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3. 민중운동의 사상적 기반
  • 2) 민중운동의 사상적 특성
  • (2) 민중사상 전파의 주체

(2) 민중사상 전파의 주체

 앞에서 민중운동 과정에서 포착된 민중사상의 흐름을 바탕으로 민중운동의 주체, 말하자면 민중사상을 체계화하고 유포한 주체에 대해서, 그리고 이들이 민중운동을 통해 추구한 정치·사회적 목표는 어떠했는지 살펴보려 한다. 조선 후기의 대부분의 변란, 즉 요언이나 괘서, 또는 거사모의 단계의 저항에서 ‘민간사상의 유포자=변란의 주체’이다. 그러므로 변란 형태의 민중운동 주체는 곧 민중사상을 전파하는 사람들이다. 이 때 민중운동의 주체, 즉 민간사상을 유포한 주체는 어떠한 사람들일까. 그것은 물론 구체적 사상에 따라 다르다.

 먼저 18세기 초반까지 유력한 민중신앙으로 기능했던 민중불교, 즉 미륵신앙이나 생불신앙 등을 주재한 집단으로 승려들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승려들이 독점적으로 미륵신앙이나 생불신앙을 주재하지 못한데 있다. 이를테면 숙종 14년(1688) 거사모의 때 승려 여환 등 미륵신도들이 거사준비를 주도한 것처럼 보이지만, 원향이나 계화 등 무녀들도 용신앙뿐만 아니라 미륵신앙에 대한 일까지 예언하면서 적극 참여하였다. 이를테면 ‘龍女夫人’으로 불리는 무녀 원향이 황해도 문화에서 경기도 양주까지 올 때 수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따랐다는 사실, 무녀 계화가 서울공격을 계획할 때 그 논리적 분수령이 되었던 이른바 ‘雨注傾蕩’을 주장했던 사실로 보아도 무녀들의 영향력이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생불신앙은 무녀들에 의해 장악된 것으로 나타났다. 숙종 17년(1691)의 ‘수양산 생불출현설’을 주동한 차충걸·조이달·애진은 모두 무격이며, 더욱이 애진은 실질적으로 생불과 관련된 일들을 주재했다. 영조 때의 생불 관련 요언도 모두 무녀들에 의한 사건이다. 그러므로 생불신앙은 정통 불교의 범주라기보다는 무격들에 의해 주재되었던 민간신앙에 해당한다.

 이들은 미륵신앙이나 생불과 관련된 요언을 퍼뜨리며 사람들을 끌어모았는데, 그 영향력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저항은 더 이상의 단계, 이를테면 거사모의로 옮아갈 수는 없었다. 그것은 이들이 무격신앙을 자신들의 사상적 토대로 삼고 있기 때문에 미륵신앙이나 생불신앙을 단편적으로 이용할 뿐 완전히 소화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몰려드는 사람들을 조직화하고, 이후의 계획을 세우는 단계로 나아갈 수 없었다. 그리고 이들은 체제를 비판하거나 부정하는 말을 하고는 있으나, 그것은 거의 개인적 차원의 일로서, 기복을 추구하거나 재물을 모으는 데 목적이 있었다.

 영조 4년(1728)의 무신란 이후에는 정감록 사상이 확산되면서 그 주체도 변했다. 영조 때 정감록을 유포한 주체는 정치집단에서 탈락하여 떠돌이 생활을 하는 지식인들과 이른바 ‘戊申餘黨’으로 불린 자들이 주축을 이룬 가운데 승려들도 적지 않았다.

