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2. 유민과 명화적
  • 1) 유민
  • (2) 유민의 실태와 유입처

(2) 유민의 실태와 유입처

 18세기 유민 발생양상의 특징은 제반 사회경제적 변동으로 인해 유민의 수가 이전 시기에 비해 크게 증가한다는 점과 유민 중의 일부는 농촌으로부터 완전히 유리된다는 점이다. 이 시기 농민층 유망현상의 이러한 특징은 지방관의 보고와 진휼관계기록 등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정조 13년(1789)에 발생한 황해도 지역 유민 9,345명의 환집 추이를 관찰사 李時秀의 보고에 따라 정리하면<표 1>과 같다.

시 기 환 집(%) 미 환 집(%) 출 전
14년 3월 5일 2,526구(27.0%) 6,819구(73.0%) ≪정조실록≫
14년 6월 1일 4,143구(44.3%) 5,202구(55.7%) ≪일 성 록≫
15년 정월 2일 5,022구(53.7%) 4,323구(46.3%) ≪정조실록≫

<표 1>정조 13년(1789) 황해도 지역 유민 9,345구 환집추이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유망한 지 3년이 되었음에도 유민의 반수 정도가 아직 본거지로 되돌아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양상은 평안도의 경우도 정조 14년의 평안도 流亡民 2,353명 중에 942명이 8월 이전에 환집하였으며, 9월에서 12월 사이에 331명이 추가로 환집하는데 그치고 유망민의 거의 절반인 1,083명은 본거지로 되돌아오지 않고 있다.234)≪正祖實錄≫권 31, 정조 14년 12월 갑인. 이처럼 해가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민의 거의 반수 정도가 본거지로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은 이제 유민들 중의 일부는 농촌에 재긴박되는 것이 아니라 농촌으로부터 완전히 유리되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영조 29년(1753)년부터 33년까지 松都府에서 飢民과 流丐에게 행한 진휼사실을 기록한<松都設賑啓錄>235)≪松都設賑啓錄≫(≪各司謄錄≫京畿道篇 4, 國史編簒委員會, 1982).의 분석을 통해 이 시기 유민의 이러한 특징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이들에 대한 진휼은 매년 2월에서 5월 사이에 행해졌는데, 이 때 양곡을 지급받은 기민과 유개 숫자의 변동추이를 월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연 대 구 분 2 월 3 월 4 월 5 월
영조 30년
(1754)
기 민 2,587 2,646 4,911 4,948
유 개 73 140 271 427
영조 31년 기 민 5,806 5,911 5,943 6,124
유 개 180 113 154 220
영조 32년 기 민 7,350 7,357 7,412 7,514
유 개 16 360 420 492

<표 2><송도설진계록>의 기민·유개 구수 월별 변동추이236)分給은 매달 10일 간격으로 3번 하는 것이 원칙이나, 경우에 따라서는 한두 번에 그친 경우도 있다. 위 표의 口數는 해당 월의 마지막 지급 때의 구수를 기준으로 정리한 것이다.

 위<표 2>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토지에서 완전히 축출된 유망층이 상존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즉 토지에 어느 정도 긴박된 飢民과는 달리 토지로부터 완전히 유리된 유개의 숫자가 3년여에 걸쳐 기록되고 있는데, 송도부의 진휼담당자들은 이들 유개들을 ‘無田無族屬者’, ‘籍外流乞’ 등이라 하여, 이들을 토지로부터 완전히 이탈한 유망층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경기도가 이와 같으니 나머지 여러 도의 실정도 가히 알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이 시기 토지로부터 이탈한 유망층의 확대현상을 이해할 수 있다.

