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1. 신분제의 이완과 민중사회의 성장
  • 2) 17세기 위기 이후 대민 지배정책의 전환
  • (2) 공동납체제로의 전환과 18∼19세기 호적 운영의 변화

(2) 공동납체제로의 전환과 18∼19세기 호적 운영의 변화

 임진왜란 이후 새로운 농법으로서의 移秧法이 삼남지방을 거쳐 경기도 일원까지 확대 보급되고 동일 경작지에서 이모작이 가능해지면서 이전 시기보다 농업 생산성이 크게 향상되었다. 이러한 농업 생산성의 향상을 바탕으로 임진왜란 이전 불완전한 5일장 체제로 형성되던 場市가 각 지역과의 유기적인 연계가 가능한 5일장 체제로 정착되면서 상품화폐경제 또한 한층 발전하게 되었다. 게다가 장시를 목표로 한 상업작물의 재배가 늘어나는 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에 힘입어 인조 때 이래 시험 유통 단계에 머물러 있던 금속화폐가 숙종 때에 이르러 전국적인 시행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다. 농업 생산력의 발달과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은 토지의 재화로서의 가치를 상승시켜 토지자본의 비중 또한 높아져 갔다. 이 과정에서 16세기 이래 17세기 전반기까지 양반층의 가장 중요한 재산으로 여겨지던 노비 노동력의 재산가치는 점차 약화되고 있었다.

 집약적 농법의 발달과 토지 생산성의 증대에 힘입어 16세기까지 선진적인 농법으로 인정받았던 粗放的인 大農體制 아래 경영되던 農庄의 중요성도 점차 낮아졌다. 농장주의 감독 아래 노비 노동력을 동원하여 생산이 이뤄지던 강제적인 노동 형태, 곧 농장제가 역사적으로 해체되어갈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리하여 생산과정에서의 상대적인 자율성이 보장되는 竝作制가 농장을 대신하여 확산되었다. 병작제 아래에서의 作人은 主家의 인신적 예속을 받는 노비 노동력으로만 구성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노비 노동력의 중요성은 더욱 줄어들었다. 이러한 정황 아래 양반층이 토지보다 노비를 주요 재산으로 고집해야 할 이유가 소멸되어 갔다. 농장의 해체와 더불어 노비의 해방 가능성 또한 한층 높아지고 있었다.

 민간경제의 발달은 임진왜란 이후 국가의 대민 지배정책의 기조였던 ‘여민휴식’정책에 의해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여민휴식’정책 아래에서는 국가가 민간경제의 자율적인 성장을 최대한 보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개간이 활발하게 추진되는가 하면 향상된 영농조건 속에서 인구 또한 급증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16세기 이래 농민층 몰락의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던 공물방납의 폐단이 대동법의 실시로 대부분 전세로 전환되어 가면서, 농민층의 재생산기반 또한 이전보다 안정적인 형태를 갖추어 갔다. 민간경제에 대한 국가 개입의 약화, 유예 상황에서 민간경제의 제영역이 발전을 거듭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민간경제의 제영역이 안정, 발전되어 가는 상황에서 국가는 대민 지배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하게 되었으며, 국가 공권력 행사의 폭 또한 한층 넓어지게 되었다. 효종 때 이후 국가의 대민 지배강도를 보여주는 호적상의 호구 수치가 눈에 띄게 증가한 것이 그러한 상황의 반영이었다. 현종 때를 거쳐 숙종 초기까지 이러한 정책기조는 계속 유지되었다. 특히 숙종 초년에 실시한 5家統法과 紙牌法, 그리고 女子入籍法은 임진왜란 이후 대민 지배와 관련한 여러 방식과 운영을 집약한 국가정책이었다.009)권내현,<조선 숙종대 지방통치론과 정책운영>(≪역사와 현실≫25, 1997). 숙종 초반기는 국가의 대민 파악 강도가 절정에 이른 시기가 아닌가 여겨진다.

