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3. 여러 지역의 항쟁과 ‘무신란’
  • 1) 18세기 초 민중의 동향과 변산군도

1) 18세기 초 민중의 동향과 변산군도

 16·17세기 조선왕조는 잇따른 전란과 정변을 극복하면서 체제유지에 성공하였다. 전국적 차원에서의 활발하고 신속한 농지개간과 농법개선, 상품화폐경제의 확대는 국가재조의 사회경제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또한 노비추쇄사업이나 호패법·오가작통법도 부분적이나마 신분제와 향촌지배질서의 동요를 방지하고 국가의 사회통제 기능을 회복하는데 기여하였다. 여기에 주자학의 명분론과 의리관은 중세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사상통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 과정은 물론 순조롭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조선사회의 활발한 경제복구와 상품경제의 발전과 함께 지주적 토지소유가 확대되면서 일부 농민은 경영과 상품화를 통하여 성장하기도 하였지만 다수 농민은 토지가 전혀 없거나 조금밖에 없는 처지로 전락하였다. 당시 지주는 수확물의 절반에 이르는 작료를 거두었을 뿐 아니라, 田稅·貢賦 등을 작인에게 전가시켰으며, 심지어 수확 후에 짚을 빼앗아 가기도 하고, 뇌물을 받고 작권을 보장하는 일도 있었다. 전호농민은 抗租로써 맞서기도 하였으나, 봉건권력을 배후로 한 지주는 관권을 동원하여 작권을 빼앗는 일이 적지 않았다. 또한 ‘錢荒’으로 농민의 자립과 성장은 한층 곤란하게 되었다. 농민들은 화폐의 수요를 충당하기 위하여 궁박상태에서 그 생산물을 헐값으로 팔지 않으면 안되었으며, 지주·부호 및 상인에게 부채를 지게 되면서 얼마되지 않는 토지나 가옥마저 전당잡히게 되었다. 전호농민에 대한 경제외적 강제와 지주 본위의 상품경제의 발전으로 인하여 ‘민에게서 나오는 재화가 모두 위로 흘러가서’ 민은 더욱 가난하게 되었다.335)李 瀷,≪星湖僿說≫권 16, 人事門 民貧.

 조선 후기 사회생산력의 발전은 일부 농민에게 성장의 기회를 주는 것이면서 동시에 대규모 빈소농민을 양산하였다. 또한 경작지마저 얻기 어려운 농민도 늘어났는데 이들은 농촌에 남아 형편이 나은 농가의 머슴이 되거나 아니면 지주 양반호에 고용되어 얼마간의 노임을 받아 생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같은 현실에서 다수 영세 농민층은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내핍생활을 하면서 농법을 개량하고 환금작물을 재배함으로써, 그리고 山地를 개간함으로써 농민적 잉여를 비축하며 시장경제에 대응하고자 하였다. 자립경영·자력생활을 위한 농민의 생산활동은 활발하였다. 산간과 절도에서의 개간과 산간벽촌에까지 확대된 장시 등은 이같은 농민적 생산활동의 귀결이었다.336)金容燮,<量案의 硏究>(≪朝鮮後期農業史硏究≫1, 一潮閣, 1970).

 그러나 흉년을 당하면 많은 농민은 유랑하거나 도망가는 일이 많았다. 정부에서 흉년에 실시하는 荒政이 빈소농민을 구제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오히려 민생을 도탄에 빠뜨리고 있는 실정이었다. 당시 부세제도의 모순은 일시적 운영상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변동과 괴리되는 바의 구조적·제도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것은 중세적 법제와 원칙을 폐기함으로서 다시 말하여 大變通을 통해서 타개될 성질의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지배층은 사회변동의 실상을 어느 정도 반영한다고는 하지만 민생현실과 민원을 대폭 수용하면서 전면적 개혁에 나서지 않았다. 신분제의 원칙과 결부법·양전법의 법전규정을 그대로 유지한 채, 小變通의 차원에서 그 운영개선을 추구하였을 따름이었다. 국왕을 정점으로 한 관료 지주계급은 國虛民貧을 타개하고 부국강병을 추구함에 있어서 자신들의 이해와 충돌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중세적 원칙과 골격을 견지하는 방향에서 이를 추진하고자 했던 것이다.