 광범위하게 발생한 유민들의 존재형태는 다양하였다. 유민들 중의 일부는 농촌으로부터 완전히 이탈하여 상업이나 수공업·광업 등 자본제적 관계 아래에서 임노동층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많았지만, 또한 불완전하게나마 토지와 재결합하여 잔존하는 경우도 있었다. 먼저 유민층의 향촌내 존재형태로 일정한 거처가 없는 ‘無根無着之類’가 사료에 보이는데, 이들은 농업노동자로서 고용처를 찾거나, 그렇지 않으면 무리를 지어 몰려다니는 떼거리로 표현되듯이 이곳저곳을 편력하는 농민층이었다. 유개의 지경에 이르지 않고 옷 입은 겉모습이 일반인과 다름없는 자들이 남녀를 막론하고 閭家에 돌입하여 공갈치고, 주구를 일삼는다는 기사는237)≪備邊司謄錄≫201책, 순조 11년 5월 6일. 향촌내 유망층의 일면을 보여준다 하겠다.

 한편 토지와 향촌으로부터 완전히 이탈한 유민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살 길을 찾아 다양한 지역으로 유망하였다. 이들의 유입처를 그 지역을 기준으로 구분해 볼 수 있는데, 첫째로는 도시 특히 서울지역으로의 유망을 들수 있다. 이것은 도시가 갖는 임노동자의 수요와 서울지역에서 집중적으로 행해지는 진휼대책에서 기인하였다. 당시로서는 서울이 가장 훌륭한 구휼제도를 구비하고 있었으며, 상공업의 발달면에서도 다른 지방에 비해 훨씬 앞서 있었던 까닭에 유민들의 상당수가 서울로 몰려들고 있었다.238)孫禎睦,≪朝鮮時代 都市社會硏究≫(一志社, 1977), 157∼165쪽. 일례로 영조 17년(1741)에 경기·황해·강원도 삼도의 유민 중 서울로 몰려든 수가 1,400여 명이나 되었다.239)≪英祖實錄≫권 53, 영조 17년 3월 신묘. 영조 33년에는 通津·金浦·陽川·富平 등지의 유민들이 京江가에 몰려들어 새로운 촌락을 형성하였는데, 한성부에서는 호적에 누락된 이들을 입적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240)≪承政院日記≫1144책, 영조 33년 5월 23일. 이처럼 유민들의 서울 집중으로 서울의 인구는 17세기 중엽을 고비로 크게 증가하였으며, 나아가 공간적으로 확대되어 행정구역의 재편을 가져왔다.241)楊普景,<서울의 공간 확대와 시민의 삶>(≪서울학연구≫1, 1994), 54∼56쪽. 18세기 전반에는 경강의 중심부인 용산·서강·한강·두모포 등지가 각각 한성부 五部 밑의 행정단위인 坊으로 편입되었고, 18세기 후반에는 경강 하류지역인 망원·합정 지역이 다시 연희방·연은방·상평방으로 편제되었으며, 坊制에 편입되지 않았던 동대문 밖 지역도 숭인·창신방으로 편입되었다.242)高東煥,≪18·19세기 서울 京江地域의 商業發達≫(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3), 298쪽.

 서울로 들어온 유민들은 뚜렷한 거처가 없이 길거리를 떠돌며 노숙하거나 성 밖 교외지역 곳곳에 움막을 짓고 살면서 걸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조금 나은 자들은 貰居 또는 借居하면서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용역으로 임금을 받아 먹고 사는 임노동자가 되었다.243)조성윤,≪조선후기 서울 주민의 신분 구조와 그 변화-근대 시민 형성의 역사적 기원-≫(연세대 박사학위논문, 1992), 51쪽. 당시 한강 연안에는 稅穀船을 비롯한 각종 선박에 의해서 쌀·어물·목재를 비롯한 전국의 물산이 집중되고 있었는데, 배에 상품을 선적하고 하역하는 작업을 비롯한 각종 노동에 많은 임노동자들이 고용되고 있었다. 또한 정부가 시행한 山陵役·築城役 등과 같은 대규모 토목공사와 도로 보수, 개천 준설과 같은 공사에도 도시로 흘러온 유입민들이 募軍으로 고용되기도 하였는데, 이들 모군은 종래의 징발 役軍과는 달리 임금을 지급받는 임노동자층이었다.244)尹用出,≪18世紀 徭役制의 變動과 募立制≫(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1), 273∼275쪽.