 앞의 ‘팔공암’ 흉서 때≪南師古秘記≫를 입수하고 보관한 인물은 승려 태진이었으며, 이를 베껴 김원팔에게 전한 사람은 각지를 떠돌던 몰락양반인 地師 최봉희이다. 영조 19년에 거짓으로 “姜世發이 거사를 모의했다”고 고변한 金殷昌의 경우는 각지를 떠돌다가 승려가 되었고 이후 다시 환속하여 堪輿術을 익혔던 자이다.129)≪英祖實錄≫권 58, 영조 19년 5월 갑오. ‘文義’괘서를 이끈 이지서와 박민추는 ‘무신여당’이다. 영조 36년에 “해도에 수만 명이 모여있다”는 와언을 유포한 淸潤은 승려이다.130)≪英祖實錄≫권 95, 영조 36년 2월 갑진 및 3월 병진·정사·병인. 영조 38년(1762)에 궐문에 괘서하려다 체포된 裵胤玄은 ‘잡술을 하는 허탄한 사람’131)≪英祖實錄≫권 99, 영조 38년 2월 계사.으로 곧 지사이다. 영조 40년 영남에서 잡술로 민심을 혼란시켰던 李達孫은 ‘무신여당’이며, 者斤萬은 지사로 보인다. 이 때는 道行·文淡·達文 등 승려들도 참여하였다.132)≪英祖實錄≫권 103, 영조 40년 4월 무술. 영조 44년에 호남에서 잡술로 민심을 교란했던 申弼周는 ‘奇門堪輿術’을 익히고 있던 떠돌이 지사이다.133)≪英祖實錄≫권 110, 영조 44년 5월 경신·신사.

 이 때 ‘유랑 지식인’이 정감록 전파에 쉽게 참여한 것은 경제적 기반의 악화로 말미암아 떠돌이 생활을 하는 지식인의 숫자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팔공암’ 흉서 때의 양반 최봉희가 떠돌이 생활 끝에 평민 김원팔의 식객이 된 사실도 같은 맥락이다. 더욱이 무신란에 직간접으로 연관되어 있는 사람들이 ‘유랑 지식인’ 집단에 동조 또는 합류함으로써 그들의 단순 수치가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체제비판의 강도도 높아졌다.

 이 때의 승려들은 정부의 억불정책 등으로 말미암아 매우 위축된 상태에서도 체제비판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이들은 신분이 천민으로 떨어진 대신에 國役의 의무를 지지 않았다. 이에 피역하려는 일반 민중이 승려로 투탁하는 사례가 많아졌다. 이들은 대부분 생활의 방편으로 승려를 택했기 때문에 수도생활보다는 현실의 일에 관심이 많았다. 그리하여 이들 가운데 학문적 소양이 있는 자들은 정감록과 같은 민중사상을 전파하며 체제를 비판하고 민중을 끌어모았다. 그리고 일부는 明火賊이 되기도 하였다.

 정조 때 이후에도 민중사상 전파의 주체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이 때도 ‘유랑 지식인’들이 민중사상의 전파를 주도했다. 이들의 생업은 대부분 地師였다. 조선시대에는 풍수가 성행하였다. 그리하여 “指南針을 차고 있는 사람은 천리 길을 나서도 양식을 갖고 다니지 않는다”134)朴齊家,≪北學議≫外編, 葬論.라고 할 정도였다. 그러므로 ‘유랑 지식인’들은 지사의 일을 생업으로 삼았다. 아울러 이들은 훈장노릇을 병행하거나 의술을 펼치기도 하였다. 또 이들은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여러 곳을 떠돌면서 동조 인물을 모았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신분을 속이거나 이름을 바꾸는 등의 방법을 이용하였다. 이들의 일은 점차 전문화되고 직업화되어 갔다. 이제 이들은 단순한 ‘유랑 지식인’이 아니라 ‘저항 지식인’135)吳洙彰,≪朝鮮後期 平安道民에 대한 人事政策과 道民의 政治的 動向≫(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6), 223∼226쪽.으로 자리잡아 갔다.