 흉년을 맞이하여 실시하는 황정에서 국가와 민의 대립·갈등관계는 한층 노골화되었다. 田政에 있어서 감세조치는 경작할 토지조차 없는 농민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무릇 정전법이 폐한 뒤로 부익부 빈익빈하여 … 평민은 立錐의 땅도 없게 되고 오로지 富人의 논밭에서 봄 여름 열심히 경작할 따름이다. 가을에 가져가는 것은 소출의 반밖에 안되니 국가가 부세를 올리든지 내리든지 빈민에게는 상관없는 것이다(李 瀷,≪星湖僿說≫권 11, 人事門 什一賦).

 그렇다고 정부에서는 빈소민에게 유리하도록 군역세를 면제해주는 방안을 강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각 아문의 재정수요는 군포징수만으로 충당할 수 없을 만큼 크게 증대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大殺之年’과 같은 흉년에도 군포세는 연기해줄 뿐이지 탕감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337)≪備邊司謄綠≫79책, 영조 2년 4월 1일. 따라서 흉년을 당하면 각종 부세를 마련하지 못하거나 생계를 이어갈 수 없는 농민은 유랑하거나 도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18세기 초에는 많은 유민이 발생하였다. 그런데 이 시기가 되면 흉년이 아닌데도 많은 농민은 농촌을 떠나고 있었다. 호남어사 李匡德은 지독한 흉황이었던 영조 원년(1725)과 그 이듬해에는 진휼이 있었고 또한 부세를 연기해주었기 때문에 유산하지 않았지만 영조 3년에 흉년에 거두지 못한 부세를 독려하자 호남인은 ‘一時盡空’하게 되었다고 하였다.338)李匡德,≪冠陽集≫권 9, 湖南御使書啓別單. 또한 경작할 토지가 없고 호적에도 빠진 의지할 데 없는 飢民·丐乞이 유랑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이 시기에 이르면 유민이라고 해도 반드시 걸인은 아니었다. 숙종 29년(1703) 도성에 집결한 유민을 구휼하여 원래의 지방으로 돌려보내는 임무를 지닌 領送使는 유민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각도 유민을 모아보니 대부분이 온 가족을 끌고 옮겨온 實民으로 종전과 같이 1, 2명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구걸하는 무리와는 같지 않습니다(≪肅宗實錄≫권 38, 숙종 29년 2월 신축).

 유민은 산간벽지로 가서 화전민이 되기도 하고, 절해고도나 연안의 어민이 되기도 하였지만, 지방장시나 포구로 가서 생활자금을 얻고자 하였다. 18세기 초 유민들은 대거 도성으로 유입하기도 하였다. 이 때 유민문제는 이미 한 지방 한 농촌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전체 차원 내지는 도성의 치안유지 차원의 중대사가 되었던 것이다. 또한 농민 유랑의 그 배후에는 국가의 부세에 저항하고 그들의 신분을 상승시키고자 하는 욕구가 깔려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강한 자는 도적이 되고 약한 자는 승려가 된다고 일컬어지기도 하였지만, 호적에서 빠지고 군역을 회피하려는 한에서는 犯法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흔히 적도로 취급당하였다. 유민이 근접하면 稍實한 마을의 주민은 그들을 용인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유민이 도적이 되는 길이 여기에서 열리고 있었다. 변산적으로 생포된 3인의 적도의 공초는 그 구체적 모습을 전해주고 있다.

束伍로 입적된 李應白(41세)은 평소에 束伍軍籍에 들어있는 것을 싫어하던 중 黔毛浦로 正兵布를 납부하러 갔다가 적도 17명을 만나 변산으로 따라가고, 驛奴이나 驛奴案에 들어있지 않은 全乙生(38세)은 어느 한 곳에 의뢰할 데가 없는데 흥덕으로 소금을 짊어나르다가 영광인 김총각에 포섭되었으며, 함평 관아의 사령이었던 金旬必(37세)은 죄를 지어 도망하였다가 김총각과 서울 사람 백서방을 만나 ‘우리를 따라오면 의식은 족하다’고 하는 말에 적도에 들었다(≪戊申別謄綠≫1책, 3월 18일 全羅監司 鄭思孝狀啓).