 둘째는 조선 후기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에 따른 광업·수공업·상업 발달지역으로의 유망이다. 조선 후기 생산력의 발전은 사회적 분업을 진전시키고 있었는데, 이는 곧 借地경쟁에서 배제된 빈농·무토지민이 농촌에서 축출된다 하여도 이들이 흡수·수용될 수 있는 고용기회가 그만큼 확대되었음을 의미한다.

 조선 후기 광산업의 발전에 따라 성립된 18세기 ‘別將’制下의 官設民營鑛業과 18세기 말 19세기 전반기 ‘物主’制下의 자본제적 민영광업에서 생산을 담당하는 광산노동자들은 “생활할 터전도 없고 호적에도 들어있지 않은 무리” 또는 “의지할 곳 없는 부류들로 稅役을 피해 투입된 자들”로서 이들은 농촌에서 유리된 빈민들이었고 세역을 도피한 농민들이 대부분이었다.245)柳承宙,≪朝鮮時代鑛業史硏究≫(高麗大 出版部, 1993), 309∼311·385∼387쪽. 이처럼 광산에 몰려든 유민들은 대개 店所의 채굴 제련작업에 고용되어 그 수가 한 점소 당 대개 백여 명 이상에 달했으며, 매일 또는 매월 일정한 雇價를 받고 종사한 임노동자들이었다.246)柳承宙,<朝鮮後期 金銀銅鑛業의 物主制硏究>(≪韓國史硏究≫36, 1982), 146쪽. 또한 조선 후기 이래의 수공업의 발달과 더불어 출현한 자영수공업체인 유기점·야철점·직조점 등에는 ‘店主’ 또는 ‘物主’라고 부르는 고용주가 있었고 그 고용주는 많든 적든 일정한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었다. 이들 노동자 역시 농민층 분해과정을 통하여 분출된 소위 ‘농토가 없어 농사를 짓지 못하는 농민’으로 구성되어 있었다.247)金泳鎬,<朝鮮後期 手工業의 發展과 새로운 經營形態>(≪19世紀의 韓國社會≫, 成均館大 大東文化硏究院, 1972), 185∼186쪽.

 한편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은 전국적인 場市의 발달 및 상업도시의 성장을 가져왔다. 이러한 상품화폐경제의 발달과 더불어 巨商으로서 개성상인·의주상인·동래상인·경강상인 등의 활동이 두드러진 것도 새로운 현상이었지만, 몰락한 농민층이 스스로 이농하여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도 당시의 실정이었다. 특히 상공업도시로 발달하고 있던 서울의 亂廛商人·潛商·私商들은 바로 농촌을 떠난 유민들이었다. 즉 이들 유리민들은 다시 농촌에 돌아가지 않고도 상업을 통하여 생계를 이을 수 있었으며, 그 결과 상업도시의 발달과 더불어 도시인구의 증가를 가져오기에 이르렀다.248)李世永,<18, 9세기 穀物市場의 形成과 流通構造의 變動>(≪韓國史論≫9, 서울大, 1983), 206∼208쪽.

 셋째는 국가의 수탈이 미치지 않거나, 상대적으로 덜한 지역으로의 유망으로써 대체로 화전지대, 海島지역, 북쪽 국경지역 등으로의 유망을 들 수 있다.

