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2. 민중의 사회적 결속
  • 3) 19세기 민중의 사회적 결속
  • (2) 민중조직과 농민항쟁

(2) 민중조직과 농민항쟁

 위에서 살핀 바와 같이 관의 부세자문기구로 변질된 향회가 민중의 의사를 결집하고 농민항쟁의 조직기반으로까지 전환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을 활용하여 자신들이 모순으로 느끼는 상황을 타개하고자 하는 주도층의 적극적인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들이 민중을 동원할 수 있었던 객관적 조건이 성숙되고 있었던 사실도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당시 새롭게 편성된 里洞조직의 기능강화라던가, 두레 등과 같은 농민조직의 출현 등 기층민들이 기존 지배층 중심의 공동체적 질서를 벗어나 새롭게 자신들의 결속력을 강화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 민중적 공동체 자체가 모두 농민항쟁의 조직으로 전환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 공동체적 질서가 민중의 결속력을 강화하고 민중이 그것을 통해 자신의 의사를 보다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던 사실을 주목하게 된다.

 아울러 앞서 보았듯이 18세기 이후에는 삶의 현장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기층민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같은 민중의 결속력의 기반이 되는 것이기도 하였다. 上言·擊錚에 대한 분석에서 드러나듯 17∼18세기를 거치며 합법적인 공간에서 민인들이 의사를 개진할 수 있는 여지가 크게 확대되고 있었으며, 민인들은 등소나 호소 또는 作亂을 통해 집단적으로 문제해결을 시도하기도 하였다.072)韓相權, 앞의 책, 228∼247쪽. 아직까지 초기 단계에서는 문제의 해결방식이 개인적인 차원 또는 친족을 동원하여 보복을 가하는 것이 일반적인 방식이었고 조직적인 차원으로까지 나아가고 있지는 못한 상태였음에 비해, 이제 19세기에 들면서 민인들은 개인적인 호소의 차원에서 벗어나 당시의 폐단을 개선해 줄 것을 요구하는 집단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민중의 조직적인 움직임에는 다양한 조직들이 이용되고 있었는데 향회가 여러 계층의 의사를 결집하는 기구로 운영되던 사실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그런데 향회가 당시 민인들의 이해를 전반적으로 반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때문에 민인들은 향회와는 별도의 조직을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해야 했으며 그러한 역할은 역시 村契나 두레와 같은 전래의 민중의 공동체적 조직이 담당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순조 26년(1826) 경주 민인들이 장기현감을 공격한 사건을 기록한 자료에는 ‘契民輩’라는 표현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는 거사과정에서 민인들의 촌계가 매개역할을 하고 있던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073)한명기,<19세기 전반 반봉건항쟁의 성격과 그 유형>(≪1894년 농민전쟁연구 2≫, 역사비평사, 1992), 194쪽.

 농민항쟁에서 민중조직이 이용되고 있던 예는 앞서 본 진주항쟁의 경우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당시 봉기의 주도자들은 面任·洞任 등에게 통문을 발송하였으며 그에 따라 훈장·면임·동임들이 자신의 관장하는 향촌내 공동체조직 내에서 농민을 선발하고 있었다. 이 때 민인을 동원하는 과정에서 항쟁에 참가하지 않을 경우 闕錢을 거두거나 혹은 가옥을 파괴하겠다는 협박이 가해지고 있었는데, 이는 항쟁과정에 촌락의 공동체적 구속력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처럼 향촌내 공동체조직이 봉기주도층과 연결됨에 따라 많은 민인들이 항쟁에 참여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농민층 내부에서는 계층분화가 계속되는 가운데 기존의 조직과는 다른 별개의 새로운 조직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농민항쟁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초군조직이 그것이다. 樵軍은 본래 생계유지를 위해 나무를 베어다 땔감으로 팔아서 살아가는 존재였다. 대다수의 초군은 생계가 어려워 머슴이나 婢夫로 살고 있었지만 소규모의 토지를 소유하거나 소작지를 경작하는 이들도 있었다. 각종 수탈이 농민의 안정을 위협하는 당시 상황에서 초군은 지속적으로 양산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 의미에서 농민은 초군의 모집단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들 초군조직은 일반 농민들이 공동노동을 위해 두레를 이용하고 있던 것과 마찬가지로 나름대로의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그 규모는 대체로 10여 명 정도로 구성되었지만 100여 명이 넘는 큰 조직도 있었고, 樵魁·座上·頭目 등으로 불리는 자들이 조직을 지휘하고 있었다. 이러한 특성으로 초군들은 대규모적인 공동노동조직을 통하여 집단화하고 세력화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 있었던 것이다.