 이에 의하면 적도가 되는 동기나 계기는 바로 ‘군역회피, 관가득죄 및 無籍無賴’ 등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8세기 초에 이르면 적도는 “도성 주위를 수십리나 둘러싼 형세를 이룰 만큼” 크게 일어났다.339)≪肅宗實錄≫권 54, 숙종 39년 윤5월 갑자. 적도는 그 세력이 커짐에 따라 내부 체계를 세우고 무장을 강화하였다. 여기에 “북로로 유배되어간 자가 그에 들었다”고 하듯이 지략을 갖춘 인물 등도 가담하였으며, 정읍 같은 곳에서는 “백 명 정도가 槍을 들고 放砲를 하며 괴수는 갑옷을 입고 말을 탔다”고 하였다.340)≪肅宗實錄≫권 38 하, 숙종 25년 12월 갑술·권 54, 숙종 39년 9월 을사. 당시의 적도는 공공연하게 관가를 침범하고, 향리 군관을 살해하고 감옥을 부수며, 封物과 군기를 탈취하였으며 심지어 治盜를 담당한 관리의 가속에게 보복을 가하기도 하였다. 이같은 적도의 다양한 존재형태 및 행동영역의 확대과정은 봉건통치권력의 기능을 저해하는 방향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세국가로서는 반드시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는 문제였다. 특히 그것이 농민층 분해에 따른 유리민의 증가와 관련된 이상 향촌사회 동요를 수반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곧 중세권력의 불안정을 가져올 주요한 조건이 되기 때문이었다.

 정부에서는 이러한 사회정세의 불안과 도적의 만연에 대하여 여러 가지 대책을 세우고 이를 추진하였다. 정부는 민원의 핵심이었던 군역제를 釐正하기 위하여 ‘良役均一化’ 정책을 관철하고 ‘減布均役論’을 제시하였으며 또한 빈궁자의 구제를 위하여 ‘賑恤事目’을 제정 실시하였다. 또한 백지징세 등을 방지하고 신기전에 과세함으로써 전결과세에서의 공평을 꾀하기 위하여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양전사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당시 정부의 일련의 조치로 인하여 민생의 안정, ‘균부균세’가 기약될 수는 없었다. 良役釐正은 양역간의 현저한 불균현상을 해결하였으나 양역을 극력 회피하려는 계층의 불만은 해결할 수 없었다. 또한 감포균역론은 군관 명호를 새로 얻어내거나 헐역에 투속한 세력 그리고 사족의 신분을 모칭하던 계층에 대해 낭패감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편파적·고식적 진휼사업의 개선은 진휼 전곡을 비축한다는 명목으로 부민을 침탈하는 통로를 열었다.

 특히 실시 초기부터 “국가에 이롭고 민에는 해롭다”라는 논란이 있었던 양전사업은 삼남 각처의 민심을 동요시켰다.341)≪備邊司謄綠≫72책, 숙종 45년 9월 16일. 양전사업에서 山火田이나 海澤의 가경전 등이 원결로 새로 파악되어 인조 때의 甲戌量田에 비하면 전라도는 4만 3천여 결, 경상도는 3만 7천여 결이나 증가하였다. 그러나 양전이 진행되는 동안 각 지방의 토호 및 농민들은 고의로 陳廢로 하였다가 양전이 지난후에 還起할 정도로 양전에 대하여 여러 측면에서 저항하였다.342)≪量田謄綠≫경자 6월 29일·9월 20일. 자신들의 경지가 出稅田으로 치부되는 것을 꺼려 했기 때문이다. 양전사업은 산구릉이나 해안의 간석지 등을 개간하였던 농민이나 이를 주도한 토호들의 반감을 유발하였다.

結負數는 점차 증가하였으나 民怨은 오히려 심하였다. 세상 사람의 말이 三南에서 인심을 잃은 것은 改量 때문이라고 하는데 믿을 만하다(≪景宗修正實錄≫권 1, 경종 즉위년 10월 기해).

 당시 정부는 이상의 대민 회유, 민정개선의 방책을 모색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강경책을 입안하여 시행하였다. 먼저 적도에 대한 行刑을 강화하였다. 즉 종전에는 적도는 세번 자복한 후에 처단하였는데 도적 행위가 극심해진 상황에서 두번 자복으로 바로 처단하도록 한 것이다.343)≪肅宗實錄≫권 39, 숙종 30년 정월 을축.
≪秋官志≫3편, 考律部 續條 竊盜.
또한 수령의 군사권이 영장에게 귀속됨으로써 지방의 치안유지에 어려움이 있다고 판단한 정부는 ‘吏奴作隊’를 통하여 수령에게 이를 지휘하여 치안에 대비하게 하였다.344)≪肅宗實錄≫권 38 상, 숙종 29년 4월 기묘·권 60, 숙종 43년 9월 무오.
≪備邊司謄綠≫60책, 숙종 36년 10월 7일·11월 29일.
북한산성을 수축하고 도성을 개축한 것은 ‘도성방위론’에 따른 군사적 목표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도성으로 많은 유민이 유입되고 도적이 들끓게 된 사정과 관련이 있었다.345)李泰鎭,≪朝鮮後期의 政治와 軍營制變遷≫(韓國硏究院, 1985).