 이러한 인물로는 정조 6년(1782) 11월의 ‘서울공격’ 거사모의의 주역인 文仁邦이 대표적이다. 그는 천민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洪國榮의 측근으로 이조판서를 지낸 宋德相에게 학문을 배웠고, 그에게 직접 ‘玉圃先生’이라는 書號까지 받았다. 이로 보아 문인방이 어느 정도 학문적 소양을 쌓았음은 쉽게 알 수 있다. 문인방은 거사모의가 발각되기 10년 전인 영조 48년(1772)에 李京來와의 만남을 계기로 거사를 생각했다. 두 사람은 이후 여러 차례 회합하면서 정조 원년부터는 거사준비를 본격화하였다. 이들은 동조 인물을 모으는데 힘을 쏟았다. 문인방은 함경도에서 훈장과 의원을 가칭하는 방법으로 동조 인물을 모았다. 아울러 각지를 떠돌면서 정감록을 입수하고 이를 전파하였다. 정조 6년 봄에는 진천의 산속에서 ‘잡술’을 전파하였다. 그는 이 사건으로 해도에 유배중일 때에도 朴瑞集을 끌어들이는 등 끊임없이 거사를 준비하였다. 아울러 정감록의 강력한 논리인 해도기병설을 ‘小雲陵’이라는 섬에 가탁하는 등 보다 정제된 형태로 정감록 사상을 전파하였다.

 이와 같이 민중사상 전파의 주체들은 문인방과 비슷한 경로를 밟은 ‘유랑 지식인’이자 ‘저항 지식인’들이다. 이를테면 앞의 ‘산인세력’ 거사모의 때의 文洋海·朱炯采·李奎運(吳道夏)·朱炯魯, ‘無石國’ 거사모의 때의 金東翼·金東喆 형제, 擧事說을 퍼뜨린 陳東喆 등도 모두 문인방의 경우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이규운은 지사로서 서북지방과 서울을 오가며 훈장과 의원을 병행하였고, 주형로는 충청도 단양에서 훈장노릇과 침술로 생계를 꾸렸으며 풍수와 관상도 보았다. 특히 문양해는 앞에서 보았듯이 도교의 수양법, 즉 仙術을 익힌 자로 알려졌는데 仙人들과 관련한 온갖 논리를 만들어 냈다.

 이들은 오랜 기간에 걸쳐 거사를 준비하였으며 여러 지역을 떠돌며 동조 인물을 포섭하고, 거사의 조직체계를 갖추기도 하였다. 그리고 발생 지역이나 사건의 상호 관련성 면에서 볼 때, 일회성 사건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연속선상에서 저항이 일어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18세기 후반, 정조 때에는 흔히 말하는 ‘직업적 봉기꾼’들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 밖에 승려들도 여전히 민중사상 전파의 일부를 담당하며 거사에 참여하였다. 이 때 승려들이 전파한 민중사상은 미륵신앙과 같은 민중불교보다는 정감록이었다. 이는 정감록이 민중사상의 중심적 위치를 확고히 했음을 말해준다. 이를테면 구례 花嚴寺의 승려 尹藏은≪鄭鑑錄≫을 사찰에 숨겨두었다가 발각되어 유배당했다.136)≪正祖實錄≫권 19, 정조 9년 3월 을축. 또한 일부 승려들은 민중운동의 주체들과 교류하면서 민중사상을 전파하거나 지역적으로 떨어져 있는 운동주체들 사이의 연락을 돕기도 하였다.

 한편 ‘非僧非俗’의 무리, 즉 居士들도 민중사상을 전파하였다. 이들은 호적에서 이름이 빠지고 신역이나 군포도 없는 자들로, 떠돌아 다니는 백성들 가운데 가장 수상하다고 지목되었다.137)≪正祖實錄≫권 21, 정조 10년 2월 병신. 이 무렵에는 역모를 꾀하는 자들이 거사 집단 속에 많았으며, 하동은 거사들의 집결지였다.138)≪正祖實錄≫권 21, 정조 10년 2월 을미. 이들은 작게는 명화적이 되고, 크게는 반역을 기도하였다. 그리고 정조 9년(1785) 11월 ‘三水府’ 거사모의139)全信宰,<居士考-流浪藝人集團硏究序說->(≪韓國人의 生活意識과 民衆藝術≫, 成均館大 大東文化硏究院, 1984).
裵惠淑,≪朝鮮後期 社會抵抗集團과 社會變動硏究≫(東國大 博士學位論文, 1994), 181∼205쪽.
에 柳漢敬·柳泰守(李泰守) 등 거사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들은 ‘李亡鄭興’을 주장하였으며, 체포 당시 정감록으로 보이는≪鑑影錄≫과 같은 책들을 소지하고 있었다. 아울러 이 때의 거사모의에 李龍範을 비롯하여 많은 미륵신도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그 모습을 “甲山에 형세가 있는 사람은 미륵신도의 명단에 들어있지 않은 사람이 없다”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이들은 거사들과 연계하여 미륵세계를 구현하려 했다. 이 때의 사상기반은 미륵신앙과 정감록 사상이 습합된 독특한 민중사상의 틀이다.

