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2. 유민과 명화적
  • 2) 명화적
  • (1) 명화적 발생의 배경과 조직체계

(1) 명화적 발생의 배경과 조직체계

 18세기의 농민항쟁은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앞선 시기의 항쟁을 잇는 것으로 지배층의 비리, 학정을 공공연히 비난하는 괘서사건, 지배층의 멸망을 예언함으로써 투쟁을 고취시키는 秘記·圖讖說의 유포, 수령을 축출하기 위해 시도되는 殿牌作變이나 松田放火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18세기에는 明火賊이라 불리는 도적집단의 활동이 주목되는데, 이들은 도처에서 치열한 투쟁을 전개하여 지배층에게 적지 않은 타격을 주었다.291)한상권,<18세기 前半 明火賊 활동과 정부의 대응책>(≪韓國文化≫13, 1992), 481쪽.

 먼저 명화적의 유래를 살펴 보면, 명화적은 일반 도적과는 다른 특성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丁若鏞은 나라를 좀먹는 큰 도적과 대비되는 작은 도적을 세 범주로 구분하였다. 첫째 “밤중에 창문을 뚫고 들어가 함과 고리짝을 열고 옷주머니나 상자를 뒤져서 옷이나 대야를 훔치거나, 혹은 가마솥을 떼어 가지고 달아나는 자”, 둘째 “칼을 품고 몽둥이를 소매 속에 감추고 길에서 사람을 기다려 우마나 돈을 빼앗고 칼로 찔러서 그 입을 막는 자”, 셋째 “준마를 타고 수 놓은 안장에 올라앉아 뒤쫒는 자가 수십 인이요, 횃불과 창검을 높이 세우고 부자집을 택하여 들어가 주인을 결박지은 다음 금고를 털고 곡식창고를 불지르며, 거듭거듭 협박하여 감히 발설하지 못하도록 하는 자”로 구분하고 있다. 여기서 첫째는 절도, 둘째는 강도, 셋째는 명화적을 설명하는 것으로 여겨진다.292)裵亢燮, 앞의 글, 194∼195쪽.

 이처럼 명화적은 무리를 지어 행동하며, 공격시에는 불을 지르는 화공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일반 강절도와는 다른 특성을 갖는 무장집단이었다. 법전에서는 일반 절도, 강도와 달리 이들을 “무리를 모아 도로를 차단하고 인명과 재산을 약탈한 경우에는 명화적으로 論罪한다”고 규정하였다.293)≪新補受敎輯錄≫刑典 臟盜.

 명화적의 활동은 조선 전기 이래로 계속되어 왔으나 18세기에는 이전 시기와 다른 양상을 갖는다. 조선 전기에는 자연재해와 농민들의 기근, 과중한 역부담, 지배층의 대토지 집적에 따른 농민층의 몰락 등으로 농민들의 일부가 명화적이 되었다.294)한희숙,<15세기 도적활동의 사회적 조명>(≪역사와 현실≫5, 1991), 157쪽. 그러나 18세기는 조선 후기 이래의 농업 생산력의 발전과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에 따른 농민층 분화, 지주층과 국가권력의 수탈에 따라 많은 농민들이 유망하였다. 광범하게 발생한 유망민들은 광업, 수공업 등과 같은 비농업 부문으로 흡수되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의 유망민들은 자립적 기반이 취약한 행상이나, 도시빈민, 거지 등의 부유계층을 형성하였다. 따라서 일정한 생업기반이 없이 불안정한 상황에 놓인 유민들은 호구지책의 한 방편으로 도적질을 통해 목숨을 연명하였으며, 이들의 도적행위는 점차 발전하여 무장집단인 명화적이 되기도 하였다. 영조 17년(1741) 谷山의 幼學 閔衡天의 상소는 이 시기 도적집단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소위 도적에는 두 종류가 있다. 흉년에 갑자기 도적이 되는 자들은 굶주림에 시달린 나머지 좀도둑질로 목숨을 도모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관아에서 널리 飢民을 뽑아 날짜를 헤아려 양식을 지급하고 본거지를 떠나지 못하게 한다면 보리가 피고 난 후 스스로 도적질을 멈출 것이다. 그러나 용모가 번지르하고 의관이 깨끗한 자들은 막기 어려운 도적이다. 兩西의 嶺東과 嶺北은 전에 없는 흉년을 당하여 자녀를 팔기를 보통 일처럼 하며 서로 잡아먹는 변이 눈 앞에 이르러서, 죽을 지경에 놓인 飢民들은 도적들이 호의호식하는 것을 보고 기꺼이 도적무리에 합류한다. 근래 官府를 침범하여 물화를 약탈한 三登·成川·鳳山의 도적들을 보면 이들은 작은 근심거리가 아니다. 이전부터 逃死亡命之類들이 관부로부터 멀리 떨어진 산간의 험준한 곳에 몸을 숨기고서, 무리를 불러모아 京鄕과 체결하고 八路에 널려 있다. 이들은 일조일석에 도적이 되는 무리가 아니다(≪承政院日記≫928책, 영조 17년 2월 18일).

