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2. 유민과 명화적
  • 1) 유민
  • (3) 정부의 유민대책

(3) 정부의 유민대책

 정부에서는 농민의 대규모 유망현상에 직면하여 농민의 재생산기반을 유지하고 수취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각종 진휼정책과 대민 통제책 등을 시행하였다. 정부의 진휼정책은 田稅를 비롯한 諸稅의 견감 및 身役·貢物의 감축을 비롯해 춘궁기에 식량과 종자를 대여하였다가 가을에 회수하는 환곡제도, 그리고 혹심한 기근이 들었을 때 飢民에게 곡식을 무상으로 공급하는 白給 등이 있었다.278)文勇植,<18세기 후반 진휼사업과 賑資 확보책>(≪史叢≫44, 1995), 105쪽. 그런데 18세기 들어 환곡의 진휼기능이 점차 위축됨에 따라 조선 후기 진휼정책의 핵심으로 부각된 것이 구제곡의 무상지급 즉 賑給이었다. 진급의 대상은 원칙적으로 부황이 든 기민 중에서도 호적에 실린 無土, 無依之類로 제한한 위에 다시 無籍者와 유민을 제외시켰다. 진급대상에서 유민을 제외시킨 것은 본토를 떠나면 굶어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지시킴으로써 流散을 방지하고 수령의 본읍민에 대한 구제의 책임을 강조하려는 목적에서였다. 무적자의 제외 역시 호적에서 이탈되어 조세부담을 피하려는 민의 조세 기피를 저지하고 국가의 담세자 우선 구제 입장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다. 이처럼 진급은 긴급 인명 구제책이면서 동시에 체제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정치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279)鄭亨芝,≪朝鮮後期 賑恤政策 硏究-18世紀를 중심으로-≫(이화여대 박사학위논문, 1992), 211∼212쪽.

 정부에서는 이러한 진휼정책을 시행하는 한편 농민의 유망현상을 억제하기 위해 대민 통제책을 한층 강화하였다. 정부에서는 농민의 유리·도산을 방지하여 징세대상자를 확보, 파악하는 수단으로 五家統制·號牌法·鄕約制를 이용하였다. 18세기에 이르러 부세의 징수가 邑勢·民丁이 반영되지 않은 채 군현 단위의 총액제로 경직되게 운영되어 많은 농민들이 피역의 수단으로 유망하게 되었고, 이에 부세의 부족분이 향촌에 남아 있는 다수의 농민의 추가부담이 됨에 따라 유망의 악순환 현상이 일어났다. 따라서 조선왕조는 농민의 유리를 막고 더 나아가 다른 지역 출신 유리민을 적절히 제지하며, 유리 가능성이 높은 계층을 사전에 등록시켜 감시하는 제도의 확립이 절실했다. 숙종 원년(1675)에 제정된<五家統事目>과 숙종 3년의<寬恤節目>, 그리고 숙종 37년의<良役變通節目>등은 이상의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작성된 것이다.280)吳永敎,<朝鮮後期 五家作統制의 構造와 展開>(≪東方學志≫73, 1991).

 그러나 이와 같은 각종의 진휼정책과 향촌통제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농민이 향촌을 이탈하여 유망하였다. 따라서 정부에서는 이들 유민에 대한 직접적인 대책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부의 유민에 대한 직접적인 대책으로는 유민에 대한 최소한의 양식과 죽의 지급, 의복과 주거용 가마니의 제공 그리고 전염병이 성행할 경우의 구료대책, 사망 유개의 매장대책 등이 있었다.

 정부에서는 서울로 많은 수의 유민이 몰려들자 그 대책의 일환으로, 도성의 유개를 한강 가운데에 있는 栗島[밤섬]에 수용하였다가 서해의 각 섬에 分送하는 한시적인 특단의 조치를 강구하기도 하였다.281)邊柱承,<숙종 23년 都城流丐 栗島收容策의 시행과 그 결과>(≪全州史學≫4, 1996), 144쪽. 숙종 23년에 형조판서 李世華는 도성 안 유개들이 도적질을 하는 등 사회의 불안요인이 되고 있다며, 이들을 경기도 연안의 여러 섬으로 분산 수용할 것을 건의하였다.282)≪肅宗實錄≫권 31, 숙종 23년 2월 신해. 이에 따라 율도에 모인 유민들은 곧 각 섬에 분산 배치되었는데 大島에는 40∼50구, 小島에는 10여 구가 분송되었으며, 이들 중 丁壯者는 漁鹽의 役을 돕도록 하였고 幼稚者는 조정의 事目에 따라 수양하도록 하였다.283)≪承政院日記≫370책, 숙종 23년 3월 11일. 그러나 이러한 분산 수용은 유민대책으로 효과적인 방안이 되지는 못하였다. 율도에 수용되었던 875명 가운데 죽거나 전염병에 걸린 자를 제외한 700여 명이 스스로 원하여 섬을 나왔으나, 그 뒤에 얻어먹을 곳이 없어 죽은 자가 또한 절반이 넘었다는284)≪肅宗實錄≫권 31, 숙종 23년 5월 갑진. 사실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정부의 직접적인 유민대책 중 가장 기본적인 것은 유민의 본적지로의 환송이었다. 유민들에게 마른 양식을 지급하여 본적지로 환송시키는 것은 조선 전기 이래의 기본적인 유민대책이었다. 그러나 일정한 생업기반이 없어 본거지를 이탈한 유민들에게 있어 이러한 환송책 역시 효과적인 대책이 되지 못하였다. 유민들은 본거지로 되돌아간다 하여도 경작할 땅이 없었으며, 국가의 부세수탈 역시 계속되기 때문에 그들은 다시 유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성의 유개들이 양식을 받아먹기만 하고 본거지로 돌아가는 자는 한 사람도 없다는 지적은285)≪備邊司謄錄≫53책, 숙종 29년 3월 2일. 이러한 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다. 정부의 관료들도 유민들이 본거지로 돌아가기 어려운 이유에 대해서 정확히 인식하고는 있었다. 숙종 29년(1703) 大司諫 李健命은 도성으로 많은 유민이 몰려드는데, 이들은 일정한 생업과 田土가 없어 유망하였기 때문에 이들을 본적지로 돌려보낸다 하여도 이들은 곧바로 다시 유망하게 된다고 하였다.286)≪肅宗實錄≫권 38 상, 숙종 29년 3월 경술. 또한 行司直 李寅燁은 기민들은 부역을 견디지 못해 유망하므로 지방관의 부역침탈을 엄금해야만 많은 유민들이 본거지로 되돌아갈 것이라고 하였다.287)≪肅宗實錄≫권 38 상, 숙종 29년 3월 임자. 이처럼 유민의 본적지로의 환송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게 됨에 따라 18세기 중엽을 고비로 도성유민의 본적지로의 환송은 자원자에 한하여 시행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변화는 18세기 이후 서울의 상품화폐경제가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유민들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성장하였기 때문이다.