 그렇지만 숙종 전반기까지 지속적으로 추진되던 국가의 적극적인 민간개입 정책은 이후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되었다. 그 타격은 다름 아닌 전지구적 현상으로 발생하여 조선사회에까지 강타한 ‘소빙기’ 기후현상에서 기인한 것으로, 이 때를 ‘17세기 위기’로 부른다.010)‘17세기 위기’론은 일찍이 서양사학계에서 논의된 이래, 1980년대 이후 한국사학계에서도 조심스럽게 논의되고 있는 주제이다. 그 내용은 이 시기 이상저온이 장기간에 걸쳐 지속된 ‘소빙기’현상이 도래했으며, 그에 따라 사회경제구조, 그리고 정치사상적 측면에 이르기까지 많은 변화가 초래되었다는 것이다(羅鐘一,<17세기 위기론과 한국사>,≪歷史學報≫94·95, 1982 및 李泰鎭,<‘小氷期’(1500∼1750년)의 天體 現象的인 원인-≪朝鮮王朝實錄≫의 관련 기록 분석->,≪國史館論叢≫72, 1996).
실록의 기록을 중심으로 17세기 심각했던 재난기를 확인해 보면, 광해군 4년(1612)∼5년 6월, 인조 21년(1643) 4월∼22년 2월, 효종 3년(1653)∼4년 3월, 현종 원년(1600) 4월∼2년 4월, 현종 5년 3월∼6년 겨울, 현종 8년 4월∼9년 봄 등을 들 수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심각했던 대재난으로는 현종 11·12년의 庚辛大飢饉과 숙종 21∼25년까지의 乙丙大飢饉을 흔히 꼽는다.
소빙기적 기후 현상에 의해 직접 영향을 받은 이상저온, 냉해 발생은 효종 때 이후 점차 활성화되었지만 현종 때 이후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하고 있었다. 특히 140만여 명의 인명피해를 낸 현종 11∼12년(1670∼1671)의 庚辛大飢饉과 400만여 명 이상의 인명 피해를 낸 숙종 21∼25년(1695∼1699)의 乙丙大飢饉은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대재난이었다. 이 시기 재난은 이상저온, 냉해로부터 기인한 흉년의 도래, 기근 발생, 기민 발생으로 인한 영양 결핍자의 증가, 면역기능의 저하, 전염병의 창궐이라는 현상으로 연결되면서 대규모의 인명피해를 발생시켰다는 데 그 특징이 있었다.011)김성우,<17세기의 위기와 숙종대의 사회상>(≪역사와 현실≫25, 1997). 이와 같은 전근대적인 재난의 양상은 영조 전반기까지 지속되어 전염병의 창궐과 대유행이 주기적으로 반복되었다.012)趙 珖,<19世紀 民亂의 社會的 背景>(≪19世紀 韓國傳統社會의 變貌와 民衆意識≫, 高麗大 民族文化硏究所, 1982).