 19세기에 들어와 홍경래 난을 겪으면서 민중사상 운용의 틀에 변화가 일어났지만, 그 사상을 전파하고 민중운동을 이끌어간 주체는 18세기 후반, 정조 때와 변함이 없다. 이 때도 ‘유랑 지식인’이자, ‘저항 지식인’들이 민중사상을 전파하고 운동을 이끌었다. 순조 4년(1804) 거사모의를 주도한 李達宇와 張義綱, 순조 17년 명화적과 결탁하여 거사모의를 주도한 蔡壽永과 安有謙, 순조 26년 청주괘서의 주역 金致奎, 같은 해 ‘紅霞島’ 거사모의를 주동한 鄭尙采, 철종 2년(1851)에 ‘海西獄事’를 주도한 蔡喜載와 柳興廉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 가운데서 정상채의 경우를 보기로 하자. 정상채는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나 부모를 따라 평양으로 옮겨 그 곳에서 자라난 후에 다시 강원도 영월로 옮겼다. 그는 의술과 풍수 등을 생업으로 삼아 각지를 전전하였다. 그는 평소 이곳저곳에 출몰하여 종적이 홀연하고 이름과 나이를 수시로 바꾸며,≪幻妙門≫과 같은 비기를 이용하여 환술을 부렸다.140)≪推案及鞫案≫281책, 병술 罪人亨瑞尙采申季亮鞫案 罪人尙采結案, 847∼848쪽. 그는 ‘呼風喚雨’의 新異한 능력의 소유자로 알려졌고 그의 동료들도 그러한 말을 믿을 정도였다. 이 때 대부분의 민중사상 주재자들의 경우는 정상채와 비슷한 경로를 걸었다. 이러한 현상은 19세기 중반 東學이 창도되기 이전까지는 크게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이 때 ‘저항 지식인’과 같은 민중운동의 주체들은 매우 열악한 조건 아래서 거사를 준비했다. 이들에게 가장 어려운 문제는 거사자금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이들은 재력 있는 자를 끌어들여 자금을 마련하는 경우도 있었다. ‘산인세력’ 거사모의 때 양형과 문양해는 홍국영의 4촌 동생 洪福榮을 끌어들여 ‘하동에 거처를 마련한다’는 명목으로 수천 냥의 자금을 모았다. 그러나 이런 일은 드물었다. 거사의 성공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러한 방법으로 거사자금을 마련하기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울러 군사력의 확보도 어려웠다. 정감록 등 민중사상을 통해 동조 인물을 모으는 데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공격’ 거사모의 때 문인방은 ‘流丏’ 등을 동원할 방법을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방법도 자금확보가 전제되어야 하는 일이었다.

 한편 민중운동의 주체들은 대부분 현실의 정치집단에서 배제된 인물들이다. 영조 때 무신란 이후의 ‘무신여당’, 이를테면 이지서·박민추 등이 그렇고 정조 초반 홍국영과 송덕상 등이 실각된 정국과 직간접으로 관련된 인물들, 즉 이경래·문인방·홍복영 등이 이에 해당한다. 아울러 체제를 부정하고 권력의 장악을 목표로 하는 변란의 특성상 그 주체들은 정치지향적이고 권력지향적 성향이 강했다. 이를테면 앞의 ‘무석국’ 거사모의 때 팔도의 감사와 수령을 미리 임명했다고 했으며, 이에 따라 金東翼은 강원감사로, 金商圭는 광주부윤으로 행세하며 동조 인물들을 모았던 사례가 전형적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물리적 방법을 통하여 권력을 장악하고 정치집단으로 진입하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기울였다.