 농민과 초군들은 공동노동조직으로 자체적인 결합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또 서로 계급적 기반을 같이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강한 결집성을 갖춘 채 향촌내 지배층인 토호·양반들에 의해 주도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봉기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이같은 모습은 1862년 농민항쟁 당시 함양 지방과 같은 경우 사족, 향원들이 중심이 되어 군현 차원에서 활동하고 있을 당시에도 50여 명의 咸陽民이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던 사실, 전라도 일대에서는 뚜렷한 주모자가 없이도 500∼600명 혹은 300여 명씩 둔취하면서 宣撫使의 巡行을 가로막고 자신들의 요구조건을 제시하였던 사실 등에서 확인된다. 또 懷仁에서 초군들이 士夫家에 저항하여 봉기하고 있는 것이라던가, 懷德의 초군 수천 명이 읍을 공격하고 더 나아가 淸州의 반촌을 공격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모두 읍회나 향회 등을 매개하지 않고서도 항쟁이 전면화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1862년의 농민항쟁의 조직기반은 다양하였다. 항쟁의 주도층과 관련해서 유형화해보면 첫째 향원(사족, 양반토호)들이 민중을 동원하는 경우, 둘째 기존 향회에 반발하는 주도층이 향회와는 별도의 모임을 통하여 항쟁을 이끌어나가는 경우(진주가 이같은 예에 속한다), 셋째 별도의 와주가 있어서 항쟁을 주도하는 경우, 농민(초군) 스스로 집단을 이루어 자신의 의사를 표시하는 경우 등이 그것이다.074)金仁杰, 앞의 글(1989), 66쪽. 이 때 그 조직기반이 확연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앞의 두 경우는 각 동(리)에 거주하는 동민들이 동원의 대상으로서 기존의 향촌조직이 이용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뒤의 두 경우에는 보다 민중적 기초가 강한 것이었지만 그 규모에 있어서는 군현 차원으로까지 확대되지는 못하였다. 진주의 경우 초군조직 자체도 초군청이라는 지방행정기구의 지휘 아래에 있던 공적 조직이었다는 점에서075)金容燮,<朝鮮王朝 最末期의 農民運動과 그 指向>(≪韓國近現代農業史硏究≫, 一潮閣, 1992), 363쪽. 당시 민중 일반이 처한 조건과 크게 다른 것은 아니었다.

 조직기반이라는 측면에서 보았을 때 1862년 농민항쟁의 주류적 경향은 향회와 같은 기존의 지배기구를 이용한 것이었다. 그리고 대부분 그 기본 동력이 되었던 일반 농민, 그들과 연결된 초군조직 등과 같은 민중조직이 아직은 공동체적 질서를 완전히 벗어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민중은 자신들의 결속에 기초한 항쟁과정을 통해 자신들의 처지를 자각하고 한단계 높은 항쟁의 주체로 전화해 갔다. 향회에 기반한 농민항쟁이 결국 당시 사회모순의 담당자였던 농민들의 이해를 충분히 대변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단기간의 항쟁으로 결말나고 있었음은 당시 사회모순의 기본 성격이 어떠한 것이었는가를 잘 말해 주는 것이었다. 1862년 농민항쟁의 준비와 초기 단계에서는 지주, 부농 등 진보적 요호부민들이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지만 항쟁의 발전과정에서 그들이 탈락하고 주도권이 빈농 초군에게 넘어가면서 보다 철저한 ‘반봉건운동’으로 나아가게 되었음은 이제 민중이 주체적으로 역사의 전면에 부상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었다.

 1862년 농민항쟁 과정을 통해서 농민들은 물론 당시 항쟁을 주도했던 사회세력이 자신들이 처한 객관적 조건을 보다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으며, 역량의 한계를 체험하게 됨으로써 다음 단계의 항쟁을 준비하게 된다. 이후 변혁운동이 지배계급의 울타리에서 벗어나고 단순한 경제투쟁의 단계를 뛰어넘어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어 나가게 되는 것은 자연스런 과정이었다.

<金仁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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