 소빙기에 의한 자연현상으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은 이러한 재난은 당시 인간들의 과학지식과 노력으로는 극복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재난기에는 국가의 구휼, 구료사업 또한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이상저온과 냉해가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그로 인해 흉년이 물러나고 전염병이 가라앉을 때까지를 기다리면서, 그리고 재난에 대한 인간의 자연 치유력이 회복되기를 기다리는 것 이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특히 전체 인구의 25% 이상의 인명피해를 낸 숙종 21∼25년의 을병대기근과 이후 천연두·홍역의 피해까지 가중된 숙종 31∼35년에 이르는 재난이 연이어 발생하게 되면서, 경제 및 사회 영역 전반에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되었다. 15년여에 걸쳐 진행된 이 시기의 대재난에 직면하여 국가는 대민 정책을 근본적으로 수정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국가의 적극적인 대민 지배정책으로부터 간접지배 형태로의 전환이 그것이었다.013)乙丙大飢饉이 한창이던 숙종 23년(1677) 이조판서 崔錫鼎은 10조에 이르는 時弊 改革案을 제출했는데, 그 가운데 부세운영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주목할만한 개혁안이 제시되었다(≪肅宗實錄≫권 31, 숙종 23년 정월 정묘).
(1) 田稅와 관련된 개혁안
 1조:量田을 실시할 때 敬差官을 파견하지 말고 수령의 책임 아래 양전을 추진할 것.
 7조:敬差官 踏驗을 폐지하고 중앙에서 각 도 별로 給災하여 수세액의 다과를 살필 것.
(2) 大同法과 관련된 개혁안
 4조:황해도에 대동법을 확대 실시할 것.
(3) 軍制 및 良役變通과 관련된 개혁안
 3조:良役弊端을 이정하기 위해서는 軍額을 감축하고, 奴婢從母法을 실시하여 양역자원을 확보할 것.
최석정이 제출한 개혁안은 국정운영이 마비될 정도로 재난이 극심했던 당시 상황에서 곧장 정책에 반영될 수 없었지만, 향후 국가의 국정운영의 방식과 관련하여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주었다는 점에서 주의를 요한다. 황해도 대동법은 숙종 34년에 실시됨으로써 결실을 보았고, 전세와 관련된 개혁안은 이후 比摠制 방식으로 발전했다. 양역변통론과 관련된 개혁안은 이후 釐正廳이 설치되는 계기로 작용했으며 결국 均役法 시행을 끝으로 일단락되기에 이르렀다. 요컨대 소빙기적 기후 현상의 도래와 그로부터 영향을 받은 대재난 상황에서 제기된 최석정의 시폐 개혁안은 국가의 대민 지배방식을 적극적인 형태로부터 간접적인 형태로 전환할 것을 촉구하는 매우 포괄적인 시안이라는 점에서 중요했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국가는 그동안 각 세력의 이해관계 때문에 추진이 지연되고 있던 각종 개혁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가 하면, 사회의 장기지속적인 안정을 위해서도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014)김성우, 앞의 글(1997b). 임진왜란 이후 왕실 재정의 수요 증대와 관련하여 각종 폐단을 야기하던 宮房田의 折受 문제가 숙종 21년 乙亥定式으로 일단락되는가 하면, 황해도 지방에까지 대동법이 실시되는 등(숙종 34년;1708) 각종 개혁이 추진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 시기 가장 어려웠던 개혁은 良役變通이었다. 그 이유는 조선 초기 이래 군역이 양인층의 신분을 결정하는 신분세의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양역폐단의 개혁 방안으로 제시된 戶布法, 結布法, 그리고 口錢法과 같은 大變通論은 良役稅를 家戶稅, 혹은 田結稅로 일원화시켜 신분세로서의 기능을 정지시키는 것을 최종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17세기 전반 이래 국가가 추구해온 신분정책, 곧 양반층만을 특권세력으로 인정, 면역층으로 간주하던 신분정책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 이유에서 양역세 운영과정에서 班·常의 신분적 차이를 확인받으려 한 양반층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쳐 양역변통론은 난항을 거듭하였다.

 그렇지만 17세기 중반 이후 18세기 전반에 이르기까지 활성화된 소빙기 활동으로 이상저온과 냉해 발생, 기근과 전염병의 유행이라는 대재난의 악순환 상황에 직면하여 사회 분위기는 극도의 혼란 상태에 빠져들었다. 그럼에도 당시 최대 모순으로 등장한 양역폐단은 양반층의 저항에 부딪쳐 제대로 이정되지 않은 채 표류하고 있었다. 최고 집권자인 영조가 “양역세를 이정하지 않으면 조선이 망한다”고 인식할 정도로 양역변통 문제와 사회의 위기 상황은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가운데 위기를 극대화시켰다. 이러한 혼란 상황과 위기의식이 증폭되어가는 가운데 양역폐단에 대한 개혁작업이 가속을 받게 되었다. 그 첫 성과는 숙종 30년(1704) 釐正廳에서 개혁안으로 제시한<5軍門軍制 變通節目>·< 水軍 變通節目>·<軍布均役 變通節目>, 그리고<校生落講者 徵布節目>등이었다. 여기에서는 신분세로서의 양역세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 곧 반상적 모순으로부터 기인한 양역세의 편중 부과라는 문제에까지 접근한 것은 아니었지만, 군제 변통, 군액 감축, 군포의 균일화, 교생층의 낙강 수포 등 당시 현안이 된 많은 문제를 제기하여 그 해결점을 찾으려 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이후에도 양역변통론은 국가 차원에서 계속 논의되어 숙종 37년<良役變通節目>으로 그 내용이 정리되었다.<양역변통절목>은 향후 양역 개혁 방안이나 부세운영, 그리고 국가의 신분정책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서 영향을 끼칠 중요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은 里定法의 실시와 관련된 문제였다. 이정법은 군역자원에 대한 국가의 개별 인신적 파악 방식을 지양하고 面 혹은 里 단위에서 양역세를 공동납 형태로 징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015)金俊亨,<18세기 里定法의 전개-村落의 기능강화와 관련하여->(≪震檀學報≫58, 1984). 이 방식은 국가가 이전처럼 부세징수과정에 직접 개입하는 방식으로부터 면과 리를 단위로 한 공동징수방식으로 전환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때 면, 리 단위로 확정, 부과된 부세는 군현→도→전국 단위로 집계되어 국가재정의 세입재원으로 활용되었다.