한성부에 분부하여 五部로 하여금 일일히 조사하게 하니, 관동 11읍 지역의 유민으로 도성에 몰려든 수가 260여 명이다. 이들 가운데는 수년 전에 몰려온 자도 있고 작년에 들어온 자도 있다. 이들 무리는 이미 정착하여 되돌아 가기를 바라지 않으므로 강제로 돌려보내기 어렵다. 한성부에 명하여 이들을 일제히 불러모아 만약 돌아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전례대로 마른 양식을 지급하여 본토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하라(≪承政院日記≫1399책, 정조 원년 5월 15일).

 본적지로 되돌아가기를 원하는 유민에게는 약간의 양식을 지급한 후, 지역별로 備邊郞·宣傳官 등의 책임자를 정해 환송하였다. 정조 14년(1790) 평안도·함경도·원춘도·황해도에서 도성으로 몰려든 유민 487명의 환송 절차를 보면 이들 중 장정에게는 米 3∼5두, 노약자에게는 米 2∼3두와 의복 구입비로 약간의 돈을 지급하고, 평안도 유민 49명은 비변랑 李冕膺, 함경도 유민 45명은 선전관 鄭周成, 원춘도 유민 206명은 선전관 趙華錫, 황해도 유민 187명은 선전관 李商一 등의 인솔에 따라 환송되었다.288)≪承政院日記≫1672책, 정조 14년 2월 4일·2월 6일.

 한편 유민이 대량으로 발생하는 만큼 遺棄兒의 발생 빈도가 높아져 이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게 되었다. 유기아를 양자, 노비, 고공으로 收養하는 유기아 수양법은 조선 전기에 이미 대체적인 규정이 마련되었으나 법체계를 본격적으로 갖춘 것은 숙종 21년(1695)의<乙亥遺棄兒收養法>이었으며, 이후 영조 8년(1732)<壬子賑恤事目>, 정조 7년<字恤典則>등을 제정하여 유기아·행걸아에 대한 관리, 수양 규정이 정비되었다.289)金武鎭,<조선사회의 遺棄兒 收養에 관하여>(≪啓明史學≫4, 1993). 유기아 留養은 유리걸식하는 여인 가운데 젖먹이는 자를 택하여 1인마다 두 아이씩 나누어 주고, 乳女에게는 일정한 식량을 나누어 주었다. 유리걸식하지 않는 자가 원할 경우에도 어린이마다 일정한 양의 식량을 보조하였다. 행걸아는 부모가 없고 친척 혹은 주인이 없어 의탁할 데가 없는 자들인데 이들은 진휼청에서 보릿고개까지 머물며 기르도록 하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유기아 수양법의 제정·정비는 유기아·행걸아에 대한 구휼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도망노비의 계속적인 증가로 인해 양반사회의 기반이 흔들리는 데 대한 배려도 포함된 조처라고 볼 수도 있다. 즉 새로운 노비창출을 법제화하지 않고는 노비의 충원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유기아, 행걸아에 대한 구휼을 기화로 노비를 확보하고자 한 것이다.290)鄭奭鍾,≪朝鮮後期社會變動硏究≫(一潮閣, 1983), 179∼182쪽.

 정부에서는 유민문제에 대한 대책을 여러모로 모색하였으나 그것은 대체로 유민들을 일시적으로 진휼하는 차원에 그쳤을 뿐, 근본적으로 유망의 원인을 없애려는 방향으로 나아가지는 못하였다. 따라서 다수의 유민들은 살 길을 찾아 불안정한 상태에서 유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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