 더욱이 19세기에 접어들면, 이들은 정치집단으로 들어가기 위해 ‘외세와의 연계’까지도 계획하였다. 이들은 거사의 준비과정에서 대마도나 일본과 연결을 맺거나 그들에게 청병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이러한 일은 정감록의 ‘외세침공설’의 연장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 때까지도 민중운동의 주체들은 외세문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거나 이를 철저히 외면하였다. 이는 ‘반외세’를 고려하지 않을 정도로 이들의 엽관적 성향이 강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외세문제에 대한 인식의 전환, 즉 ‘반외세’의 주장은 1860년대에 들어가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민중운동의 주체들이 단지 엽관적 행태만을 보인 것은 아니다. 이들은 저항을 통하여 무엇을 추구하였을까. 그들은 권력의 장악을 거사의 목표로 삼았다. 이 때 정감록과 같은 민중사상의 여러 체제부정 논리는 이러한 목표를 합리화하는 이론적 배경이 되었다. 그들은 거사의 목적으로 ‘撥亂反正’을 내세웠다. ‘산인세력’ 거사모의 때 문양해는 거사의 목적에 대해, “지금 세상은 쇠퇴할 운명에 이러렀으니 만일 인재가 있으면, 응당 반란을 다스리고 나라를 회복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141)≪正祖實錄≫권 19, 정조 9년 3월 임신.라는 주장으로 거사의 명분을 확보하려 했다. 이 때 양반으로 사건의 핵심이었던 李瑮은 자신들의 하는 일에 대해≪水滸志≫의 宋江의 말을 빌려 “하늘을 대신하여 도를 행한다”라는 말로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다.142)≪正祖實錄≫권 19, 정조 9년 2월 기유. 이들은 민중사상을 논리적 틀로 삼고 권력장악을 목표로 거사를 준비하였으나, 이 단계에서는 권력장악 후의 정치구도를 그려내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이들은 사회적으로는 신분제의 불평등 구조를 비판하는 등 평등의 논리를 주장하였다. ‘팔공암’ 흉서 사건 때 주동 인물들 사이에서 “우리들이 오랫동안 평민으로 있는 것은 부당하다. 어찌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가”143)≪推案及鞫案≫165책, 계축 元八推案 罪人鳳禧元八一處面質, 471∼472쪽.라는 대화가 오가는 등 피상적이나마 신분제를 부정하는 요소가 나타났다. 앞의 ‘문의’괘서 때에도 비슷한 주장이 나왔다. 이 때 양반 吳命垕는 李恒延에게, “양반의 권세를 의지하지 말라. 마땅히 귀한 자가 천하게 되고 천한 자가 귀하게 되는 세상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그의 부친 吳遂萬도 “양반의 교만한 기세를 부리는 짓을 하지 말라”는 말을 하였다.144)≪推案及鞫案≫184책, 무진 罪人之曙推案 李恒延供, 46∼47쪽.

 민중운동의 주체들은 단편적이나마 경제적 평등을 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이 토지나 부세문제 등 경제의 현안에 대해 자신들의 입장이나 대안을 내놓은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다만 순조 4년(1804) 거사모의를 주도했던 안악의 李達宇가 공초과정에서 주장한 토지개혁안이 주목된다. 이달우는 당시 극심했던 토지겸병의 폐해와 농민층 분화의 실상을 지적하고, 이를 당시 정권의 制産의 실패 때문으로 돌렸다. 그리하여 그는 정전제와 균전제를 기반으로 하는 토지개혁안, 즉 한 가구마다 70負의 토지를 지급할 것을 주장하였다.145)한명기,<사회세력의 위상과 저항>(≪조선정치사 1800∼1863 상≫, 청년사, 1990), 293∼294쪽.

 이러한 주장들은 보편적으로 제기되었던 것이 아니라, 일부의 저항에서만 단편적이고 피상적으로 언급되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주장이 곧 민중운동 주체들의 거사 목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들이 처해 있던 현실의 좌절을 통해 형성된 사상과 철학이 들어있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에 대한 비판과 저항으로 발전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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