가다가 사족지배구조가 정착되는 추세에 비례하여 常漢(상놈)이란 호칭으로 고정되었다.004)李元翼,≪梧里集≫<別集>1, 引見奏事 인조 2년(1624) 2월 24일. 그리하여 양반층 주도 아래 전후복구사업이 완료되어간 17세기 전반 이후 전체 인민은 양반층과 상민층, 양 세력으로 재편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차별적인 인민 편제방식은 각종 受敎類에도 반영되는 등 국가의 준법제적 규정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005)≪受敎輯錄≫刑典 奸犯 康熙 辛亥(현종 12년;1671)承傳. 현전하는 호적을 중심으로 전형적인 사족지배구조가 확립된 17세기의 신분별 인구 구성을 검토해 보면<표 1>과 같다.

  양 반 중 인 양 인 천 인 기 타 합 계


산음 1606 13.75   40.92 41.66 3.67 100% 
1630 15.85   43.01 34.53 6.61 100% 
단성 1606 18.15   14.54 64.37 2.93 99.99%
울산 1606  2.4   50.5 47   100% 
서울 1663 17.0 7.6 22.5 52.9   100% 

<표 1>17세기 경상도 및 서울의 신분별 인구 구성비006)盧鎭英,<17世紀初 山陰縣의 社會身分構造와 그 變動>(≪歷史敎育≫25, 1975).
韓榮國,<朝鮮 中葉의 奴婢結婚樣態(上·下)-1606년의 蔚山戶籍에 나타난 事例를 중심으로>,≪歷史學報≫75·76, 77, 1978, 1979).
韓基範,<17世紀初 丹城縣民의 身分構成-戶籍分析을 中心으로->(≪湖西史學≫10, 1982).
조성윤,<17세기 서울 주민의 신분 구조>(≪鄕土서울≫54, 1994).

 대체로 17세기 전반∼중반에 이르기까지 신분별 인구구성은 양반이 10% 내외, 상민층 가운데 양인층 40%, 천인층 50% 내외였다고 생각된다. 특히 현종 4년(1663)에 작성된 서울 북부호적은 전체 신분을 顯, 作, 賤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이러한 구분은 양반층을 顯으로, 상민층 가운데 양인을 作으로, 천인을 賤으로 표시한 것으로 여겨진다. 전체 인민에 대한 이와 같은 3구분법은 종래 양인과 천인으로 2구분하던 양천제로부터 양반(顯)과 상민(作·賤)으로 2구분하는 반상제로 이행되는 과도기적 양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반상제는 이처럼 17세기의 호적 기재방식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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