 따라서 이정법은 국가재정의 운영방식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국가에서 필요한 재원인 田·民을 양안과 호적 작성으로 파악한 후 그것을 기초로 전체 국가의 재정규모를 산정하고 그 범위 내에서 지출을 제한하는 형태(量入爲出), 곧 摠額制에 의한 재정운영이라는 점에서는 이전 시기의 재정운영 방식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렇지만 이전 시기의 부세운영이 토지와 인민에 대한 국가의 개별적인, 직접적인 파악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면, 이후 시기의 그것은 면, 리 단위로 징세 단위가 상향 조정되어 국가의 공권력이 미치는 범위가 면, 리 단위로 제한되었다는 점에서 재원의 파악 방식에서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이후 공동납은 전세와 환곡에 이르는 모든 부세에 이르기까지 확대 적용되었다. 그에 따라 人丁稅는 良役의 庚午摠(영조 26년;1750), 公奴婢의 庚申摠(영조 16년;1740)에 의한 定摠法으로 시행되는가 하면,016)全炯澤,<公奴婢 推刷政策의 전환>(≪朝鮮後期奴婢身分硏究≫, 一潮閣, 1989). 전세는 比摠制 방식으로, 환곡은 還摠制 방식으로 운영되는 등,017)金容燮,<朝鮮後期의 賦稅制度 釐正策-18세기 중엽∼19세기 중엽>(≪韓國近代農業史硏究≫(上), 一潮閣, 1984). 모든 부세가 공동납 형태로 징수되었고 그를 기반으로 국가재정은 총액제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부세자원이 일정 규모 내에서 고정되어 총액제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면, 리 단위 아래에서의 개별 인민과 토지는 상대적으로 자율성을 획득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토지와 인민에 대한 국가의 직접적인 개입이 미치지 않게 되었음을, 그리고 국가의 적극적인 지배가 어려워졌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공동납 형태로 부세징수방식이 전환하고 그에 따라 국가의 대민 지배정책이 전환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양역변통안은 영조 26년 均役法의 실시로 최종 확정되었다. 양인층에 대해서 군포 1필만을 징수하고 그에 따른 부족한 재원은 田結稅와 給代 등을 통해서 충당시키고자 한 균역법에서는 신분제 운영과 관련하여 2가지 목적이 관철되었다. 양인층에게는 과세부담을 군포 2필로부터 1필로 줄여주고, 신분세로서의 양역세를 그대로 유지시켜 줌으로써 양반층의 저항을 완화시켰다는 점에서, 양인층과 양반층 양자의 입장이 동시에 고려된 것이었다. 그렇지만 양역세의 유지라는 목적을 관철한 양반층은 향후 신분제 운영과 관련하여 중대한 양보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것은 부족한 양역자원을 지속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 부족한 수만큼의 양인을 재생산하는 문제에 대한 추인이었다. 즉 노비종모법의 허용과 公·私役 均一化 추세를 추인해준 것이다. ‘一賤則賤’法에 의해 노비가 확대 재생산되어 오던 오랜 관행이 노비종모법의 실시로 차단되고,018)平木實,≪朝鮮後期奴婢制硏究≫(지식산업사, 1982).
全炯澤,<公私奴婢 身分規制의 緩和>(앞의 책).
노비의 신공과 양인의 양역이 布 1필로 균일화되면서, 양인층의 노비로의 전환 가능성은 줄어들었고 노비와 양인 사이의 신분적 계선 또한 사라지게 되었다. 양반층의 면역층으로의 최종 확인, 그리고 양인과 노비의 신분적 차별의 철폐를 전제로 실시된 균역법은 17세기 이후 대세를 이룬 반상제에 의한 신분구조를 국가 차원에서 마지막으로 추인해준 것이기도 했다. 곧 良人齊一化에 기반한 조선 초기 국가의 국역 부과 방식이 이제 常民齊一化를 기반으로 한 그것으로 전환했음을 공식적으로 선포한 것이라 할 수 있다.019)金盛祐,<사회경제사의 측면에서 본 朝鮮中期>(≪大丘史學≫46, 1993).
조선 초기 이래 국가의 국역체제 운영의 주요 기조는 齊民政策이었다. 이 때 국역의 주요 담당자는 양인층이었다. 즉 국역체제는 양인층을 대상으로 하여 그들을 제민정책 아래 포섭시킴으로써 운영되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조선 초기 국가의 신분정책은 良人齊一化를 바탕으로 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16세기 중반 아래 국역체제가 동요, 변질되면서 양반층은 국역에서 면제되고 비양반층이 국역을 담당하게 되었다. 비양반층, 곧 상민층이 국역의 주요 담당층으로 고정되면서 양인제일화에 기초한 조선 초기의 국역체제 또한 점차 상민 중심으로 운영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추세는 균역법 실시 단계에서 국가의 주요 정책으로 추인받기에 이르렀다. 그런 점에서 18세기 중반 이후 국가의 신분정책은 常民齊一化를 바탕으로 운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반상제에 대한 국가의 사실상의 추인은 이제 부세운영과정에서 더 이상 국가적 신분 규범으로서의 양천제가 기능할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조선 초기 이래 국역 편성의 전제는 양천제였다. 그리하여 전체 인민은 국역 편성 방식에 따라 양인과 천인으로 호적에 등재되었다. 반면 반상제는 양천제와는 달리 사회적 현실관계를 반영하는 신분제였으므로, 여기에는 국가의 국역 편성 방식이나 부세징수와 관련된 어떠한 내용도 내포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하여 조선 초기 이래의 호적 기재 방식, 곧 양인 개개인이 국가에 부담해야 하는 국역에 따라 職役을 부여하던 방식에도 많은 변화가 나타났다. 부세징수방식이 공동납체제로 전환하고 양천제가 신분적 규정성을 상실하면서 호적상의 직역이 갖는 의미가 현저하게 약화되었던 것이다. 면, 리 단위로 호구수의 총액, 곧 戶摠과 口摠이 정해지면, 그 다음 단계에서 누가 어떤 직역을 갖고 있는가는 문제되지 않았다. 호총과 구총이 정해진 범위 내에서 양역세를 부담해야 할 직역을 책정, 고정시켜두면 그만이었다. 그것은 정액 이외의 인민에 대한 호적상의 직역 기재가 이전보다 자유로워졌음을 뜻했다. 호적 기재시 직역의 冒稱, 冒錄, 그리고 조작이 그만큼 쉬워지게 되었던 것이다.