 이러한 강경책은 부분적으로 효력이 있었겠지만 민심의 이탈을 조장하는 측면도 적지 않았다. 형률강화는 많은 無辜者를 낳았다. 북한산성을 축조하고 그 관리기구로 경리청을 설치 운영한 것은 지방재정을 고갈시킨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즉 북한산성을 축조하기 이전 軍餉은 각 읍에 보관되어 있었던 것인데, 지방의 군향을 경리청에 귀속시킴으로써 도성 인근의 몇 개 읍에는 많은 곡식이 유입되어 ‘穀多’의 풍족함이 있었지만, 다른 지역은 그와 정반대로 고통을 겪게 되었다.346)≪英祖實錄≫권 8, 영조 원년 11월 병신. 또한 경리청은 그 본곡을 ‘立本取息’하여 확충하여 갔는데 전라도 여러 지방 중에서도 부안지방은 혹독한 피해를 감수하였다.347)≪備邊司謄綠≫70책, 숙종 43년 5월 27일.

 이러한 사정에도 당시 정부는 부안의 변산 및 안면도에 대한 강력한 ‘摘奸’책을 추진하였다. 원래 변산·안면도 등지는 정부가 松木을 조달하기 위해 민간의 벌채, 경작을 허락하지 않았던 국가적 養松處로 지정되어 있었다. 이 지역에 “다수가 잠입하여 재목을 베어 도둑질하고 전토로 개간하며 鹽盆을 개설한 결과” 국가의 공용 船材마저 조달하기 어렵게 되었다.348)≪備邊司謄錄≫49책, 숙종 21년 정월 23일·60책, 숙종 36년 11월 13일. 당시의 농법개선, 인구증가, 농지수요의 증대에 따라 임야가 개간되는 상황에서 안면도 변산 등도 그 예외일 수 없었던 것이다. 특히 변산반도는 제염업, 사기업, 선박제조업이 발전하면서 목재수요가 크게 증대하여 소나무가 대량 벌채되었던 것이다. 국가는 이에 대해 강력한 규제조처를 취하였다. 숙종 21년(1695)부터 정부는 경내의 민가를 구축하고 분묘를 훼파하고 목재수요가 많은 염분과 사기점을 금지하는 등의 ‘禁松’정책을 추진하였으나,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숙종 42∼45년간에 이르러 정부는 비변사의 낭청을 파견하여 보다 강압적인 금송정책을 추진하였다.349)≪備邊司謄綠≫69책, 숙종 42년 정월 27일·12월 26일 및 72책, 숙종 45년 정월 17일. 숙종 42년 변산지방에는 금송구역 경계(禁標) 내에 민가 235호를 비롯하여 적지 않은 가경전이 있었으며 몰래 묘를 쓴 자리(偸葬處)도 36군데나 있었다. 또한 금표 밖 5리 이내에 염분 13좌, 사기점 등 여러 수공업 제조처가 180호에 이르고 있었다. 정부는 일차적으로 사기점 27호를 구축하고 염분을 훼파하였으며, 투장처를 옮겨가도록 조치하였다. 그리고 금표 안에 있는 민가 120호를 산직으로 세우고 나머지는 퇴거시켰다. 가경전은 인근의 黔毛浦와 格浦에 귀속하였다.

 숙종 45년에 이르면 안면도의 경우는 전반적인 효과를 보았지만 변산지방의 사정은 여의치 않았다. 정부가 지시한 ‘禁松作契’는 실행되지 않았고, 冒耕地는 더 늘어가는 형편이었으며, 여전히 투장처는 30군데나 더 생겨났던 것이다. 염분 2좌도 더 개설되었다. 어떤 양반은 변산 밖에 살면서 송목을 벌채하여 자기 배로 인근의 무장으로 운반하여 팔고 있었다. 정부의 2차 적간은 보다 강경한 것이었다. 경내 양반 43호가 구축되고, 사기점 등 46호가 폐쇄되었으며, 薪炭을 매장한 곳은 흙으로 쌓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민간에게서 나무를 자를 만한 도끼까지 몰수하였다. 이러한 규제는 비단 변산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변산과 인근인 무장지방의 제염업도 억압당하였다. 왜냐하면 무장의 제염업은 그 소용되는 목재를 변산에서 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하여 변산뿐만 아니라 인근 무장 등지의 제염업, 사기제조업 그리고 임산업이 큰 타격을 입었다.

