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1. 신분제의 이완과 민중사회의 성장
  • 2) 17세기 위기 이후 대민 지배정책의 전환
  • (1) 국가의 대민 지배방식의 전환과 ‘여민휴식’정책의 철회

(1) 국가의 대민 지배방식의 전환과 ‘여민휴식’정책의 철회

 임진왜란 종결 이후 복구사업이 신속하게 전개되면서 전쟁으로 위축되었던 조선사회는 점차 정상을 되찾게 되었다. 사회가 자신감을 회복하는 것에 비례해서 국가의 대민 지배정책의 기조도 점차 변화되어 갔다. ‘여민휴식’정책이 철회되고 민간경제 및 사회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전환된 것이다. 17세기 국가의 대민 지배정책은 광해군, 인조 때와 효종, 현종, 숙종 때의 그것 사이에서 일정한 차이가 발견된다.

 우선 광해군 때의 정책을 살펴보면, 광해군은 자신이 왕세자로서 직접 전란을 경험한 바 있기 때문에, 광해군 때 국가정책의 방향은 선조 때의 그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광해군 재위 기간 동안 가장 개혁적인 정책으로 평가되던 호패법이 양반층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시행 3개월 만에 폐기될 정도였다. 광해군 때의 최대 성과는 경기지방에 제한적으로 실시한 大同法이었을 뿐이었다. 反正으로 집권에 성공한 인조 때의 정국은 광해군 때의 실정에 대한 비판과 반성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인조 때의 정국운영도 광해군의 그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집권 초기 강력한 개혁 의지를 가지고 추진한 호패법이 丁卯胡亂의 발발을 계기로 철폐되고 있었던 사례에서, 인조 때에도 ‘여민휴식’의 기조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인조 때 정국의 성격과 관련하여 이 시기 실시된 양안과 호적의 실결수 및 호구 파악 수준을 검토해 보자.

 인조 13년(1635)에 끝난 하삼도의 量田에 따르면 당시 양안상의 등재 토지는 임진왜란 이전의 88.7% 수준인 89만 5천 856결007)≪增補文獻備考≫권 141, 經界 1, 朝鮮.에 불과했다. 그리고 인조 26년에 작성된 戊子戶籍에서는 임진왜란 이전 戶摠, 口摠의 각각 49.8%(44만 1천 321호), 36.8%(153만 1천 365구) 수준에 머물러 있었을 뿐이었다.008)≪增補文獻備考≫권 161, 戶口考 1, 歷代戶口, 朝鮮. 양안과 호적상에서 제시된 수치만으로 볼 때 임진왜란이 경과한 지 50여년이 지나도록 전란의 피해는 극복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양안과 호적상의 수치가 실제 토지개간 정도나 인구의 증감 정도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것은 국가 공권력이 토지와 인민에 대해서 미치는 영향력, 즉 국가의 대민 지배력의 강도를 보여주는 데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여민휴식’정책의 기조가 인조 때에도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국가정책의 기조가 전환기를 맞이한 시기는 효종 때였다. 北伐論의 대두와 적극적인 전쟁 수행 의지의 표출은 그러한 시대 분위기를 반영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경기, 강원도에 머물러 있던 대동법이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까지 확대 실시되는가 하면, 銅錢의 주조와 유통을 위한 지속적인 노력, 公奴婢推刷 사업의 실시와 같은 일련의 정책을 통해서 국가의 대민 지배강도는 이전 시기보다 한층 높아졌다. 이와 같은 국가의 정책기조는 현종 때에도 지속되어, 전라도 山郡에까지 대동법이 확대 실시되고 良役 자원의 확보를 위한 획기적인 방법인 奴婢從母法이 시행되기에 이를 정도였다. 이와 아울러 호적이 매 式年마다 작성되고 국지적이나마 양전사업 또한 계속해서 추진되었다. 당시 국가의 대민 지배력의 강도를 확인하기 위해서 효종, 현종 때, 그리고 숙종 전반기에 작성된 호적의 호구 증가 추이를 살펴보자.

연 대 가 호 인 구 호당 구수 비 고
인조 26년
(1648)
441,321 1,531,365 3.47구 *한성부에서 작성한 民口總數(533,720호,
 1,793,701구)와 오차가 많이 발생.
*‘與民休息’政策의 추진 시기.
효종 8년
(1657)
658,771 2,290,083 3.48구 *국가의 대민 지배방식의 변화:北伐論
*효종 즉위년(1649)≪經國大典≫의 5家1統法
 시행안 제시, 효종 9년에 재확인.
현종 10년
(1669)
1,313,453 5,018,644 3.82구 *현종 7년(1666) 호적법을 엄격하게 운영:
 脫漏者에 대해서는 全家徙邊刑에 처함.
*한성부에서 작성한 民口總數(1,313,652호,
 5,018,744구)와 오차가 크지 않음.
현종 13년
(1672)
1,176,917 4,695,611 3.99구 *현종 11·12년(1670∼71)의 庚辛大飢饉을 경험.
숙종 4년
(1678)
1,342,428 5,246,972 3.91구 *숙종 원년(1675) 5家作統法의 전면 실시.
*紙牌法의 실시.
숙종 19년
(1693)
1,546,474 7,188,574 4.65구 *숙종 7년(1681) 女子入籍法을 엄격하게 적용.
숙종 25년
(1699)
1,293,083 5,722,300 4.46구 *숙종 21·22년(1695∼96) 乙丙大飢饉과 이후의
 전염병 유행으로 인구가 급격하게 감소.