 공동납체제으로의 전환과 반상제의 사실상의 추인은 호적작성 과정에서 국가의 개입을 약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호적작성에 대한 양반층의 관심이 줄어드는 계기로도 작용했다. 호적은 해당 지역에 배당된 호총, 구총을 채우기 위해서 작성되고 있었을 뿐 호적상의 직역이 현실적인 사회관계를 반영하는 신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호적작성의 주체도 수령과 그 아래 행정 담당자인 書吏와 面任, 里任으로 고정되어 갔다. 이제 수령과 서리, 그리고 면, 리임의 주관 아래 혹은 그들의 결탁 아래 호적상의 직역이 결정되었다. 그리하여 상업이나 수공업에 종사하는 피지배층일지라도 직역상으로는 얼마든지 양반이나 중인의 직역인 幼學, 혹은 業武를 지칭할 수 있게 되었다.020)崔承熙의<朝鮮後期 身分變動의 事例硏究-龍宮縣 大丘白氏家古文書의 분석>(≪邊太燮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1985)에 의하면 大丘白氏家는 18세기 말 양인신분에서 중인신분(業武)으로, 19세기 초·중엽에 다시 양반신분(幼學)으로 상승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지방의 목화를 서울에 내다파는 목화상인이었을 뿐이다. 白承鍾의<慶尙道 丹城縣 都山面 文太里의 私奴 興宗과 興龍 一家-1678년부터 1789년까지->(≪震檀學報≫70, 1990)에 의하면 18세기 후반 중인층(業武)으로 직역이 기재된 私奴 興龍 후손의 실제 직업은 礪石匠이었다. 호적상에 양반호 혹은 중인호로 기재된 자들의 상당 부분은 이같은 冒錄層이었을 것이다. 신분과 직역의 분리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잦은 재난의 발생으로 納粟이 권장되면서 직역 유지의 엄격성은 더욱 의미를 잃어 갔다. 納粟帖은 지방 군현 단위로 강제 할당된 후 富民을 대상으로 지방 차원에서 발급되는 형편이었다. 따라서 상민층 일반의 관심과는 별개로 수령권 차원에서 직역 상승이 강제되는 경우가 종종 나타나기도 했다.