무장의 허다한 鹽盆은 금송산과 한 포구를 사이에 두고 있습니다. … 무장의 염분을 참작하여 줄인다면 禁松養木의 정책에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備邊司謄綠≫72책, 숙종 45년 정월 17일).

 정부는 금송책의 추진과정에서 이 지역 상공업을 강력하게 억제 금압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풍부한 자원과 각종 산업을 영위하였던 주체로서의 토호 부민의 반발도 적지 않았다. 제2차 적간 이후에도 사기점 46호와 염분 15좌는 여전히 생산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같이 변산적간이 곤란하였던 것은 “바다를 건너 육지에 닿고 산이 높고 계곡은 깊어 매우 험준한데 병영이나 수영이 모두 이틀 사흘 거리가 되고 또한 각 진이 이백 리, 사백 리나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하는 변산지방의 자연지리적 환경에 더하여 치안력이 미치기 어려운 조건이 있었을 것이다.350)趙文命,≪鶴岩集≫권 3, 申請乞休仍陳湖南諸島事宜疏.

 이처럼 변산지방은 이 시기에 있어서 정부의 억압적 산업정책으로 인하여 직접적인 피해를 당한 지역이었다. 이 과정에서 이 지방의 유력한 토호들은 수령에 대항하다가 오히려 치죄를 당하였다. 벌목업을 크게 일으키고 있었던 高應良은 ‘수령을 모함하였다’는 죄목으로 유배를 당하였다.351)≪推案及鞫案≫戊申逆獄推案 권 7, 7월 4일 愼後三供. 그러면서도 당시 집권층은 변산에서의 금송 지구 밖의 양안에 등재되지 않은 토지를 내수사로 하여금 절수하도록 배려하였다.352)≪備邊司謄綠≫82책, 영조 3년 10월 1일. 이는 궁방전의 억제라고 하는 원칙에 의하여 철회되기는 하였지만 재지사족, 토호층에게 더한층의 거부반응을 불러일으킬 소지를 남기는 것이었다. 더욱이 경리청의 차인배들에 의한 입본취식의 참화가 매우 심하였다. 변산적간의 추진은 결국 앞에서 살핀 바와 같은 양전사업에서와 같이 민심의 이반과 토호의 반발을 초래하였던 것이다. 이 지역에서 國과 民의 대립은 그만큼 심화되었다.

 18세기 초 강온을 병행하며 시행된 일련의 정책은 노론정권에 의해 추진되었다. 그러나 이런 정도의 모순타개책으로 당시의 사회모순·사회갈등이 치유될 수는 없었다. 중세사회는 훨씬 더 큰 폭으로 변동하고 있었고, 그에 따른 ‘大變通’·‘大更張’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노론의 지배정책은 민심의 이탈, 사회 제세력의 이반을 조장하는 측면이 있었다. 특히 부세제도의 이정책은 농민의 몰락을 더 한층 촉진시키는 일면 군역제 개혁론은 신분 상승을 도모하는 ‘稍實’민의 사기를 꺾는 것이었다. 이 시기 민심의 동향은 조선왕조의 국가재조책 추진의 사회적 동력의 역할을 하는 측면도 있었지만 그 실제적 과정에서는 위협적 난관이 되었다. 민의 저항은 중세적 토지소유제의 변동, 중세적 신분제의 해체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사회발전의 불가피한 한 과정에서 분출하는 것이었지만, 정부가 견지하는 중세적 규범과 법제의 시대적 한계 속에서 더욱 노골화되면서 그것을 부정하는 방향을 취하게 되었다.

