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3. 여러 지역의 항쟁과 ‘무신란’
  • 2) 무신란의 발단과 전개
  • (1) 18세기 초 정치정세와 ‘무신당’의 결성

(1) 18세기 초 정치정세와 ‘무신당’의 결성

 이 시기의 유민의 증가와 여러 사회세력의 저항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중세사회의 해체를 예시하는 구체적인 징후들이었다. 민심이반은 중세적 규범과 법제를 부정하는 방향에서 중세사회의 해체를 재촉하는 것이었다. 조선 후기 지배세력은 국가재조의 방안을 마련하고 민심이반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끊임없는 대립, 갈등을 거듭하였다. 본래 붕당대립은 각 정파간의 경쟁을 유도하고 그로 인해 전향적 시책이 준비될 수 있는 긍정적 측면이 없지 않았다. 예송·사문시비 등은 이 과정에서 자파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명분적 이론투쟁의 성격을 띠는 것이었다. 이는 중세사회 해체의 징후가 구체화하고 피지배층의 저항이 심화되는 과정과 그 궤를 같이하고 있었다. 그것은 잦은 換局으로 귀결되었다. 일당이 국가의 권력을 장악하면 다른 붕당은 완전히 배제되는 정치행태가 반복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17세기 말기에 접어들면서 붕당대립은 국왕을 둘러싼 궁궐과 훈척이 정치투쟁의 일익을 담당하게 되면서 ‘臣强’, ‘干犯名義’, 그리고 마침내 ‘東宮保護’, ‘護逆’ 등의 쟁점을 중심으로 ‘忠逆’의 문제로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희빈 張氏의 賜死에 이은 동궁(경종)의 보호 문제와 세자 즉위 이후의 후계구도를 둘러싸고 조선 후기 지배층은 상호 불용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당론에 의한 국왕 선택으로 치닫게 된 붕당대립은 기왕의 정치지형의 대균열을 가져왔다.

 숙종 36년(1710) 庚寅換局 이후 국왕의 선택을 둘러싼 붕당 대립은 숙종의 지지에 의하여 일단 노론측의 우세로 귀결되었다. 이후 노론정권은 동궁을 폐출할 것이라는 유언을 진정시키는 한편 숙종 42년 丙申處分으로 노론과 소론간의 사문시비에 종지부를 찍고 그 이듬해에는 丁酉獨對를 통하여 동궁(경종)은 즉위시키되 延礽君(영조)을 세제로 책봉한다는 ‘先卽位後冊封’의 당론을 추진할 수 있었다. 노론 당국자들은 숙종 말년에 이미 경종 즉위 이후에도 자파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을 다졌던 것이다. 경종 즉위 이후 노론은 생모 희빈 장씨의 所生之恩을 회복해야 한다는 남·소론계의 주장을 봉쇄하면서 세제책봉의 명분을 위하여 淸使와 교섭하여 연잉군을 접견하도록 하는 등의 정치력을 발휘하다가, 왕대비로부터 “효종대왕의 血脈으로 선대왕(숙종)의 골육은 主上과 연잉군뿐이다”는 언문 수교를 얻어내서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하는데 성공하였다.375)≪景宗實錄≫권 2, 경종 즉위년 11월 경인·권 4, 경종 원년 8월 무인.

 그러나 당시 소론은 노론의 일사분란한 정치행동을 저지하지 못하였다. 여기에는 소론이 서인과 남인의 대립과정에서 서인 훈척의 가혹한 남인 탄압에 반발한 서인 신진사류가 남인 소북계를 포섭, 제휴하면서 정치세력화 되었던 까닭에 남인계 수용문제나 희빈 장씨 사사문제 등에서 내부 알력이 적지 않았는데 이 때에 이르러서는 南九萬이 崔錫鼎의≪禮記類編≫을 비판하면서 내부 결속력이 현저히 약화되었다.376)≪肅宗實錄≫권 47, 숙종 35년 3월 계해. 또한 朴世采와 그 문인은 노론으로 ‘전향’하였다.377)정경희,<17세기 후반 ‘전향노론’학자의 사상>(≪역사와 현실≫13, 역사비평사, 1994). 경종 즉위를 전후하여 趙泰耈·崔錫恒·李光佐·趙泰憶이 조정에 참여하였지만 이들의 노론정권에 대한 견제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남인측은 더한층 어려운 사정에 있었다. 庚申換局(1680)으로 세력이 약화된 남인은 己巳換局(1689)으로 집권하였지만, 이미 청남·탁남으로 나누어 졌다가 甲戌換局(1694) 때 정치권에서 배제되고 이후 희빈 장씨의 사사문제에 연류되어 붕당으로서 재기할 수 없을 만큼 타격을 입었다. 그리하여 숙종 말년 이후에는 정권에서 거의 도태되기에 이르렀던 남인은 노·소론간의 극한 대립의 와중에서 붕당재건 혹은 정치참여의 명분을 놓고 내부 진통을 겪고 있었다. 이 때 일부의 남인 중에는 기사환국 당시 閔妃 폐출은 국왕의 전권으로서 국왕에게 일시적 오류가 있는 것이지 己巳大臣(權大運·睦來善·閔黯·李義徵)에 그 책임을 돌리는 것은 국왕권에의 간섭이라는 입장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남인의 경신·갑술 연간에 정치적으로 퇴진한 것은 宗親 및 宮禁勢力과의 연계에도 그 원인이 있다고 반성하여 별파를 선언하는 일파가 있었다. 이들은 경종 2년 무렵부터 전자의 입장은 門內派 후자의 입장은 門外派 그리고 여타 관망파는 跨城派로 분류되었다.378)朴光用,<英·正祖代의 蕩平策의 推移와 性格>(서울大 碩士學位論文, 1983), 5∼6쪽.

