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3. 민중운동의 사상적 기반
  • 1) 성리학에 대한 사상적 도전
  • (1) 성리학의 교조화

(1) 성리학의 교조화

 조선 후기의 사회는 농업 생산력의 진전을 기본 동력으로 하여 사회 전분야의 변동이 촉진되었다. 그 결과 봉건체제의 모순이 더욱 드러났고, 이러한 모순을 타파하려는 民衆運動이 두드러졌다.

 정치적으로는 숙종 때의 환국 정치기를 거쳐 영조·정조 때의 탕평기로 접어들었다고 하나, 정치집단 내부의 대립과 갈등은 상존하였다. 사회경제적으로는 농업 생산력의 향상으로 농민층 분화가 촉진되었으며,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신분제의 동요로 이어지면서 여러 사회세력이 성장할 수 있는 토대로 작용하였다. 사상적으로는 성리학의 지배이념이 강화되는 가운데서도 實學을 표방한 새로운 움직임이 활발해졌고, 아울러 鄭鑑錄이나 彌勒信仰 등 民衆思想이 확산되었다.

 이러한 사회변동의 여러 모습은, 중세봉건체제를 유지, 강화하려는 지배층의 움직임으로 나타났고, 반면에 이같은 모순구조를 극복하고 타파하려는 민의 저항, 즉 민중운동을 수반하였다. 이러한 민중운동은 정치·경제·사회·사상의 여러 변동 양상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일어났다.

 조선 후기의 민중운동은 크게 두 갈래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하나는 향촌사회에 근거하여 일어난 民亂, 즉 농민항쟁이며, 다른 하나는 정감록과 같은 민중사상을 기반으로 일어난 變亂이다. 이 때 민란 형태의 민중운동에서는 민중사상과의 관련성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를테면 민란 형태 민중운동의 정형으로 일컫는 ‘1862년 농민항쟁’의 경우에도 민중사상과의 연관성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반면에 변란 형태 민중운동의 가장 큰 특징은 민중사상을 그 저항운동의 기반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민중운동의 사상적 기반이나 특성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대부분의 경우에 ‘민중운동=변란’이라는 등식에서 파악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 후기 민중사상에 대한 이해 없이는 민중운동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조선 후기의 민중사상은 단순히 민중 속에 널리 퍼져 있는 사상이 아니라, 민중의 이익을 옹호하려는 사상이다. 민중사상은 곧 성리학의 지배이념에 반대하여 민중의 입장을 대변하는 논리체계이다. 그러므로 이 때의 민중사상은 민중운동을 논리적으로 받쳐주고 나아가 그 저항을 이끌어가는 적극적 의미로서, 정체되어 있는 개념이 아니라 민중의 변혁욕구를 수렴하여 그들의 저항의지를 북돋아주는 동적인 개념이다.

 조선 후기의 민중사상에 대한 이해는 조선사회의 지배이념인 성리학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한다. 성리학은 조선왕조가 공식으로 채택한 유일한 종교요, 사상이다. 그러므로 성리학은 정치·경제·사회 등 국정 전반의 지배질서를 구축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지배층은 공식적 활동은 물론이고 개인적 생활까지 성리학의 틀 속에서 수행하려 했다. 더욱이 정부에서는 일반 민중의 생활까지도 성리학의 틀 속에서 아우르려고 했다.

 조선시대의 성리학은 학자들의 연구와 자체의 여러 논쟁과정을 거치면서 더욱 발전하였으며, ‘正學’으로 자리잡았다. 그 가운데에서도 李滉과 李珥 등의 이른바 ‘四端七情’ 논쟁은 성리학의 수준을 한 차원 끌어올렸으며, 이후 성리학 연구를 더욱 심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 사회변동이 촉진되면서 18세기 이후에는 성리학도 뚜렷한 변화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18세기의 성리학은 16세기 이래의 사단칠정 논쟁을 계속하면서 이와 함께 인간과 사물의 본성이 같은가 다른가 하는 이른바 ‘人物性同異論’을 놓고 보다 발전된 형태의 철학적 논쟁을 벌였다. 이는 조선 후기 성리학자들이 주자의 이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 아니하고, 이를 비판적으로 재검토하여 독자적 철학체계로 발전시켜 나가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논쟁에는 중세적 인간상이 형태를 달리하여 강조되고 있었을 뿐, 근대적 세계관에 대한 이해는 없었다.076)趙 珖,<朝鮮後期 思想界의 轉換期的 特性-正學·實學·邪學의 對立構圖->(≪韓國史 轉換期의 문제들≫, 지식산업사, 1993), 155∼156쪽. 더욱이 이러한 유형의 논쟁은 성리학의 사변적·관념적 경향을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성리학의 주체로서 정부 당로자를 포함한 지배층은 사회변동이 촉진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물적 토대를 비롯한 기존의 여러 특권을 지켜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들이 기득권을 지킬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중세적 지배질서를 유지, 강화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교화라는 이름으로 성리학적 지배이념, 즉 성리학의 사회윤리를 민중에게까지 보급하고 이를 통하여 중세적 지배질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려고 하였다. 성리학적 사회윤리의 내용은 성리학의 인성론과 명분론에 근거를 둔 三綱五倫, 곧 人倫으로 요약된다. 조선사회의 지배층은 삼강오륜의 인륜을 불변의 진리, 곧 하늘의 이치에 따라 분수를 다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따라서 인륜은 실천도덕으로 생활화되고 관념화되어 오히려 법조항보다 앞서는 보편적 질서의 기틀이 된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회윤리의 보급이야말로 민중을 가장 효율적으로 아우를 수 있는 수단이었다.

