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3. 민중운동의 사상적 기반
  • 2) 민중운동의 사상적 특성
  • (3) 정부의 대응책

(3) 정부의 대응책

 조선 후기 민중사상의 확산은 正學, 즉 성리학의 지배이념을 더욱 강화하려는 정부의 입장과 배치되는 것이다. 이에 정부에서도 확산일로에 있는 민중사상과 민중운동에 대처하기 위한 적절한 방안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부는 정감록과 같은 민중사상을 正學, 즉 성리학을 강화하는데 걸림돌로 작용하는 雜術, 左道, 異端, 邪學의 일종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므로 민중사상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는 성리학의 지배논리를 강화하고 ‘이단’을 물리치는 것, 이른바 ‘衛正斥邪’가 최선의 방법이라고 믿었다. 그리하여 정조는 민중사상이 확산되고 있던 사회현상과 관련하여 “선비를 높이고 유교를 중시하는 것이 금일의 급선무”146)≪正祖實錄≫권 14, 정조 6년 12월 경인.라는 인식을 가졌다. 즉 조선왕조 개창 이래 지배이념인 성리학의 강화를 통해 민중사상의 확산을 막고, 이에 가탁하여 일어나는 민중운동을 차단하려 했다.

 이러한 정부의 인식은 민중사상의 주창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정부에서는 흔히 민중사상의 주창자들을 ‘怨國之心’이나 ‘思亂樂禍之心’을 품은 자들로 인식하였으며, 이들에 의해 변란이 일어난다고 믿었다. 특히 18세기 후반 이후 현안으로 떠오른 천주교도들에 대해서는 五斗米徒, 黃巾賊, 白蓮敎徒나 盜賊, 綠林의 무리로 인식하였다.147)趙 珖, 앞의 책, 175∼176쪽. 그러므로 정부에서는 “讖緯, 妖書, 妖言을 짓거나 이를 전용하여 민중을 미혹시킨 자는 모두 斬한다”148)≪大明律≫권 18, 刑律 造妖書妖言.라는 법조항을 엄격히 적용하여 일반 민중이 여기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려 했다.

 요컨대 정부는 변란 형태의 민중운동이 일어났을 경우에, 사건 그 자체보다도 그 속에 내재해 있는 민중사상을 근절하려 했다. 그러므로 정부의 대응은 민중운동의 형태, 즉 요언, 괘서, 거사모의 등 저항의 수준이나 강도에 따라 달라지지 않았다. 정부의 모든 조치가 민중사상을 근절하는 데로 모아졌다. 구체적 대응 방식은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또는 해결한 후에 신하들이 ‘민중사상을 금하는’ 조처를 취해줄 것을 건의하고, 이에 국왕이 교지를 내리는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영조 9년(1733)에 호남 일대에서 정감록에 바탕을 둔 변란이 잇따라 일어나자 정부에서 잡술을 근절하기 위한 논의가 있었다. 이 때 藥房提調 尹淳은 호남에 잡술이 성행하게 된 연유와 전파의 갈래 및 이와 관련해 일어나는 구체적 사건에 대해서도 설명하였다.149)≪英祖實錄≫권 35, 영조 9년 8월 갑술. 아울러 잡술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할 것을 강력히 건의하였다. 이러한 논의 끝에 국왕은 讖緯를 금지하라는 교서를 내렸다.

 이처럼 변란에 대한 정부의 인식은 변란의 근저에 민간사상이 깔려 있으므로, 이것을 금지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영조 15년에 평안도에서 정감록과 같은 참위서가 성행하자, 이 책들을 불사르라는 요청이 잇따랐다.150)≪英祖實錄≫권 50, 영조 15년 8월 경진. 같은 해 남원에서 일어난 梁纘揆 흉서의 처리 과정에서 국왕은 많은 사람들이 잡술을 비판하면서도 거기에 물드는 현상을 걱정하였다.151)≪英祖實錄≫권 51, 영조 16년 정월 정묘. 그리하여 영조 38년에 국왕은 “참서와 비기를 감추어 두었다가 발각된 자는 해당 감사로 하여금 장문케 한 후에 세 차례 嚴刑하여 해도에 定配하라”는 전교를 내렸다.152)≪英祖實錄≫권 99, 영조 38년 2월 계사. 참위서의 소지자들에 대한 처벌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것은 이전의 피상적 조치로는 효과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중사상과 관련하여 변란은 잇따랐고, 이에 정부에서도 잡술을 금하는 교지를 내리거나 해당 지역에 어사를 파견하여 단속하는 방법으로 대처하였다.153)≪英祖實錄≫권 110, 영조 44년 4월 신사.