 이같은 상대 붕당의 약화, 분립의 상황에서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하는 데 성공한 노론은 그 여세를 몰아 대리청정까지 실현코자 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정국은 일변하였다. 소론계가 총공세를 취하고 남인이 가세하였으며 노론 내의 일부 세력(權相游·朴致遠)까지 반발하여 상황은 급전하였다.379)≪景宗實錄≫권 5, 경종 원년 10월 기사. 경종 원년(1721) 12월 金一鏡·金眞儒·朴弼夢·徐宗厚·尹聖時·鄭楷·李明誼의 辛丑疏로 노론이 퇴진하고 소론정권이 성립하였다. 이후 睦虎龍의 고변에 따라 노론세력은 4대신이 죽임을 당하는 등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辛壬獄).

 여기에는 외방 사족의 노론을 규탄하는 언론과 적극적 행동이 한몫을 하였다. 일부의 유생은 폭력성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경종 즉위년 청주 유생은 ‘辛巳誣獄’의 통문이 전달되자 집단으로 청주향교에 쳐들어가 노론계 유생을 축출하고, 향교를 폭력으로 장악하기도 하였으며 경기 유생 李夢寅은 칼을 들고 대궐에 돌진하여 ‘신사무옥’을 주장하기도 하였다.380)≪先庚後甲綠≫권 1, 경자(경종 즉위년) 8월 13일·12월 11일. 영조 즉위년(1724)에도 경주지방의 유생 백여 명이 宋時烈 영당을 훼철하고 그 화상을 불태웠다.381)≪英祖實錄≫권 4, 영조 원년 3월 경술. 이런 계통의 유생은 흔히 노론 당국자를 ‘흉역배’로 단정하고 30년 동안이나 國柄을 농단하고 言路를 두절시켰으며 私人 狎客을 각 군에 居間으로 포진시켜 뇌물 등을 몰래 거두었을 뿐이라고 공격하였다.382)≪先庚後甲錄≫권 6, 임인 9월 11일.
≪景宗實錄≫권 8, 경종 2년 5월 신축.

 정권을 잡은 소론은 얼마되지 않아 緩少와 峻少로 분기하였다. 완소는 경종의 有疾을 인정하고 세제의 대리청정까지 은연중에 찬성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소론 사이에는 張氏追報와 立祠建號 문제, 남인계 수용문제, 壬寅獄에 따른 노론 4대신의 正法行刑 문제, 壬辰科獄 및 숙종 45, 46년 양전사업의 수정 문제를 놓고 내부 분열을 겪게 되었다.383)閔鎭遠,≪丹岩漫錄≫(≪稗林≫9), 170쪽.
≪辛壬紀年提要≫原編 2, 신축 10월 17일.
≪景宗實錄≫권 6, 경종 2년 정월 신축·을묘 및 권 11, 경종 3년 2월 무진.
여기에서 완소는 세제를 지키자는 입장에 더하여 일부는 온건 노론과의 보합탕평을 제창하는 경향을 보였으며 준소는 노론에 강경하며 남인측을 적극 수용하고자 하였다. 이광좌 등 소론 원로대신도 처음에는 준소세력과 보조를 같이 하였으나 김일경 등 준소의 독주에 반발하였다.384)鄭萬祚,<英祖代 初半의 政局과 蕩平策의 推進>(≪朝鮮時代 政治史의 再照明≫, 汎潮社, 1985), 243∼244쪽. 당시 김일경 등 준소는 소론 대신을 비롯한 다수의 소론이 그들의 의도에 따르지 않자 소론 중에는 “역적(노론)의 至親이 있어 모두가 감히 한 목소리로 임금을 대하지 않는다”라고 공격하였다.385)≪景宗實錄≫권 9, 경종 2년 8월 병인.