 호적상에 나타나는 직역의 모칭, 모록, 조작의 시기별 변동 추이를 확인하기 위해 현존하는 각 지역의 호적상의 직역, 특히 幼學戶의 증가 상황을 분석한 내용을 살펴보면<표 3>과 같다.

  1678 1684
1687
1690
1711
1717
1729
1732
1744
1747
1750
1783
1786
1789
1795
1798
1801
1813 1825 1843 1858
1861
1867 1876
大丘府
(四方博)
  3.8   11.5   28.0         63.1    
大丘府
(金泳謨)
  4.3     9.8   17.9         30.7  
丹城縣
(李俊九)
5.4   14.2   22.3 29.1              
丹城縣
(井上和枝)
                38.9        
彦陽縣
(任敏赫)
    9.3       49.8 58.4     77.7    
鎭海縣
(武田幸男)
                48.2 50.5     73.4

<표 3> 공동납체제로의 전환 전후 시기 호적상의 유학호 구성비 (단위:%)021)이<표 3>은 李俊九,<18·19세기 身分制 변동 추세와 身分 지속성의 경향>(≪韓國文化≫19, 1997)의<표 1>各 時期別·地域別 幼學戶의 占有率에서 재구성한 것임.

 <표 3>에 의하면 양반직역인 유학호는 里定法 실시(1711년) 이후 시기∼均役法 제정(1750년) 이전 시기 사이에서 증가하는 현상이 목격된다. 이후 유학호는 가속을 받으면서 급증추세에 있었다. 18세기 전반을 기점으로 한 극심한 직역 변동 추이는 免役戶인 양반호와 중인호의 급증, 有役戶인 양인호의 급감, 그리고 천인호의 소멸로 나타나고 있었다.022)호적 분석에 의한 이와 같은 결론은 四方博,<李朝人口に關する身分階級的觀察>(≪朝鮮經濟の硏究≫3, 1938) 이래 대부분의 호적 연구자들 사이에서 동의를 얻고 있다. 그러한 연구 성과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金容燮,<朝鮮後期에 있어서의 身分制의 動搖와 農地所有>(≪史學硏究≫15, 1963).
鄭奭鍾,<朝鮮後期 社會身分制의 變化-蔚山府 戶籍臺帳을 중심으로->(≪朝鮮後期社會變動硏究≫, 一潮閣, 1983).
金泳謨,<朝鮮後期의 身分構造와 그 變動>(≪東方學志≫26, 1981).
李俊九,<朝鮮後期 兩班身分 移動에 관한 연구-丹城帳籍을 중심으로->(≪歷史學報≫96·97, 1982·1983).
이러한 연구 경향을 비판하면서 그 대안으로 향촌사회사의 성과와 호적의 직역 변동 추이를 비교 검토, 실제 양반호의 구성 비율을 추적한 연구로는 李泰鎭,<朝鮮後期 兩班社會의 變化-신분제와 향촌사회 운영구조에 대한 연구를 중심으로->(≪韓國社會發展史論≫, 一潮閣, 1992)가 있다.
그 실례로 18, 19세기 울산지역 호적상의 신분 구성비를 살펴보면<표 4>와 같다.

연 대 양 반 호 상 민 호 노 비 호 총 호 수
영조 5년(1729) 168호(26.3%) 382호(59.8%) 89호(13.9%) 639호(100%)
영조 41년(1765) 225호(41.0%) 313호(57.0%) 11호(2.0%) 549호(100%)
순조 4년(1804) 347호(53.5%) 296호(45.6%) 6호(0.9%) 649호(100%)
고종 4년(1867) 349호(65.4%) 181호(34%) 3호(0.6%) 533호(100%)

<표 4>18, 19세기 울산지역 신분별 인구 구성비023)鄭奭鍾, 앞의 글,<표 2-1>時代別 身分階層別 戶口比率表를 재인용.