 이것은 당시 여러 사회 계층의 폭력적 저항으로 표출되었다. 이 시기에 들어서면 그것은 매우 빈번해졌다. 경종 원년(1721) 4월 石城·懷仁·樂安 등의 수령이 봉변을 당하고 이어서 태인현에서는 백성이 관문 앞에 모여 울부짖는 일이 생기게 되었다.353)≪景宗實錄≫권 3, 경종 원년 4월 경신. 같은 해 6월 청주에서는 관창에 난입하여 환곡을 빼내 마음대로 민간에게 나누어주는 일도 있었다.354)≪景宗實錄≫권 4, 경종 원년 6월 기미. 감옥을 부수고 죄수가 도망가는 사건도 빈번해졌다. 경종 즉위년 6월 典獄署에 갖혀 있던 명화적 16명이 탈출하였고,355)≪景宗實錄≫권 1, 경종 즉위년 6월 을축. 경종 2년에는 진주에서 적도 70여 명이 탈옥하였다.356)≪景宗實錄≫권 10, 경종 2년 11월 정미. 경종 3년 4월에는 청주지방에서는 “대신과 중신의 墳山에서 作變하고 掛書를 살포”하는 사건이 있었다.357)≪景宗實錄≫권 12, 경종 3년 4월 갑술. 이것은 당시 세력가가 함부로 분묘를 조성하고 산송을 야기하는 것과 관련이 있었다. 군정향교의 殿牌가 절취되거나 봉변을 당하였다.358)≪學校謄綠≫8책, 경자(경종 즉위년) 12월 6일·계묘(경종 3년) 3월 16일. 이러한 일은 額外校生이 군정·군보로 차정되어 반발하였거나 향리층이 수령을 협박하고 경질시킬 구실을 만들기 위하여 자행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陵園의 소나무를 베냈다고 하여 유형에 처해진 사노는 귀환하여 長陵에 방화를 저지르기도 하였다.359)≪英祖實錄≫권 8, 영조 원년 10월 경인·11월 병오. 경종 원년 영천지방에서는 토호가 落松에 대해 원망을 품고 일향에 통문을 돌리고 환곡을 받아가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稜杖을 갖춘 무뢰배를 이끌고 관정에 돌입하여 향소를 구축하였다.360)≪景宗實錄≫권 4, 경종 원년 6월 을미.

 영조 즉위년(1724) 영덕 지방에서는 수령과 향소에 대하여 향리가 무력으로 대항한 사건이 벌어졌다.

호장, 이방, 사령, 관노가 읍성을 포위하고 도로를 차단하여 관에 부세를 납부하러 가던 村氓을 내쫓고 장계를 가지고 감영에 가는 衙奴를 가로막았다. 그리고 향소를 위협하여 黨에 들어오도록 하고 듣지 않으면 그 妻를 결박하여 강제로 맹서를 받아냈다. 마침내 병기를 갖추고 관문에 돌입하여 흉언으로 수령을 공갈한 사건이 있었다(≪英祖實錄≫권 1, 영조 즉위년 9월 기사).

 영조 2년에는 전라도 광주에서 탐욕스런 목사를 구축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광주에서 刺使를 내몰았다. … 삼남에 황년의 재난이 극심한데 貪風이 크게 일어나 목민관이 백성을 살아가지 못하게 한다. 광주민이 난리를 일으킨 것은 이 때문이다(≪英祖實錄≫권 9, 영조 2년 3월 임인).

 영조 즉위 이후 대흉년이 들면서 국가와 민의 대립 양상은 마침내 민에 의하여 목민관이 내쫓기는 초기적 형태의 민란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당시의 한 정부 관료가 “점차 나라는 나라대로 백성은 백성대로 서로 막연하게 되어 상관없이 간섭하지 않으니 어찌 백성이 실망하지 않고 난리를 생각하지 않겠는가”라고 한 지적은 민심 이반의 정도를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361)≪景宗實錄≫권 3, 경종 원년 4월 경신. 이러한 상황에서 ‘邊山賊’의 소문이 나라 안에 크게 유포되었다.