 민중사상 관련 저항은 그 성격상 실체가 불명확한 요언이 이어지게 마련이었다. 그러므로 정부는 철저한 수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필요 이상으로 시간을 끌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철저한 사건의 규명과 조속한 마무리는 통해 민심을 수습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숙종 때 ‘首陽山 生佛出現說’의 조사과정에서 생불로 알려진 鄭弼錫을 체포하기 위해 수양산 義相庵 일대의 여러 사찰들을 철저히 수색했다. 정조 때 ‘山人勢力’ 거사모의 조사과정에서 ‘智異山 仙苑’의 ‘仙人’들의 실체를 규명하기 위해 지리산 일대를 샅샅이 수색하였을 뿐만 아니라, ‘선인’들이 옮겨 다녔다는 평안도 香山까지 여러 차례 수색하였다. 그 결과는 이들 모두 실체가 없는 가공의 인물로 판명되었다.

 이 때 신하들은 확대수사를 요구하였으나, 국왕은 사건의 핵심이 밝혀졌으므로 조속히 마무리하여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이 때 정조는 삼남의 관찰사들에게 훈유하여 “소요가 발생하여 民情이 불안하니 경들은 특히 주의하여 민심을 안정시키라. 지난번에 훈유하였음에도 소란의 기미가 보이니 이번에도 안정시키지 못하면 兵使·水使에게 무거운 책임을 묻겠다”154)≪正祖實錄≫권 19, 정조 9년 3월 을해.라고 하여 사건을 조기에 수습함은 물론이고 요언의 확산으로 인해 소란스러워진 민심을 달래고자 하였다. 정조가 陳東喆 등에 의한 ‘擧事說’ 관련 요언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사건을 확대하지 말 것을 지시하며 홍충도관찰사 沈豊之를 파면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155)≪正祖實錄≫권 19, 정조 9년 3월 정축. 요컨대 정조의 생각은 ‘진정시키는 데’에 있었던 것이다.

 한편 정부에서는 사건이 마무리 될 무렵 사건이 일어난 지역에 대해서도 처벌하였다. 그것은 주로 해당 도의 이름을 바꿔버리거나, 해당 읍호를 떨어뜨리는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서울공격’ 거사모의 주역 문인방의 출신지인 谷山府가 谷山縣으로 떨어졌다. 순조 때의 ‘홍하도’ 거사모의와 관련하여서도 淸州牧이 淸州縣으로 떨어졌으며, 忠淸道도 公忠道로 바뀌었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국왕은 신하들로부터 역적 토벌에 대한 축하를 받기도 하며, 민심 위무책의 일환으로 중앙과 지방에 大赦免令을 공표하기도 한다.156)≪正祖實錄≫권 15, 정조 7년 정월 정미.

 정부에서는 특정 계층에 대해 회유책도 썼다. 회유의 대상은 ‘힘있고 재주있는 자’로서 현실을 불평하고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는 자들이다.157)≪正祖實錄≫권 24, 정조 11년 8월 을묘. 이들은 ‘좌도’에 쉽게 빠져들었고 변란을 모의하는 주요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좌도’를 철저히 금지하는 대신에 힘있고 지략있는 자들에게 벼슬길을 열어줌으로써 변란을 사전에 예방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정부의 조처에도 불구하고 정감록 등의 민중사상과 여기에 바탕을 둔 민중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이것은 민중사상이 체제모순의 심화 속에서 더욱 확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중사상은 그 속성상 사회변동을 배경으로 하여 성행했던 것이기 때문에, 체제모순에 대한 근본적 처방이 없는 상황에서 민중사상을 근절시키기란 불가능하였다. 그러므로 민중사상은 정부의 끈질긴 탄압에도 불구하고 사회변동을 가속화시키는 방향으로 기능하였다.

 이같은 변란 형태의 민중운동은 조선 후기 민중항쟁의 주류인 민란, 즉 농민항쟁과는 또다른 형태의 저항이었다. 그것은 이 때의 민중사상의 한계인 비현실·비합리·비과학적 틀을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저항논리를 창출하지 못했다는 점, 그 주도층이 농민들을 끌어들일 수 없는 정치, 경제적으로 몰락한 ‘유랑 지식인’들이었다는 근본적 한계를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 변란 형태의 민중운동은 저항이념과 저항공간의 측면에서 민란, 즉 농민항쟁보다 진전된 성격을 지녔다. 민란이 정치, 사회적 이념을 제시하지 못했던 반면에, 변란은 신분의 평등→撥亂反正→새로운 세계의 구현을 통해 저항의 정당성를 확보하려 했다. 또한 민란이 부세문제를 둘러싼 국지적 저항 형태를 극복하지 못했으나, 변란은 일정 지역에 구애받지 않고 지역간의 연대를 통해 전국을 저항의 무대로 활용하였다. 그러므로 19세기 전반까지의 변란 형태의 저항은 거사를 실행하는 단계에까지 이르지 못한 채 ‘思亂’의 수준에 머물렀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유력한 민중운동으로 평가할 수 있다. 나아가 홍경래 난 때 변란과 민란의 결합이 시도된 이래, 동학농민전쟁 때 본격 결합함으로써, 민중사상을 기반으로 삼은 변란 형태의 민중운동은 민란 형태의 농민항쟁과 같이 본격적 민중항쟁으로 규정할 수 있게 되었다.

<高成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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