 유민들의 도적집단화는 흉년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어서 이미 생업기반을 상실한 유민들은 명화적집단에 참여하여 지속적으로 활동하였다. 숙종 15년(1689)에는 농사가 흉년을 면했음에도 불구하고 경기·호서 지역에 명화적의 활동이 치성하여 이에 대한 대책으로<購捕節目>이 반포될 정도로 이 시기 명화적의 활동은 일상적이었다.

 이 시기의 명화적은 토지겸병의 심화와 부세수탈의 강화로 격심해진 농민층 분화의 산물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주요 구성원은 토지로부터 분리되었으나 아직 다른 곳으로 흡수되지 못한 유리농민층을 중심으로 당시 새롭게 발생한 광산노동자층 그리고 신분해방을 위해 도망한 노비층 등이 가세하여 이루어졌다.295)한상권, 앞의 글, 501쪽. 숙종 15년에 대구에서 잡힌 도적집단을 조사한 결과 도적 연루자들이 모두 “호적에 들어 있지 않고 紙牌도 없는 무뢰배”로 나타났는데,296)≪備邊司謄錄≫43책, 숙종 15년 12월 15일. 이들이 바로 토지로부터 이탈된 유리농민층이었다.

 한편 부세수탈을 피하여 승려나 거사가 되었던 자들도 명화적의 구성원이 되기도 하였다. “불을 지르고 도적질을 하는 자들은 대개 승려”297)≪肅宗實錄≫권 3, 숙종 원년 5월 신미.라는 지적과, “居士黨이 그 수가 적으면 명화적이 되고 많으면 역모를 도모한다”298)≪正祖實錄≫권 21, 정조 10년 2월 을유.고 한데서 알 수 있듯이 피역양민이 주축이 된 승려나 거사들도 명화적의 주요 구성원이 되었다. 또한 전반적인 기강해이에 따라 지방 감영에 소속되었다가 실직된 일부 포수들이 명화적의 일원이 되기도 하였다.299)蔡濟恭,≪樊巖集≫권 30, 畿甸賊徒處治事宜啓.

 조직력과 무장력에 있어서도 18세기의 명화적은 이전 시기보다 훨씬 발전된 형태를 갖추었다. 조선 전기의 경우 도적집단은 대략 20명 내지 40명이 한 부대를 이루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활이나 창, 칼로 무장하고 활동하였다.300)한희숙, 앞의 글, 151∼152쪽. 그러나 18세기에 활동하던 명화적은 총포로 무장하였으며 그 규모도 수백 명에 이를 정도였다. 이와 같은 18세기 명화적의 특성은 영조 3년(1727) 洪州의 幼學 李日章의 상소에 잘 나타나 있다.

銅錢이 유통된 이후로, 동전은 가볍고 저장에 용이하여 팔고 쓰는데 편리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간활무뢰한 무리들이 黨을 만들어서 山澤에 몰려들었다. 그 규모가 작은 경우는 수십 명씩 무리를 이루어 한밤중에 횃불을 들고 마을을 약탈한다. 규모가 큰 경우는 백 명, 천 명으로 무리를 이루어 두목을 두기까지 하는데 守令 혹은 邊將이라 칭한다. 日傘을 펼치고 총포를 쏘아대며 대낮에 거리낌이 없이 錢貨를 약탈한다. 만약 약탈한 물품이 곡물과 같이 운반하기 어려운 물건이면 유개들에게 나누어 주고 스스로 義賊이라 칭한다(≪承政院日記≫636책, 영조 3년 윤 3월 16일).

 이처럼 이 시기의 명화적은 전 시기보다 훨씬 발전된 조직, 무장을 확보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특히 조선 후기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에 따른 동전의 유통 보급으로 가치의 이전이 편리해지고 가치의 보관이 간편해졌을 뿐만 아니라, 팔고 쓰는 것이 편리하게 되어 종래보다 도적행위가 빈발하고, 그 집단의 규모가 훨씬 커졌다는 점은301)元裕漢,≪朝鮮後期貨幣史硏究≫(韓國硏究院, 1975), 174∼176쪽. 18세기 명화적의 주요한 특징이었다.