<표 2>17세기 호적상의 호구 증가 추이

 인조 후반기까지 임진왜란 이전 호구수의 절반에도 못미치는 수준에 머물러 있던 호구수는, 효종 때에 접어들면서 급증하기 시작하여 불과 9년 만인 효종 8년(1657) 戶數 49.3%, 口數 49.6%가 증가하고, 그로부터 12년 후인 현종 10년(1669) 호수 99.4%, 구수 119.2%가 증가하는 등 급증추세를 보이다가 이후 점차 고정되는 경향을 보인다. 五家作統法의 실험 운영과 戶籍脫漏者에 대한 全家徙邊刑의 적용과 같은 강력한 호구정책에 힘입어 현종 때에는 主戶로 등재 가능한 실제 가호에 근접하는 수치가 확보될 수 있었던 것이다. 1가호당 평균 구수의 증가추세에서도 국가의 호구 파악 강도의 추이를 살펴볼 수 있다. 즉 호당 평균 구수는 3.47명(인조 26년)→3.48명(효종 8년)→3.82명(현종 10년)→4.46명(숙종 25년)으로 계속 증가추세를 보이다가 이후 고정되고 있다. 호적 등재상에 나타난 호구수를 통해서 국가의 대민 지배력의 강도를 측정할 때, 임진왜란 이후로부터 인조 때까지가 동일한 정책적 기조가 유지된 시기로, 그리고 효종, 현종 때 이후 시기가 동일한 시기로 구분된다고 생각된다. 요컨대 효종, 현종 때에는 임진왜란 이후 인조 때까지 국가의 주요 정책기조로 활용되던 ‘여민휴식’정책이 철회되고, 민간경제와 사회에 대한 국가의 개입이 한층 강화되는 시기로 선회했다고 볼 수 있다.

 효종 때 이후 국가의 강력한 대민 지배정책의 실시는 양반층에게는 결코 유리할 것이 없었다. 그것은 그들의 경제적 기반인 토지와 노비가 국가의 공권력 아래 노출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부세운영과 관련되는 한 국가는 양반층을 철저하게 보호해 주었다. 良役弊端의 모순이 점증하던 이 시기, 이 문제 해결에 임한 국가의 자세에서 그러한 사정을 읽을 수 있다. 양반층이 군역의 면역층으로 확인된 이후 군역, 곧 良役稅는 하층 양인층 일반이 부담해야 하는 일종의 신분세로 기능했다. 게다가 효종, 현종 때 이래 국가의 호구 파악의 강도가 높아지면서 호적 등재 가호수가 늘어나게 되었다. 바로 이 때 대동법 실시 이후 자체 재원조달의 기반을 빼앗긴 각 관청들은 새로운 재원으로 양역세를 주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효종 때 이후 양역세 징수와 관련된 각종 모순이 커져갔으며, 그와 관련해서 몰락하는 양인층도 증가하고 있었다. 16∼17세기 전반까지 농민층에게 피해를 집중시킨 貢物防納 폐단의 자리를 양역세가 대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양역폐단이 중요한 사회모순으로 부각되자 국가에서는 양역폐단을 제거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양역세를 양인층의 신분세, 곧 人丁稅로 고정시킬 것이 아니라 양반·상민 구분없이 모든 가호에서 부담하는 부세, 곧 家戶稅로 전환시키자는 주장이 그 과정에서 대두되었다. 戶布論이 그것이었다. 이 시기 가장 대표적인 호포론이라고 할 수 있는 兪綮의 호포론을 통해 당시 양반층이 이해한 호포론의 내용을 살펴보자.

호포론 주장의 뜻은 添丁에 있지 않고 均役에 있으며, 富足에 있지 않고 救急에 있으며, 士族을 侵削하는 데 있지 않고 영원히 免役을 허락하는 데 있다(≪孝宗實錄≫권 21, 효종 10년 2월 갑신).

 유계의 호포론은 士族戶에 대해서도 收布를 허용하되 양반층의 면역이라는 이전 시기의 추세를 철저하게 보호하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당시 대부분의 양반층은 양역세의 가호세로의 전환을 촉구한 유계의 호포론에 대해서 거부반응을 보였다. 양반층은 일반 상민층과는 다른 특권 신분으로서 신분세인 양역세를 부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부세운영과정에서도 일반 상민층과는 차이가 있어야 한다는 명분론이 대세를 이루었다. 그리하여 양반층의 면역을 전제로 한 호포론은 실행에 옮겨질 수 없었다. 호포론의 논의과정에서 확인되듯이 효종 때 이후 국가에서는 대민 지배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양반층의 존재를 인정하고 사회 주도세력으로서의 그들의 역할과 특권을 유지, 보호하는 방향에서 결정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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