 영조 원년의 흉년으로 호남에는 많은 유민이 발생하였고 그들의 일부는 군도가 되었다. 이들 군도는 무장력을 확보하고 내부의 조직체계를 갖추면서 스스로를 ‘綠林黨’으로 자처하였다. 이들은 동시에 그들 세력을 보전 확대시키기 위해 일정한 근거지를 확보하여 나갔다. 전라도에서의 근거지는 대체로 변산과 월출산 그리고 지리산 등지였는데, 그 세력이 강대하여 절 한채를 전부 빌려 겨울을 지내면서 백주에 장막을 치고 그 위세를 부려도 관에서는 토벌하려고도 하지 않았다.362)정석종,<영조 무신란의 진행과 그 성격>(≪조선후기의 정치와 사상≫, 한길사, 1994), 126∼127쪽. 당시 전라도에는 ‘劇賊’으로서 ‘자고로 유명한 金단과 魏고쵸’가 변산과 지리산에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고, 부안에는 金衡이란 적수도 있었다.363)≪推案及鞫案≫戊申逆獄推案 권 3, 4월 7일 羅崇大供·권 8, 7월 7일 姜謂徵供. 이 중에서도 변산반도는 녹림당의 가장 강력한 근거지가 되고 있었다. 변산반도는 지리적 환경과 교통상의 편리함 그리고 여러 산업이 발전하고 있었던 조건으로 인하여 많은 유민을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변산적’은 “도당을 충원하는 방식이 각 읍이 양민을 수괄하여 첨정하는 것”과 같이 하였는데, ‘作賊’의 무대를 부안·고부로 하지 않고 정읍·장성을 그 대상으로 삼았던 바 ‘가까운 데를 버리고 먼 곳을 취한다’는 방침을 가지고 인거 주민을 기반으로 근거지를 확보하고 있었다.364)≪備邊司謄錄≫82책, 영조 3년 10월 24일.

 이같은 군도는 ‘明火作賊’만을 일삼는 것은 아니었다. 張吉山은 상인 세력, 승려 및 일반 민중과 연결된 무장한 馬商團이었다.365)鄭奭鍾,<肅宗年間 僧侶勢力의 擧事計劃과 張吉山>(≪朝鮮後期社會變動硏究≫, 一潮閣, 1983). 숙종 30년경 제주 근해에 “밤에는 소나 말을 盜殺하고 낮에는 바다로 나가 떠다니던 海浪賊”도 실제로는 관아에 납부해야 할 어선세 등을 거부하며 전라도 연안에서 활동하는 무장력을 갖춘 潛採漁船團으로 밝혀졌다.366)≪肅宗實錄≫권 39, 숙종 30년 5월 계묘. 일부의 유파는 경향의 토호·세가와 연결을 가지면서 경제적 폭리를 취하기도 하였다. 한때 도적을 다스림에 맹위를 떨친 權卨이란 관료는 숙종 37년 ‘排淸掛書’의 수범으로 지목되었을 때에 “근래에 다스린 적도는 모두 재력을 갖추고 경향의 세가와 체결하고 있는데 이들이 자신을 무고하였다”고 하였다.367)≪肅宗實錄≫권 50 상, 숙종 37년 7월 계축. 그 자신도 치도 및 기타의 의도를 가지고 적소에 동지자를 포섭하고 있었다. 노론 4대신의 한 사람이었던 李頤命조차도 외딴 섬에서 자행된 ‘私鑄’를 방조한 혐의를 받은 적이 있었다.368)≪景宗實錄≫권 10, 경종 2년 11월 임진. 李瀷도 각처의 적도와 窩主를 다음과 같이 설파한 적이 있다.

奧主란 지금의 窩主인데 적도의 주모자를 일컫는다. 항상 人主의 좌우에 있으면서 안팎으로 호응하고 변란을 양성하는 자가 바로 그들이다(李瀷,≪星湖僿說≫권 10, 人事門 奧主)

 이들 녹림당은 각처의 토호 양반 등과 연결을 맺고 있었는데 호남의 경우에는 고부의 宋賀, 부안의 金守宗(金守亨) 및 나주의 저명 가문의 후예였던 나씨 일족 등이 대표적이었다.

 송하는 숙종 38년(1712) 호남지방에서 도적이 크게 일어나고 민심이 동요하자 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호남 인재를 수용하려고 하였을 때 ‘별천’에 오른 인물이었다. 그는 태인현의 환곡을 자세히 파악하고 있을 정도로 시무에 밝았고 둔갑술·비술을 구사한다는 소문도 돌았으며 불가와도 인연이 있었다. 그는 지방의 양반과 체결하면서 남원·임실·고부 등지의 녹림당을 지휘하고 있었다. 양반 중에는 과거를 준비하거나 부호도 있었다. 이를 기반으로 녹림당과 연계하면서 지역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369)≪備邊司謄錄≫66책, 숙종 39년 11월 24일.
≪推案及鞫案≫戊申逆獄推案 권 4, 4월 20일 宋賀供·4월 23일 蘇檉供 및 권 5, 5월 2일 成一龍供.