 마침내 김일경·박필몽 등 준소세력은 ‘金性宮人行藥事’의 査出을 전면에 내걸고 정국을 천단하려 했다. 당시 金姓宮人은 숙종의 후궁이던 金貴人(金壽與의 女)으로 지목되고 있었는데, 張世相(延礽君房 宮監)·金省行(金昌集孫)이 이를 시켜서 경종을 독살하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이들 준소는 김성궁인을 사출하고 이 사건의 전말을 조사해서 ‘孝宗血脈論’을 뒤집고 세제(영조)의 왕통계승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조정에서의 취약한 세력을 하급 관료와 외방 사족의 언론으로 지탱하면서 이광좌 등의 소론 대신과 완소세력까지도 축출하고자 하였다.386)≪景宗實錄≫권 14, 경종 4년 4월 정묘. 김일경 등은 남인을 동반자로 끌어들이기 위해 ‘蕩平天下’를 주창하였다.

一鏡의 무리는 當局하여 천하를 탕평하고자 하였는데 생원·진사·유학은 물론하고 모두 州牧의 수령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소위 ‘탕평천하’는 노론을 모두 죽이고 남인과 소론만을 등용한다는 것이었다(≪推案及鞫案≫136책, 을사 罪人睦時龍等推案 沈廷玉更推).

 이 때의 ‘南少蕩平論’은 완소는 물론 준소의 일부와도 대항 관계를 내포하고 있었다. 따라서 윤성시·이진유 등의 준소는 남인과의 탕평에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387)≪先庚後甲錄≫권 7, 임인 9월 22일.
≪景宗實錄≫권 6, 경종 2년 정월 신축·권 8, 경종 2년 6월 을묘 및 권 11, 경종 3년 2월 무진.
남인 중에서도 청론을 자처하면서 남인 별파를 선언한 문외파도 남소탕평론에 동조하지 않았다. 김일경계 준소의 남소탕평은 실현되지 않았다. 경종이 재위 4년 8월에 승하하고 영조가 즉위하였던 것이다. 영조는 즉위하자 곧바로 김일경 등을 축출하고 이듬해(1725)에는 乙巳反獄을 단행하였다. 을사반옥은 신임옥의 허구성을 증명하고자 취해진 조치이기는 하지만, 김일경계의 宮禁세력을 축출하고 김일경이 주장한 남소탕평의 세력기반을 분쇄하는 방향을 취하고 있었다.

 이처럼 1720년대 초반은 당론에 의한 국왕선택으로 국가의 체제 위기가 깊어지고 지배층간의 상호 살육과 보복으로 점철되었다. 여기에는 영조의 의지도 있었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종래 붕당세력의 해체와 재편의 계기가 되었다. 趙文命이 주창하고 趙顯命·宋寅命이 추진한 ‘탕평당’이 출현하였다. 이들은 ‘破朋黨’의 기치 아래 완론과 시무론을 매개로 하여 縉紳세력의 보합을 주장하였다. 保合蕩平論은 인조반정 이래의 근기가 중심이 된 집권세력의 동질성·연계성에 기초하여 붕당대립을 지양하자는 입장이었다. 이것은 黨禍로 인하여 민정이 원활하지 못하고 국왕권이 동요함에서 오는 영조의 위기의식과 부합하여 점차 그 세력을 키워나갔다.388)朴光用,<蕩平論과 政局의 變化>(≪朝鮮時代 政治史의 再照明≫, 汎潮社, 1985), 297∼300쪽.

 붕당재편의 또 다른 흐름은 영조에 반대하고 노론을 제거하여 정국을 주도하려 한 무신란 주도층, 즉 ‘戊申黨’으로 실현되었다. 이들은 당론상으로 준소·탁남·소북을 표방하고 있었다. 무신당은 영조 원년 을사반옥 이후부터 구체화되었다. 김일경의 추종세력이었던 박필현·이유익 등의 주도로 상주의 한세홍 괴산의 이인좌 등을 비롯하여 팔도에서 그 동조자를 포섭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金姓宮人’을 가려내자는 상소에 가담한 인사들이 많이 참여하였는데 서울에서는 李河·李思晟·閔觀孝·梁命夏·南泰徵·尹德裕·沈維賢 등이 입당하였고, 지방에서는 鄭希亮(안음)·羅晩致(은진)·趙德奎·趙鏛·任瑞虎(여주, 이천)·鄭世胤(용인)·權瑞麟·李昈(안성, 진위)·閔元普·閔百孝(충주)·金弘壽(상주)·李日佐(과천) 등이 가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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