 조선 후기에 광범히 개간되고 보급되던 火田은 단순히 원형에 가까운 遊農火田이 아니었다. 이러한 화전과 더불어, 여기서 발전하면 1, 2년 혹은 3년 정기로 휴한하고 경작하는 歲易田으로, 나아가서는 常耕田의 개발이 동반되었다. 화전은 山多野少한 평안·함경·강원·황해도 등 북부지역 및 충청도 산읍에서 특히 성행하였는데 이러한 화전지대로 많은 수의 유민이 몰려들고 있었다. 즉 인구증가·토지겸병과 소작지의 광작 등으로 토지에서 배제되는 농민들이 속출하여, 이들은 산간계곡으로 유랑하며 화전을 가꾸었던 것이다. 특히 화전은 田役·賦役 등의 부세를 피할 수 있었기 때문에 국가의 부세수탈로 인해 유망하게 된 많은 유민들이 몰려들고 있었다.249)申虎澈,<朝鮮後期 火田의 擴大에 대하여>(≪歷史學報≫91, 1981).
李景植,<朝鮮後期 火田農業과 收稅問題>(≪韓國文化≫10, 1989).
산간지대로 몰려든 유민은 ‘入作’이라 불렸는데,250)≪顯宗改修實錄≫권 6, 현종 2년 윤 7월 경인. 현종 7년(1666)에 도승지 金壽興은 이들의 성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여러 도의 入作한 무리들이 열 명이나 백 명씩 떼를 지어 신역을 피하기 위해 산골짜기 속에서 살고 있는데, 이들은 名籍이 관가에 소속되지 않은, 일종의 교화를 벗어난 백성이다(≪顯宗改修實錄≫권 14, 현종 7년 3월 임오).

 이처럼 많은 유민들이 산중으로 몰려들어 화전을 개간함에 따라 수백 년 된 숲이 불타 없어지고, 이로 인해 시내가 말라붙어 가뭄의 한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251)≪備邊司謄錄≫23책, 현종 4년 12월 18일. 이에 따라 조정에서는 현종 7년의<入作流民入籍事目>과 숙종 원년(1675)의<火田禁斷事目>등 다양한 대책을 시행하였으나 그 근본적인 원인인 유민에 대한 안집책이 효과적으로 시행되지 않는 한, 이러한 대책은 실효를 거둘 수 없었다.

 한편 국가의 부세수탈을 피하고 살길을 찾아서 많은 수의 유민들이 섬지방으로 들어가거나, 북쪽의 국경지역으로 유망하였으며 나아가 越境하기도 하였다. 유민들의 海島入住는 주로 17∼18세기에 걸쳐 전란도 연안의 도서지역을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252)李海濬,<新安 島嶼地方의 歷史文化的 性格>(≪島嶼文化≫7, 1990), 110쪽. 유민의 해도입주 이유에 대해 효종 6년(1655) 해남에 거주하던 尹善道는 海島民의 폐단을 언급하면서 “유민들이 해도에서 거주하는 까닭은 인구는 많고 땅은 적어서 육지에서 살아갈 길이 없기 때문으로, 그 수는 수만 명에 이른다”고 하였다.253)尹善道,≪孤山遺稿≫권 2, 時弊四條疏. 유민의 해도입주 실태를 보면 숙종 33년(1707)에는 전라도의 可佳島에만 100여 호의 유민이 몰려들었으며,254)≪備邊司謄錄≫58책, 숙종 33년 8월 21일. 영조 7년(1731) 호남어사 黃晸은 “남해 연안의 여러 섬들이 悍民 중 군역을 도피한 자와 역모 연좌자의 소굴이 되고 있다”255)≪英祖實錄≫권 29, 영조 7년 정월 무진.고 보고하였다.

 이처럼 많은 수의 유민들이 섬으로 몰려들어 거주함에 따라 이에 대한 다양한 대책이 강구되었다. 조정에서는 기존의 민인의 해도입주를 금지하는 정책에서 전환하여 身役을 부담하지 않는 이들에게 民役을 부담시키는 방안과,256)≪英祖實錄≫권 62, 영조 21년 9월 기축. 이들을 적극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도서에 대한 ‘設邑論’이 제기되었다.257)≪英祖實錄≫권 73, 영조 27년 2월 기축. 또한 정조 17년(1793)에는 인구증가에 따른 경작지 부족현상을 타개하고 海防에 이용하기 위해 長淵의 大靑島·小靑島에 민인들이 들어가서 경작하는 것을 허락하는 한편 이들의 정착을 돕기위해 農牛와 종자를 공급하기도 하였다.258)≪正祖實錄≫권 37, 정조 17년 4월 경인.