 임진왜란 이후 최초로 작성된 丙午戶籍(선조 39년;1606)에 의하면 울산지역은 양반호 2.5%, 양인호 50.5%, 천인호 47%로 구성되는 등 소수의 양반층에 의한 다수의 양인 및 노비 지배가 가능한 전형적인 사족지배구조의 형태를 보이고 있었다. 그렇지만 18세기 이후 이 지역 직역 변동 추세는 다른 지역에서 나타나는 호적상의 변화상, 곧 免役戶의 급증, 有役戶의 급감이라는 양상이 나타난다. 그런데 앞서 확인한 바와 같이 이러한 양상이 이정법 실시를 계기로 본격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정법은 국가의 부세 운영 방식의 전환뿐만 아니라 호적상의 직역 기재 방식에 이르기까지 일대 전환을 재촉했던 사건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이정법 실시의 역사적 의의를 읽을 수 있다.

 그러면 이정법 실시, 定摠法 확정 이후 시기, 곧 18세기 전반∼19세기에 작성된 호적상의 호구 수치를 검토함으로써, 당시 국가에서 파악이 가능했던 호구수, 곧 호총과 구총의 총액, 그리고 그를 바탕으로 한 18, 19세기 戶政의 운영 양상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연 대 가 호 인 구 호당
구수
비 고
숙종 19년
(1693)
1,546,474 7,188,574 4.65 *숙종 전반기 5家統法, 紙牌法, 女子入籍法의 지
 속적인 추진.
*임진왜란 이후 호구 파악 수치가 정점에도달.
숙종 25년
(1699)
1,293,083 5,772,300 4.46 *숙종 21·22년 乙丙大飢饉과 그 이후의 전염병
 유행으로 400여만 명이 희생.
숙종 31년
(1705)
1,371,890 6,138,640 4.47  
숙종 43년
(1717)
1,560,561 6,846,568 4.39 *숙종 37년<良役變通節目>반포, 里定法실시.
*호적 작성 및 인민 파악 방식이 共同納體制로
 전환.
영조 2년
(1726)
1,576,598
 
7,032,425
 
4.46
 
 
영조 14년
(1738)
1,662,219
 
7,040,480
 
4.24
 
*영조 11년<戶籍申飭事件>을 반포하여 엄격한
 호적 작성 강조.
영조 29년
(1753)
1,772,749 7,298,732 4.12 *영조 26년 定摠法의 실시, 均役法의 시행.
*常民齊一化 추세를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인정.
영조 44년
(1768)
1,679,865 7,006,248 4.17  
정조 원년
(1777)
1,715,371 7,238,523 4.22  
정조 10년
(1786)
1,737,670 7,356,783 4.23 *정조 6년 호적의 엄격한 관리를 지시.
순조 7년
(1807)
1,764,504 7,561,403 4.29 *조선왕조 사상 호구 파악 수치가 정점에 도달.
*정조대 국가의 지속적인 호구 파악 노력의 결과.
순조 19년
(1819)
1,533,515 6,512,349 4.25 *勢道政權이 들어서면서 왕권이 약화되기 시작.
헌종 3년
(1837)
1,591,963 6,708,529 4.21  
철종 3년
(1852)
1,588,875 6,810,206 4.29  
고종 원년
(1864)
1,703,450 6,828,521 4.01 *대원군 집권 이후 개혁정책의 추진.
광무 8년
(1902)
1,419,899 5,928,802 4.18 *大韓帝國 시기 호적 작성의 결과.