 이러한 방안 가운데서도 각종 성리학 윤리서의 간행, 보급은 그 대표적 예이다. 정부에서는≪朱子家禮≫와≪小學≫을 비롯하여≪孝經≫·≪五倫行實圖≫·≪東國新續三綱行實圖≫등 인륜과 관련된 서적들을 간행하고 보급하였다. 더욱이 이 때는 이미≪小學諺解≫·≪家禮諺解≫등 諺解本 윤리서가 보급되어 있었다. 이러한 작업은 민중을 성리학 사회윤리의 틀 속으로 끌어들이는 효율적 방안으로 기능했다. 또한 정부에서 충신·효자·열녀 등을 기리는 旌閭를 시행하고 있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요컨대 정부의 이러한 정책은 민인들에게까지 성리학적 통치질서의 수용을 강제한 것으로, 정부의 대민 통제책의 일환이다.

 이와 같이 정부에서는 성리학적 사회윤리의 보급과 같은 방법으로 지배체제의 강화를 시도하였으나 향촌사회는 결코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없었다. 이는 정부의 정책이 사회변동의 가속성을 따라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생산력의 총체적 수치는 증가되었다고 하나 그 혜택의 대부분은 지주들에게 돌아갔을 뿐이고, 부농으로 성장한 자영농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많은 농민들은 토지로부터 이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숙종 37년(1711)에는 전라도에서 대량의 유민이 발생하였는데, 무안에서만도 5천호 가운데 2천호가 유민화할 정도였다.077)≪備邊司謄錄≫611책, 숙종 37년 2월 20일. 숙종 43년에는 충청도에서 10만 명이 유민이 발생하였고,078)≪肅宗實錄≫권 59, 숙종 43년 3월 계해. 경상도에서도 영조 9년(1733)에 약 17만 명의 유민이 발생하였다.079)≪英祖實錄≫권 34, 영조 9년 10월 신묘. 이처럼 피폐한 향촌사회의 현실에서 성리학적 지배체제를 강화하려는 시도는 적지 않은 부작용을 낳았다. 지배층은 사회윤리의 보급을 표방하였지만, 그 이면의 목적은 민중에 대한 경제수탈을 효율적으로 해내려는데 있었다. 따라서 정부의 지배체제 강화 시도는 향촌사회 안팎에서 민중의 저항을 불러왔다.

 아울러 성리학은 공리공담과 형식에 치우치는 경향이 심해져 점차 관념화, 사변화되어 갔을 뿐 아니라, 교조주의로 흐르고 있었다. 그리하여 오로지 성리학만을 ‘正學’으로 내세우고 그 나머지는 어떠한 사상이나 이념과 종교도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에서는 西學, 즉 天主敎는 물론이고 기존의 佛敎, 道敎, 圖讖을 左道나 邪學·異端 등으로 배격하였을 뿐 아니라, 유교의 일파인 陽明學까지도 이단으로 파악하며 성리학의 유일화에 힘을 쏟았다. 이러한 현상은 필연적으로 사상의 停滯를 가져왔다.

 이에 성리학의 정체성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사상체계가 요구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사회변동의 가속화’라는 현실문제와 연결되면서 그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졌다. 이미 교조화의 경향을 띠고 있던 성리학의 사상체계로는 이러한 여러 변화를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현실개혁에 필요한 사상체계가 요구되었고, 이것이 곧 ‘實學’이다.

 실학사상은 정치권력에서 배제된 근기지방의 남인들을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하여 그 수용 범위가 넓어져 갔다. 그들은 기존의 성리학 연구를 답습하는 것에서 벗어나 그것을 비판하고 개혁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先秦儒學에서 그 대안을 찾고자 하였다. 이러한 사상적 경향이 현실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와 연결됨으로써 ‘실학=개혁사상’의 논리가 성립할 수 있었다.

 실학은 성리학이 조선왕조 지배이념으로서의 한계가 더욱 분명해지고 있던 상황에서, 체제 속에서 현실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실학자들의 현실문제의 해결 의지와 방법론은 이른바 ‘체제 속의 개혁’이었다. 이것은 실학사상이 유학적 틀 속에서 이루어졌으며, 탈성리학을 표방하였으나 성리학을 부정하지 못한 사상적 제약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요컨대 실학자들은 성리학을 비판하고 그 틀에서 벗어나려 했을 뿐이고, 그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실학사상은 처음부터 ‘민중사상’으로 부를 수 없는 한계를 그 자체로 갖고 있었다. 실학은 민중의 이익을 대변했다고는 하나 그것은 단편적이었다. 따라서 사회변동이 촉진되는 과정에서 보다 민중의 정서에 맞는 민중사상의 확산은 불가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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