 부안 변산의 김수종은 변산에서 조선업을 일으킨 거부로서 그 노복이 살고 있는 집이 60여 호에 이르렀다. 그는 하동·순천·진주지방의 토호와도 체결하였으며, 훈련원 주부를 지낸 해미의 박계상과도 연결을 맺고 있었다. 이 토호들은 地師나 乞儒를 매개로 상호 정보를 교환하고 있었다. 그의 집에는 한 때 운봉에 살다가 용인으로 옮겨간 鄭八龍(혹은 鄭八熊)이란 적수가 살기도 하였다. 정팔룡은 변산 靑林寺에서 ‘靑林兵’이란 칭호를 가지고 적도를 이끌던 인물이었다.370)≪推案及鞫案≫戊申逆獄推案 권 8, 7월 10일 姜渭徵供.
≪戊申別謄錄≫5책, 8월 21일 河東府使牒呈內 李命根招辭.

 나주의 나씨 일문이었던 羅斗冬·羅晩致·羅崇大 등이 오랫동안 양병하고 있었다는 것은 바로 녹림당과 연결되었음을 말한다. 이들 중 나만치는 “추노나 지관를 빙자하여 그 발길이 팔도 어느 곳에 닿지 않은 곳이 없었고 삼남의 인물과 통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효행포상자로 선정되어 정부가 상으로 내린 미포를 거절하여 화제가 된 적도 있었다.371)≪戊申別謄錄≫2책, 3월 29일 南漢巡撫使金東弼狀啓內 尹熙慶招辭.
≪推案及鞫案≫戊申逆獄推案 권 2, 4월 7일 羅崇大供.
≪忠孝謄錄≫권 6, 계묘 3월 20일.

 변산 등지의 녹림당은 전라도의 경계를 벗어나 경상하도, 경기도의 토호 양반 등과도 체결하였다. 조선 중기 저명한 성리학자이었던 鄭蘊의 직계손으로 노비와 전토가 매우 많아 그 호부가 일도를 움직였던 鄭希亮은 그 심복 鄭倬을 통하여 송하와 결탁하였다.372)≪勘亂錄≫권 2, 3월 정축. 또한 이웃에서 거처를 모르고 죽은 줄로 생각할 만큼 여러 지역을 떠돌면서 명화적의 수괴가 되어 ‘鄭都令’을 자칭하였던 鄭世胤도 호남 녹림당과 연결되었다. 이 과정에서 남원·금구 등지의 토호와도 체결하였던 그는 鄭麟趾의 후손으로 신분은 業儒로 현달하지는 못하였으나 ‘理學者’로 인식되고 있었다.373)≪推案及鞫案≫戊申逆獄推案 권 7, 6월 17일 閔純孝供.
≪南征日錄≫권 2, 3월 24일.
그는 경종 즉위에 즈음하여 나주의 토호세력을 통하여 호남의 녹림당과 연결을 맺고 영조 즉위년(1724)에 이르면 정치적 행동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녹림병 약간 명에 지나지 않았는데 마침내 600∼700명에 달하여 삼남에서 한 곳을 택하여 거점으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전라도에서는 나숭대가 녹림병 수백 명을 모아 부응하고자 하였고 세윤이 이를 주장하였습니다. … 처음에는 草冠之計로 시작하였는데 도당이 무리를 이루었고 얻은 바가 많아진 후에는 비로소 모역의 마음을 품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推案及鞫案≫戊申逆獄推案 권 3, 4월 14일 安愰供).

 그리고 정세윤은 부안의 김수종과도 직접 체결하였다. 그는 이를 기반으로 삼남 한 곳에 근거하여 정치적 진출을 꾀하고 있었던 것이다. 변산반도에서 많은 유민이 모여들고 녹림당의 세력화는 殿牌作變·斯文紛亂·吏胥作變·民人作亂의 사회적 분위기와 맞물려 당시 정권에서 소외된 사족층은 “국가의 정령이 이렇게 어지러우니 나라가 머지 않아 망하지 않겠는가”라든가, “인심이 모두 변하여 난리를 생각한지 오래되었다”라는 등의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374)≪推案及鞫案≫戊申逆獄推案 권 2, 3월 28일 李翼觀·李日佐對質·권 5, 5월 12일 金墇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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