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2. 유민과 명화적
  • 2) 명화적
  • (3) 정부의 대책

(3) 정부의 대책

 정부에서는 명화적 활동이 치성하자 五家統과 같은 향촌 인보조직을 강화하는 한편<購捕節目>,<捕盜節目>등을 반포하여 포도활동을 독려하였다. 조선 전기 이래로 오가통조직은 인보조직으로서 도적을 방지하는 기능을 수행하였는데, 조선 후기에도 대민 통제책의 일환으로 오가통조직을 강화하려는 시도가 빈번하여 숙종 원년(1675)에<五家統事目>이 반포되고 영조 5년(1729)에는<五家統法申明舊制節目>등이 제정되었다. 한편으로 도적이 계속 빈발함에 따라<구포절목>을 개정하여 도적을 잡은 자나 고발한 자에 대한 포상규정을 강화하였으며,328)≪肅宗實錄≫권 29, 숙종 21년 12월 병진. 또한 일반 도적과는 다른 명화적이 치성함에 따라 명화적을 잡거나 고발한 자에 대한 별도의 포상규정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즉≪續大典≫에 명화적 5명 이상을 체포하거나 고발한 경우에 出身 또는 閑良이면 加資하고 公私賤에 대하여는 면천하며 향리와 驛吏는 면역시켜 주는 등의 규정을 마련하였다.329)≪續大典≫ 刑典 捕盜.

 한편 명화적이 무장을 하고 단을 형성하면서 조직적인 활동을 벌이자, 지배층의 토포방식도 단순한 治盜策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군사작전과 같은 성격으로 변모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수령이 겸하던 치도 임무를 영장에게 이관시키기 시작하는 17세기 중·후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18세기에 들어오면서 이러한 추세는 더욱 강화되었다. 이에 양서 지방에 대해서는 지금까지의 형식적인 兼營將體制를 탈피하고 독립적인 영장을 신설하였으며 더 나아가 병영으로 하여금 토포임무를 주관하도록 하였으며, 관동 지방에서는 회양에 防守使를, 그리고 철원에 방어영을 새로이 구축함으로써 관북과 연결되는 요충지를 장악하고자 하였다.330)한상권, 앞의 글, 517쪽.

 한편 오가통제는 국가 차원에서 끊임없이 시행절목이 반포되고 사안에 따라 재정비되고 있었으나 수령이 예하 군현의 통치를 위해 자의적으로 조직하여 반포 실시한 사례도 있었다. 지방 차원에서 실시된 오가통절목은 법전과 숙종대<오가통사목>에서 대체적인 틀을 따오고 시의에 따라 세부적인 조목을 첨가하였다. 지방 차원에서 논의된 安鼎福의 鄕社法은 향촌조직을 통한 이 시기에 도적 대책의 일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향사법에서는 도적의 발호에 대해 자체적인 향촌방어 대책으로 戶마다 활·창·총 가운데 하나의 병기와 木棍을 준비하고 統마다 炬·포승 등을 비치시켜 도적이 침입할 때 자체 방어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도적 토벌을 위한 실질적인 무력 담당자를 설정하여 추포와 기찰을 위임하며, 적도의 무리가 침략할 때는 이들에게 양식을 지급하도록 하였다. 이와 함께 鄕社牌式에 따라 통패·향사패의 사용을 통해 향촌민의 출입을 통제하려는 의도에서 각 호는 향장이 분급한 표로서 私記를 사용하고, 각 장은 官票를 사용하도록 했다. 이는 당시 향촌민과 도적이 혼유하여 분별하기 어렵고 향촌민이라 할지라도 적과 내통하는 일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강력한 통제로 적과 구별시키는 일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331)吳永敎, 앞의 글.

 그런데 이와 같은 정부의 대책은 효과적으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정부에서는 각종 규정을 마련하여 수령의 포도활동을 독려하였으나 수령들은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사실을 은폐하기에 급급하였던 것이다. 일례로 영조 17년(1741)에 곡산부에서 명화적이 관아에 돌입하여 동료를 빼내 달아나는 사건이 발생하였으나 곡산부사는 겁을 먹고 거짓 보고하였으며, 감사도 장계를 올려 논죄하지 않고 은폐하려다 발각되어 곡산부사와 함께 처벌을 받았다.332)≪英祖實錄≫권 54, 영조 17년 11월 신사. 이러한 폐단은 수령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어서, 禹夏永의 “포교, 포졸들이 도적을 잡아야 할 때면 진짜 도적은 잡지 못하고 유개 중의 한 사람을 대신 잡아들여 책임을 모면한다”333)禹夏永,≪千一錄≫5, 化俗 流丐.라는 지적처럼 말단의 포교, 포졸들에게서도 빈번하였다. 나아가 일부 포교들은 도적을 잡기보다는 도적과 결탁하여 도적행위를 조장하고, 일반 민인에 대한 탐학에 앞장섬으로써 이 시기의 커다란 사회문제가 되기도 하였다.334)魏伯珪,≪存齋全書≫권 3, 封事 禁盜之弊.

 요컨대 정부의 도적대책은 생업수단을 갖지 못한 유민들이 생활의 한 방편으로 도적질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직시한 근본적인 대책이 아니라 일시적인 현상타개책에 불과하였다. 이 시기 유민은 농민층 분화의 산물이었으므로, 토지문제나 부세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 없이는 해소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유민을 안집시키기 위한 근본적인 개혁이 수반되지 않는 한 유민이 중심이 된 명화적에 대한 정부의 대책은 효과를 거두기 어려웠던 것이다.

<邊柱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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