<표 5>18, 19세기 호적상의 호구 증감 추이

 <표 5>에 의하면 18세기 이래 조선왕조 최말기까지 국가의 호구 파악 수치는 영조, 정조 연간에는 호수 170만여 호, 구수 720만여 명으로 고정되는 추세를 보이다가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지속적인 감소현상이 나타나, 호수 150만여 호, 구수 670만여 명 정도에서 등락이 반복하면서 한말까지 그 추세가 계속되었다. 물론 당시 국가에서 파악한 호적상의 수치가 실제 가호수, 인구수를 직접 반영한 것이 아니라는 점은 마지막 호구조사 사업(광무 8년;1902)이 마무리된 지 23년 만인 1925년에 실시한 최초의 근대적인 인구조사에서 인구수가 1천 800만여 명이었다는 점에서 확인 가능하다. 조선 최말기까지 인구조사의 완전성은 40% 미만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024)權泰煥·愼鏞廈,<朝鮮王朝時代 人口推定에 關한 一試論>(≪東亞文化≫14, 1977). 조선시대 호적이 내포하는 이러한 상황을 전제로 할 때 이 시기 호구 통계 수치는 17세기 후반∼18세기 전반에 확립된 호총과 구총이 일정한 비례관계를 유지하면서 이를 기반으로 호적이 작성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국가의 호총, 구총의 확보 노력, 곧 국가의 대민 지배강도는 일정한 경향성을 보이고 있다. 강력한 왕권의 회복을 통해 개혁 지향적 정책을 추진하던 영조, 정조 때에는 18세기 중반에 확립된 호총과 구총이 유지되었지만, 勢道家門에 의한 국정 전반의 전횡과 왕권의 약화, 그리고 지배층의 부정부패가 확산되던 세도정권기에 접어들면서 점차 감소추세를 보여, 호총 150만여 호, 구총 670만여 명 수준을 가까스로 유지하고 있었을 뿐이다. 강력한 개혁정책이 추진된 대원군 집권기에 이르러 다시 수치가 올라갔지만 이후 대한제국기에 이르기까지 그 수치는 더욱 낮아졌다. 이를 통해서 조선시대 호적상의 호구수치는 국가의 대민 지배력의 강도를 보여주는 지표로 활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조선 후기 호적의 일반적인 경향에서 주목할 점은 숙종 21∼25년의 乙丙大飢饉 이후 호구수는 완만하게 상승하여 戶摠은 숙종 43년(1717) 경에, 口摠은 영조 29년(1753) 경에 이르러 17세기 정점에 도달한 호적상의 수치에 근접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시기는 이정법(숙종 37년;1711)과 정총법(영조 26년;1750)이 실시된 시기 사이에 놓여있었는데, 이를 통해서 균역법 실시 시기에서 국가가 최종 확정한 호총과 구총의 총액이 각각 170만여 호, 720만여 명 정도에서 고정, 유지되고 여기에 근거하여 양역세가 징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공동납체제로의 전환과 균역법 실시가 확정된 18세기 중반 이후의 戶政은 호총과 구총이 일단 정해지면 그 수치를 기준으로 증감이 이뤄지는 방향에서 운영되었다.025)≪增補文獻備考≫권 161, 戶口考 1, 歷代戶口 朝鮮. 호총과 구총이 일정한 비례관계를 유지하면서 호정운영에 이상이 발생하지 않는 한 면역층의 급증, 유역층의 급감이라는 호적상의 직역 변동 양상은 문제되지 않았다. 따라서 18세기 중반 이후 현전하는 각 지역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양반호, 중인호의 급증, 상민호의 급감이라는 직역 변동 양상은 공동납체제로의 전환 이후 변화된 호적 운영 방식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나타난 사회현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왕조의 마지막 개혁이 정조 때를 기점으로 실패로 끝난 이후 세도집권기로 접어들면서 부세운영과 관련된 三政 문란은 이전보다 훨씬 더 심각한 모순을 노정시켰다. 이 때 삼정은 田政, 軍政, 還政으로 표현되지만 19세기 가장 중요한 모순으로 등장했던 부세는 환정이었다. 균역법 제정을 계기로 부세와 관련되는 한 신분모순은 크게 줄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왕조 사상 신분모순이 가장 격렬했던 시점은 17세기 중반∼18세기 중반까지의 약 1세기 기간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는 소빙기의 활성화에 따른 자연환경적 위기상황의 도래와 반상제적 모순이 극대화되어 위기의 강도를 한층 강화시켰던 시기였다. 바로 이 시기 양반층을 제외한 양인층과 노비층은 단일 신분으로 고정되어 갔으며, 부세운영 과정에서의 개별 인신적 규정성이 사라지는 것과 추세를 같이 하여 호적에서의 신분과 직역이 상호 분리되어 갔다. 이처럼 양반층이 그들의 신분적 특권을 고수하고자 노력했던 바로 그 시기에 그들의 지배구조를 부정, 해체시킬 새로운 요인들이 그 태내에서 싹터 나갔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