 이 시기의 명화적은 상당한 조직체계를 갖추었다. 명화적은 좀도둑과는 달리 무리를 모아 조직을 결성하였으며, 일부는 團號를 가지고 활동하기까지 하였다. 이들 團賊 중 서울에 있는 단은 ‘後西江團’, 평양에 있는 단은 ‘廢四郡團’, 재인은 ‘才團’, 유개인은 ‘流團’이라 칭하였다.302)≪英祖實錄≫권 53, 영조 17년 4월 임인. 이처럼 명화적은 지역적, 신분적 차이를 기준으로 조직되기도 하였다. 이들 명화적 집단은 영조 41년(1765) 正言 朴弼淳의 “일전의 강원도 금성현 명화적은 포청에 보고된 것이 300명 내지 400여 명이 되는데 본청에서는 겨우 5∼6명을 체포하였다. 300명씩 무리를 이루어 다니는데 그 수가 적지 않다”303)≪英祖實錄≫권 106, 영조 41년 12월 무진.라는 지적처럼 이전 시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대규모 조직이었다. 명화적은 이러한 대규모 조직 내에 ‘守令’, ‘邊將’이라 불리는 두목을 갖고 있었으며, 팔뚝에 화인을 새겨 조직원 간의 결속력을 과시하기도 하였다.304)≪備邊司謄錄≫43책, 숙종 15년 12월 15일. 이들은 “전라도 정읍에서 적도 100여 명이 창을 들고 총포를 쏘며 다니는데 그 수괴는 갑옷을 입고 말을 탔다”305)≪肅宗實錄≫권 54, 숙종 39년 9월 을사.는 묘사처럼 상당한 위세를 과시하였다. 명화적은 두목을 중심으로 “수백 명이 말을 타고 깃발을 세우며 총포를 쏘아대고 일시에 소리를 치며 돌진하고”,306)≪備邊司謄錄≫124책, 영조 28년 8월 1일. “북을 치면 진격하고 징을 치면 후퇴하여 마치 군사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307)≪英祖實錄≫권 39, 영조 10년 11월 갑신.는 묘사처럼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명화적이 이처럼 강력한 무장력과 전투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화약이나 鉛丸 등의 화력을 확보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명화적은 이들 무기를 사사로이 만들거나 몰래 사들여서 확보하였는데, 이는 명화적의 활동이 활발해지는 18세기 중엽에 화약과 연환의 분실이 빈번해지고 이에 대한 처벌이 강화되는 추세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리하여 영조 30년에는 “이후 화약 30근 이상을 분실하면 효수형에 처한다”는 규정을 새로이 제정하였는데, 이는 분실된 화약이 명화적에 밀매되어 이들의 무장력을 강화하는 데 기여한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308)한상권, 앞의 글, 502∼503쪽.

 명화적은 대규모의 조직과 무장력·전투력을 갖고 있었으므로 동료가 관군에 체포된 뒤에도 탈옥을 기도하였다. 즉 영조 6년 영흥부에 감금된 명화적 24명이 바깥의 적당과 결탁하여 옥문을 부수고 달아난 사건이 발생하였으며,309)≪英祖實錄≫권 27, 영조 6년 9월 무자. 영조 17년에는 곡산부에서 명화적을 심문하여 자백을 받아 사형에 처하려는데, 그 도당이 옥에 돌입하여 동료를 빼내 달아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310)≪英祖實錄≫권 54, 영조 17년 11월 신사. 명화적은 대낮에도 공공연히 관군을 공격하고 물화를 침탈할 수 있는 전투력을 갖추었다. 이들이 거리낌 없이 활동한 것은 영조 24년(1748)에 말을 타고 일산을 펼쳐든 채 討捕營이 있는 竹山을 공격하여, 공공연히 약탈을 자행하고 인명을 살상한데서 잘 드러난다.311)≪英祖實錄≫권 68, 영조 24년 11월 을묘. 그리하여 “명화적 수십 명이 깃발을 세우고 총포를 쏘면서 철원 읍내의 인가로 돌입해 들어오는데, 府使 黃震文은 벌벌 떨면서 끝내 나가 잡지도 못하고 곧바로 보고하지도 못하였다”312)≪肅宗實錄≫권 29, 숙종 21년 10월 임진.는 묘사처럼 경우에 따라서는 명화적의 전투력이 지방관아의 치안력을 능가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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