 한편 유민들의 일부는 북쪽 국경지역으로 유망하였는데, 영조 17년 成川江 沿邑의 山谷 개간처에 많은 수의 南土流民이 몰려들었다.259)≪備邊司謄錄≫109책, 영조 17년 8월 3일. 정조 원년에는 함경도 北靑의 天坪지역 공활지에 유민이 몰려들어 거처하는데 그 수가 100여 호에 이르러 창고를 개설하고 환곡을 시행하기도 하였다.260)≪正祖實錄≫권 3, 정조 원년 4월 임인. 이처럼 북쪽 국경지역으로 많은 유민들이 몰려듦에 따라 厚州·茂昌·閭延·虞芮·慈城 등 廢四郡지역의 복설과261)≪正祖實錄≫권 5, 정조 2년 정월 갑술. 함경도 長津 등에 대한 ‘설읍론’이 제기되었다.262)≪承政院日記≫1629책, 정조 11년 7월 4일. 한편 유입민의 증가로 새로운 개간지가 필요하게 되자 조정에서는 개간처를 확대하고 新接民에 대한 安接방안을 강구하였다. 정조 17년 강계부의 麻田嶺과 慈柞嶺 사이에 三川坊을 설치하고 유민들의 개간을 허락하자 1년 만에 1,161호가 신접하였는데,263)≪日省錄≫ 정조 18년 11월 19일. 이들에 대한 안접방안으로 우선 해당 민가에 대해 陳荒田을 起耕하면 3년 동안 조세를 면제해주고 風憲·禁監·尊位 등의 책임 아래 家座와 田土를 헐값에 구입할 수 있도록 주선해주었으며, 農糧·農牛 등과 같은 생산수단을 대여해주도록 조치하였다.264)≪江州文蹟≫(≪地方史資料叢書≫5, 驪江出版社, 1987) 新來民除役事傳令及節目 新來民安接事傳令.

 한편 北界지역의 유민들 중 일부는 살 길을 찾아 국경을 넘나들기도 하였다. 西北兩道民을 중심으로 특히 함경도민이 다수를 차지한 이들은 채삼·수렵·벌목을 통한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해 월경하였다.265)金慧子,<朝鮮後期 北邊越境問題 硏究>(≪梨大史苑≫18·19, 1982). 숙종 11년(1685)에 三水·甲山·江界 등지의 채삼인들이 월경하여 淸人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犯越作變罪人을 체포 조사한 결과 이들은 대부분 산골의 유망민이었다.266)≪備邊司謄錄≫39책, 숙종 11년 11월 10일. 조정에서는 범월이 청과의 외교적 마찰을 일으킴에 따라 숙종 12년<南北蔘商沿邊犯越禁斷事目>과 숙종 14년<邊邑採蔘犯禁之律>등 처벌법을 강화하고 변경의 수비를 엄칙하였으며 어사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각종의 대책에도 불구하고 유민들의 범월은 계속되었으며, 영조 23년(1747)에 국경을 넘어 14년을 거주하며 자식을 낳아 기르다가 체포, 압송된 慶興府婢 參禮와 小業의 예에서 알수 있듯이 영구이주 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267)≪英祖實錄≫권 66, 영조 23년 12월 갑술.

 이처럼 유민들은 살길을 찾아서 다양한 지역으로 유망하였는데, 한편으로 유민들의 일부는 국가의 부세수탈을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 승려, 居士가 되기도 하였다. 이 시기 피역유민의 승려화 추세는 “일반 백성 중에 부세를 안내려고 꾀하는 자들이 잇따라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良丁이 날로 축나고 군졸의 정원을 채우기 어려울 정도”268)≪備邊司謄錄≫28책, 현종 10년 12월 22일.로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하였다. 이에 따라 조정에서는 이에 대한 대책으로 이미 유명무실해진 도첩제의 실시를 강화하거나,269)≪英祖實錄≫권 61, 영조 21년 5월 갑신. 사찰을 훼파하여 승려를 환속시키자는 논의 등이 제기되었다.270)≪肅宗實錄≫권 31, 숙종 23년 5월 정유. 한편 조선 전기에 환속 승려를 중심으로 형성된 거사배에, 조선 후기에 와서 유민의 일부가 합세하여 그 수가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271)全信宰,<居士考>(≪韓國人의 生活意識과 民衆藝術≫, 成均館大 大東文化硏究院, 1984), 463쪽. 정조 10년(1786)에 경상도 河東 일대에 몰려든 거사집단에 대해 조정에서는 이들을 “중도 아니고 속인도 아니며 이름은 호적에서 빠져 있고 身役은 지지 않으니 유민 중에 가장 수상한 자”로 규정하고, 이들을 병역에 충정하거나 絶島의 노비로 삼는 등의 대책을 강구하였다.272)≪承政院日記≫1596책, 정조 10년 2월 22일.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유민들은 다양한 경로로 유망하고 있었다. 그런데 국가권력 및 지주층의 수탈에 따라, 농촌으로부터는 생산력 발달에 따라 절감된 필요노동력 이상이 유출되었으며, 상공업 및 도시로는 필요 이상의 과잉노동력이 유입됨으로써 이들을 흡수·수용할만한 고용기회가 상대적으로 결여되고 있었다.273)裵亢燮,<壬戌民亂 前後 明火賊의 活動과 그 性格>(≪韓國史硏究≫60, 1988), 180쪽. 따라서 농촌에서 벗어난 다수의 유민들은 광업·수공업 등의 비농업 분야로 흡수되었지만 사회적 분화의 미숙성과 지주층 및 국가권력의 중첩되는 수탈로 유민들의 일부는 유개·도시빈민·부랑자층과 같이 광범위한 부유집단을 형성하여 불안정한 상태에서 유리걸식하고 있었다.274)邊柱承,<19세기 流民의 실태와 그 성격-浮遊集團을 중심으로->(≪史叢≫40·41, 1992), 52∼55쪽.

 유민들의 이러한 불안정한 처지는 지배층의 수탈에 대한 저항의식을 갖게 하였다. 그리하여 체제의 긴박으로부터 벗어나 첨예한 저항의식을 갖게 된 유민들 중의 일부는 이 시기의 다양한 저항활동에 참여하였다. 즉 일부 유민은 무장집단인 명화적의 활동을 통하여 지배층에 적지 않은 부담을 주었으며, 나아가 영조 4년(1728)의 戊申亂에 하층 무력기반으로 참가하거나,275)李鍾範,<1728年 戊申亂의 性格>(≪朝鮮時代 政治史의 再照明≫, 汎潮社, 1985). 정조 9년(1728)의 ‘居士輩 謀逆同參事件’과 같은 각종 변란에도 참여하였다.276)全信宰, 앞의 글. 요컨대 유망은 외형상 그리 격렬하지는 않지만, 여러 저항의 토대를 이루는 것이며 나아가 체제의 존립기반을 흔드는 것이었다. 물론 유민의 대다수는 아직 현실과 체제를 변혁하고자 하는 뚜렷한 의지와 지향을 갖고 있지는 못하였지만, 그러한 단계로 성장하기 위한 첫번째 조건인 체제의 긴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하였다는 데 그 의미가 있었다.277)홍순민,<17세기 말 18세기 초 농민저항의 양상>(≪1894년 농민전쟁연구 2≫, 역사비평사, 1992), 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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